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드래곤은 아닌 것 같군.”
“왜, 왜요?”
쿵쿵거리는 소리를 신중하게 듣고 있던 루드비히가 말했다.
“일단 화염 브레스가 약하고, 진짜 드래곤이라면 이 정도 크기의 동굴을 무너트리는 데 이만한 시간이 들 리 없다.”
“동의해요. 아마 가고일 떼거나, 드래곤 아종일 것 같네요.”
“드래곤 아종일 것 같군. 가고일 떼라면 아까 그 정도의 화염을 못 냈을 거다.”
드래곤 아종이라니. 동굴이 좁아 다행이었다. 그 미지의 생물은 그 후로도 갔나 싶으면 다시 쿵쿵거리며 존재감을 뽐냈다. 마치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우리가 나갔다 온 새 뒤를 밟은 것도 아닐 텐데. 드래곤 아종은 힘이 세고 공격 레벨이 높지만, 뒤를 밟아 더 많은 적을 칠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지는 못했다.
“마나의 흐름을 따라온 걸까요?”
“그럴 수도. 드래곤 쪽에서 보냈을 가능성이 크겠군.”
“……마나의 흐름이요?”
내 물음에 루드비히가 잠시 침묵하더니 조심스러운 태도로 입을 열었다.
“동굴에서 마법을 쓴 적이 있다. 공격 마법이 아니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재수가 없었군.”
드래곤이 눈치챌 정도라면 웬만한 수준의 마법이 아니었을 텐데, 그 마법을 쓴 게 체자레였을 리는 없고……. 몸도 안 좋은데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걸까.
다시금 동굴이 흔들리며 망토 위로 굵직한 종유석이 떨어졌다. 루드비히가 팔로 막아 내며 낮은 신음을 터트렸다.
“윽…….”
“망토 제가 들고 있을게요. 저 주세요.”
“쓸데없는 소리.”
아니, 이건 또 무슨 과보호야.
“폐하는 아프고 저는 멀쩡하니 제가 들고 있는 게 맞죠.”
“난 네 도움을 받을 만큼 나약하지 않아.”
“아니, 나약한 게 아니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앉아 있어.”
하여간 이상한 데서 고집이 있단 말이야.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루드비히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있어 주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자 밖의 몬스터가 동굴을 공격하는 빈도가 점차 잦아들었다. 불침번을 서겠다고 했던 게 무색하게 우리는 셋 다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저 멀리서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 * *
나는 꾸벅꾸벅 졸다가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배와 허벅지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체자레가 나를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옆을 돌아보자 루드비히가 내게 팔베개를 해 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망토로 종유석과 돌을 막아 내다 그대로 같은 망토를 덮은 채 잠든 모양이었다.
“일어났네.”
언제 일어났는지 체자레가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네. 그건…… 갔나요?”
체자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아직.”
“정찰 다녀오셨어요?”
“응, 너 잘 때 잠깐. 드래곤 아종이 맞았어.”
나는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동굴 입구가 작고 걔가 커서 다행이었지.”
“그러네요. 혹시 동굴 뒤에 탈출로가 있을까요?”
“동굴이 크고 복잡해서 있을 가능성이 있어. 사람이 빠져나갈 수 있는 크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탐색하러 다녀올까요?”
“그래, 다녀오자.”
우리 둘이 몸을 일으키자 루드비히가 잠에서 깨어났다. 아프긴 한지 평소보다 반응이 느릿느릿했다.
“어디 가는 거지?”
“동굴 뒤쪽에 탈출로가 있는지 알아보려고요.”
“같이 가.”
몸을 일으키려던 루드비히가 다시금 주저앉았다. 몸 상태가 어지간히 안 좋은 듯했다.
“우리끼리 다녀올게요. 쉬고 있어요.”
“……가지 마.”
루드비히가 내 셔츠 자락을 잡은 채 절박하게 말했다. 셔츠를 쥔 손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평소답지 않은 루드비히의 행동에 이마에 가만히 손을 대 보았다.
“열이…… 많이 나는데요.”
“그렇네.”
체자레가 시큰둥하게 답했다. 어깨를 으쓱인 체자레가 말을 이어 나갔다.
“탐색은 나 혼자 다녀올게. 여기서 루드비히랑 같이 있어 줘.”
“네…… 그럴게요.”
체자레가 품속에서 실뭉치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내 옷에서 풀어낸 실. 동굴 처음으로 탐색할 때 썼던 거야. 이거 가지고 있다가 가끔 내가 두 번 당기면 너도 두 번씩 당겨 줘.”
“아…… 네. 다녀오세요.”
체자레가 손끝에 흐늘거리는 실타래를 걸고 다녀오겠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체자레가 떠나갈 때까지 루드비히는 여전히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루드비히에게 물었다.
“물…… 좀 드릴까요?”
도리도리. 루드비히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여기 있어.”
그러기엔 목이 다 잠겨서 갈라지셨는데요.
이런 모습 좀 새롭네……. 이렇게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얌전히 루드비히를 토닥였다.
“알겠어요. 여기 있을게요.”
“정말인가?”
