#115
드래곤 아종이 아가리를 짝 벌리며 나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한 마리가 오자 나머지 두 마리도 따라가기 위해 날개를 펼쳤다. 펼쳐진 날개 밑으로 거대한 그늘막이 형성되었다. 나는 세 마리가 모두 나를 쫓아오는 걸 확인한 뒤 달리기 시작했다.
끼아아아아아!
<‘드래곤 아종’이 스킬 ‘드래곤 피어’를 사용했습니다. 시전자의 레벨과 30레벨 이상 차이 나는 모든 생명체가 그에게 기묘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사용자의 레벨이 높아 ‘드래곤 피어’가 무효화됩니다.>
<20% 확률로 상태 이상 ‘공포’가 적용됩니다.>
<사용자의 레벨이 높아 상태 이상 ‘공포’가 무효화됩니다.>
<5% 확률로 상태 이상 ‘마비’가 적용됩니다.>
<사용자의 레벨이 높아 상태 이상 ‘마비’가 무효화됩니다.>
다행히 아종보다 레벨이 높아 드래곤 피어가 무효화되었다. 그러나 얘네가 뿜는 불까지 무효화되는 건 아니라 나는 걸음을 더 빨리했다. 숲에 접어들어 나는 빠져나가기가 쉽고 그들은 나를 찾기가 어려워졌다. 우지끈, 그들의 날카로운 발톱과 공격에 나무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콰아아아-! 고목을 뛰어넘는 것과 동시에 목덜미에 화끈한 기운이 느껴졌다. 나는 루드비히가 준 망토를 덮어쓰며 바닥에 안착했다.
“미친…….”
위를 올려다보니 나무들이 불에 타다 못해 새까만 재로 변해 있었다. 가장자리의 나무들에 붙은 불이 점차 숲 전체로 번져 갔다. 내가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모습에 약이 올랐는지 녀석들은 시도 때도 없이 불을 뿜어 댔다.
불 외에도 산성 용액을 내뿜는 드래곤 아종도 있어, 나는 결국 보호막과 신속의 장화 스킬을 시전해야 했다.
“으앗!”
보호막을 두르는 것과 동시에 드래곤 아종의 입에서 산성 용액이 쏘아져 나왔다. 산성 용액이 보호막 위로 떨어지며 파지직 소리를 냈다. 나는 보호막을 겹겹이 두르며 몸을 최대한 웅크린 채 달렸다. 체자레와 루드비히는 도망쳤을까.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동굴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있었다.
잘 빠져나갔겠네.
살짝 안도하고 있는데 내 머리 위로 갑자기 그늘막이 졌다. 불안한 예감에 나는 즉시 몸을 옆으로 굴렸다. 콰앙! 날카로운 발톱이 내가 수 초 전까지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풀과 나무가 그 발밑에 으스러지며 날카로운 부스러기가 사방으로 튀었다. 보호막을 시전하지 않았다면 온몸에 상처가 났을 터였다. 내가 맞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드래곤 아종이 다시 날갯짓을 하며 상승했다. 돌기가 난 허벅지 근육이 위험하게 꿈틀거렸다.
계속해서 달리던 나는 바로 앞이 절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강물이 넓게 퍼져 있었다. 비행 스킬이 있으니 추락 위험은 없었지만, 드래곤 아종은 날아다니는 몬스터인 만큼 공중전에 강했다.
방향을 틀어 숲으로 돌아갈까 고민하고 있는데 이미 숲은 불과 산성 용액으로 처참하게 망가져 있었다. 이제는 도망을 칠 게 아니라 전투를 해야 할 때였다. 나는 절벽을 박차며 뒤돌아 드래곤 아종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무는 듯한 형세였다. 드래곤 아종 중 하나가 살짝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고위 공격 마법을 쓰면 드래곤이 눈치챌 수도 있지만, 여기서 개죽음 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손을 들어 올리자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마나가 온몸을 맹렬하게 휘돌았다.
“북풍의……!”
그러나 스킬명을 전부 내뱉기 전, 검은 형태의 무언가가 내게 빠르게 하강해 나를 끌어안았다. 수 겹으로 두른 보호막이 꿀렁거리며 그 검은 형태를 받아들였다.
“켁……. 숨, 막혀.”
공격 의지가 없어서 보호막이 그냥 통과시켜 준 것 같은데 너무 꽉 끌어안아 숨이 막혔다. 내가 당황해 몸을 굳히고 있자 그것이 슬쩍 손을 풀며 내 눈치를 보았다.
“이혀언.”
“……압실론.”
반쯤 꿈꾸는 듯한 목소리. 압실론이 나를 안은 채 울먹이고 있었다.
시퍼런 강물에 추락하기 직전 압실론이 검지를 위로 까딱였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위를 올려다보던 나는 기겁하며 압실론과 나의 몸에 망토를 둘렀다. 풍덩-! 목이 떨어져 나간 드래곤 아종의 몸이 어떠한 저항도 없이 강물에 처박혔다.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며 거대한 동심원이 퍼져 나갔다가 이윽고 잠잠해졌다.
끼에에에에에엑!
드래곤 아종의 째지는 듯한 단말마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위를 올려다보자 피를 뒤집어쓴 마티어스가 드래곤 아종의 머리에 올라타 다른 드래곤 아종의 목에 검을 쑤셔 박고 있었다. 그사이 압실론과 나는 절벽 위로 올라와 공중에 둥실둥실 떠 있었다.
마티어스가 마지막으로 남은 드래곤 아종의 공격을 받아내며 나를 힐끗 바라보았다. 마티어스의 시선에는 안도와 죄책감이 섞여 있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목에 검이 꽂힌 드래곤 아종이 발톱으로 공격을 시도했다. 마티어스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공격을 피해 냈다.
“우리는, 루드비히랑 체자레가 있는 곳으로 가자.”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은, 방해만 될걸?”
압실론이 한 말이 나를 아프게 찔러 왔다. 사실이라서 더 그랬다. 압실론이 공중에 올라 물었다.
“둘은 어디 있어?”
“아마 저쪽일 거야.”
나는 화재가 시작되는 지점을 가리켰다. 압실론이 나를 안은 채 그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압실론에게 안긴 채로 마티어스를 내려다보았다. 마티어스가 마지막 드래곤 아종의 머리에 검을 직선으로 내리꽂았다. 그것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즉사했다.
검을 비틀어 빼낸 마티어스가 내가 있는 쪽을 올려다보았다. 서로가 점처럼 작아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나는 우리가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있다.”
“어?”
“체자레.”
압실론이 바로 밑을 가리키며 말했다. 정말로 체자레의 노란 머리카락이 불타는 수풀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운디네의 춤.”
압실론이 주문을 외며 체자레가 있는 쪽으로 서서히 하강했다. 공중에 있던 수분이 뭉치고 뭉쳐 방울져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굵은 빗줄기가 엉망이 된 숲을 식혔다. 체자레가 달리기를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며 손을 흔들었다.
“압실론이 제때 왔나 보네. 다행이다.”
체자레가 드물게 숨을 헐떡이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온몸이 땀에 젖은 데다 군데군데 검댕이 묻어 있었다. 필사적인 모습이 낯설어 기분이 묘했다.
“루드비히는?”
“먼저 구하러 가라기에, 폐하의 명에 따랐지. 아마 뒤따라오고 있을 거야.”
몸도 성치 않은데 이 산불을 헤치고 오고 있다고?
“어느, 어느 쪽에서 왔어요?”
“응……? 저쪽.”
체자레가 자신이 왔던 쪽을 알려주자마자 나는 그곳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불탄 나뭇가지들이 여기저기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화염에 동굴이 밝아지던 순간 목격했던 루드비히의 모습이 잊히지가 않았다. 잘못 본 거라면 좋을 텐데. 체자레 역시 전력으로 뛰어온 거였는지 한참을 달려도 루드비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연기에 질식해서 어디 쓰러져 있는 거 아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폐하-!”
달리면서 목놓아 루드비히를 부르고 있는데 어디선가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옆을 돌아보자 루드비히가 나무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밝은 곳에서 비로소 확인한 루드비히의 모습은 엉망진창이었다. 옷은 타고 찢기고 그을려 있었으며, 뺨은 푹 꺼져 있었다. 항상 깔끔하게 면도하던 모습과는 다르게 수염이 엉망으로 자라 있었고, 은발은 윤기를 잃고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려는데 루드비히가 꿈꾸듯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현.”
나는 그에게 다가가려던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루드비히도 실언했다는 듯 난감한 기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실수한 건가.
그에게 다가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있는데 루드비히가 내게 다가오려는 듯 나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으지직, 불탄 나무가 부서지며 나무 위의 산성 용액이 루드비히를 향해 낙하하기 시작했다. 망토라도 있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그 망토조차 내게 준 루드비히는 맨몸이었다. 나는 루드비히를 향해 달려가며 외쳤다.
“실드-!”
어린아이 머리통만 한 크기의 산성 용액이 루드비히의 머리 위에 생긴 보호막을 따라 흘러내렸다. 산성 용액이 닿은 땅이 시커멓게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나는 보호막을 겹겹이 두르고 루드비히의 머리에도 망토를 단단히 두른 뒤에야 조금 안심할 수 있었다.
“……아.”
망토가 머리 위에 내려앉는 과정에서 매듭이 풀렸는지 루드비히의 한쪽 눈을 덮고 있던 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드비히가 난감한 신음을 흘리며 천을 찾기 위해 몸을 굽혔다. 바로 발밑에 있는 천을 찾는 루드비히의 손이 계속 바닥을 헛짚었다.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나는 루드비히를 대신해 천을 주워 들었다. 스르르, 망토가 흘러내리며 환한 햇살이 우리를 적나라하게 비추었다. 달라는 듯 뻗는 손길을 무시하고 나는 루드비히의 턱을 들어 올렸다.
“……무례하다.”
낮게 가라앉은 힘없는 목소리. 그렇게 말하는 루드비히의 한쪽 눈동자는, 내가 좋아하던 보라색은 흔적도 없이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초점을 잃고 이리저리 떠돌던 눈동자가 다시금 천에 가려졌다. 우리 사이에 침묵이 부유했다. 기억의 물살이 한차례 밀려 들어왔다.
헤일러가 뿌린 약을 맞은 뒤 나는 격심한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다. 그리고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때때로 일어나 몸부림을 쳤다. 그때의 기억이었다.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루드비히는 나에게 마법을 시전했다. 희생 마법의 일종인 부상 전이 마법이었다. 고위 마법사가 아니었기에 그 마법이 루드비히의 최선이었다. 루드비히는 내 부상을 둘로 나누었다.
독에 맞아 차츰차츰 시력을 잃어 가는 눈동자는 자신에게, 혈관을 타고 돌아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독은 체자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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