“네, 제가 어딜 가겠어요.”
어차피 우리 저 밖에 있는 몬스터 때문에 이 망토도 못 벗어나는 신세인데.
루드비히는 그 이후로도 확인하듯 내게 계속 물었다. 그게 꼭 분리 불안이 있는 사자나 호랑이를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이거 영상구로 찍어 두면 나중에 놀려먹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네.
아니지, 나중은 없겠구나. 이안으로서는 루드비히를 놀려먹을 수 없을 테니까.
그렇다고 이현으로 돌아가 놀려먹을 수 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기분이 점차 저조해졌다. 갑작스레 느껴지는 현실이 씁쓸했다.
내게 얹어진 루드비히의 무게가 갑자기 묵직해졌다. 잠이 든 모양이었다. 잠이 들었다고 해서 힘이 풀리는 건 아닌지 나를 쥔 손아귀 힘이 더 강해졌다. 그렇다고 손목이나 팔을 잡은 것도 아니고 겨우 셔츠 자락을 잡은 거라, 나는 이상하게도 그게 안쓰러웠다.
루드비히가 내 품에 얼굴을 묻고 무언가를 웅얼거렸다. 목마르다는 표시인가 싶어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귀를 기울였다.
“…….”
“네? 물이요? 물 드릴까요?”
“……이현.”
“…….”
피가 차게 식었다. 딱딱하게 굳어 있는 몸을 루드비히가 더 꽉 끌어안았다. 알아본 건가.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뒷골이 서늘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잔뜩 긴장해 루드비히가 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현.”
“…….”
“이현…….”
나는 이윽고 그가 내게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냥…… 잠꼬대인가 보네. 열이 이렇게 나니까 이런 헛소리도 하는구나.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답해 줄 사람도 없는데 뭘 그렇게 열심히 부르는지. 손끝으로 가만히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이현이 누구예요.”
“…….”
“왜 계속 부르는 거예요.”
“보고…….”
“네……?”
“보고 싶어서…….”
솔직한 답변에 말문이 막혔다. 이내 목 안에 따끔따끔한 것이 걸린 것처럼 목이 메어 왔다.
“왜 그렇게 보고 싶은데요.”
“…….”
“버리고 간 사람 아니에요?”
“…….”
“지금쯤 다 잊고 잘살고 있을걸요.”
“…….”
다시 잠든 건지 루드비히에게서는 답이 없었다. 나는 볼멘소리로 물었다.
“처음에 나는 왜 그렇게 미워했어요.”
“아니…….”
“아니긴, 맞잖아요.”
“…….”
“그런데 왜 시종으로 삼으려 했어요.”
“그냥…….”
“그냥도 아니잖아요.”
건방진 말투가 마음에 안 든 건지, 루드비히가 인상을 찌푸렸다. 음, 이제 그만 말해야겠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있는데 루드비히가 한참 만에 잠에 취해 몽롱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너무…… 닮아서…….”
“뭐가 닮아요.”
“성질……머리…….”
“…….”
얘 그냥 아픈 척하는 거고 사실은 맨정신 아니야?
새삼 말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안 내팽개치고 이렇게 돌봐 주고 있는 것만 해도 착한 거 아닌가. 근데 무슨 성질머리가 비슷해. 아니, 이현이었을 때도 성질은 안 부렸는데? 나 정도면 아주 순하고 착한 편인데? 비굴함의 끝을 보였는데?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그럼 지금도 내가 밉겠네요?”
“미워한 적…… 없다.”
“그럼요?”
“마음에…… 안 들었을 뿐…….”
“……그게 그거 아니에요?”
“아니…….”
“하, 그럼 지금은 어떤데요? 지금도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뭐야. 그럼 마음에 들어요?”
“아니…….”
“……주무세요. 그냥.”
아픈 애 데리고 뭐 하는 거냐. 잠이나 재우자. 타이밍 좋게 체자레가 실을 두 번 당겼다. 나도 호응하듯 실을 두 번 당겼다. 실이 서서히 다시 풀어지기 시작했다. 탈출로를 찾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너는.”
주어진 말에 대답만 했던 루드비히가 처음으로 내게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긴장한 채 루드비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시끄러워.”
뭐, 임마?
진짜 울컥하게 하네. 내가 시끄럽긴 뭐가 시끄러워. 불만을 터트리려는 찰나 루드비히가 손을 뻗었다. 뺨에 닿으려던 손길은 귓바퀴를 스치고 목에 닿았다. 루드비히가 내게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시끄럽게 해…….”
“…….”
“넌 정말…….”
번거로워.
그 말을 마지막으로 루드비히는 정신을 잃은 듯 잠이 들었다. 혹시나 죽은 건 아닌가 싶어 뺨을 톡톡 쳐 보자 오만상을 쓰기에 그만두었다.
참나, 번거로울 건 또 뭐야.
나를 안고 잠든 루드비히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는데 체자레가 다시금 실을 당겼다. 돌아오기 시작하는 모양인지 당기는 빈도가 크게 늘어났다. 10분 뒤 체자레가 실뭉치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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