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여기서는 쉬어도 되나요?”
저 꽃도 독이 있을 것처럼 생겼는데.
“괜찮아. 이 꽃에는 독이 없거든.”
체자레가 언덕 위에도 몇 송이 피어 있는 붉은 꽃을 꺾어 내게 내밀며 말했다. 나는 꽃을 받아들고 향기를 맡았다. 상사화와 참나리를 반쯤 섞어 놓은 듯한 꽃에서는 아찔할 만큼 달콤하고 매혹적인 향기가 났다.
“이 꽃은 나랑 좀 닮았어.”
“……어떤 점이요?”
체자레가 내가 들고 있는 꽃의 수술을 손톱 끝으로 톡톡 치며 말했다.
“화려하고 예쁜데 독은 없잖아.”
“…….”
해맑은 답변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체자레야…… 너는 독이 있단다……. 그것도 맹독이……. 너도 너를 꽤 높게 평가하는구나.
“영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네.”
“하하, 그럴 리가요……. 체자레 님은 독이 없으시군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도리질했다. 잠시간 우리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꽃을 보는 중이라 침묵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져 다행이었다. 나는 불쑥 체자레에게 충동적인 질문을 던졌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말해.”
“왜 저한테 잘해 주세요?”
체자레의 마음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한낱 시종을 30분이나 안고 다닐 리가 있나. 하지만 그건 과연 누구를 향한 마음인가. 체자레, 너는 누구를 보고 있는 걸까?
“귀엽잖아.”
“……그게 끝이에요?”
“음…… 보고 있으면 재밌기도 하고.”
“…….”
“사람이 귀엽고 재밌으면 사랑하게 되지 않나?”
네 사랑의 기준은 그런 거구나.
“그럼 귀엽고 재밌어서 사랑하게 되었는데 더 재밌고 귀여운 사람이 나오면 어떡해요?”
내 말에 체자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다 이내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나를 끌어안고 내 머리에 제 뺨을 비볐다. 내가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정말 욕심 많고 귀엽네.”
이런 점이 좋은 거지만. 체자레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며 나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나는 숨이 막혀 캑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려 몸을 바둥거렸다.
“하, 하지 마세요…….”
나는 간신히 짜내는 듯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난이라는 걸 알면서도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목덜미에 소름이 이는 것과 동시에 식은땀이 흘렀다. 사태를 파악한 체자레가 망설임 없이 나를 놔주었다.
“그래.”
몸이 자유롭게 풀리고 나서야 나는 참아 왔던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가볍게 숨을 헐떡였다. 체자레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부터 그랬어?”
“뭐, 가요?”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체자레가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얘기하기 싫구나. 그럼 안 해도 돼.”
집요하게 캐물을 줄 알았는데 체자레는 깔끔하게 나를 놓아주었다.
“이렇게 뒤에서 안고 있는 건 괜찮아?”
“그것도 사실 좀 불편한데요…….”
나는 냉큼 불편함을 호소했다. 아까처럼 식은땀이 날 정도로 싫은 건 아니었지만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었다.
“이 정도는 괜찮구나? 알았어.”
“…….”
귀신 같은 녀석, 어떻게 안 거지. 어떨 때는 체자레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머리에 고개를 묻고 있던 체자레가 말을 꺼냈다.
“아까 물었지. 귀엽고 재밌어서 사랑하는데 더 귀엽고 재밌는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네.”
“둘 다 사랑하면 되지 않아?”
“…….”
내가 오만상을 찌푸리자 체자레가 예상했다는 듯 작게 웃었다. 잠시 감회에 잠기는 듯했던 체자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 아버지가 정말 유명하셨거든.”
“아버지요?”
그런 설정이 있었나……. 내가 흐릿한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체자레가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열 살이 될 때까지 집에 여자가 아이를 안고 찾아왔으니까.”
“…….”
아, 그런 쪽으로.
“아버지가 화려한 인상의 미인이었거든. 사람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게 사람을 좋아한다는 말로 수습할 수 있는 정도인가. 기가 막혀 미간이 절로 좁아졌다. 체자레가 손가락으로 딱 소리를 냈다.
“아, 다행히 나중에 밝혀지기로 찾아든 여자들의 아이 중 아버지의 아이는 없었어.”
“정말 다행이네요.”
“내가 열 살 때 그 장면을 보는 바람에 어머니가 불같이 화를 냈거든. 그 이후로 아버지가 다른 사람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어. 죽을 때까지.”
체자레는 부모 얘기를 꺼낸 적이 거의 없어서 나는 그의 과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어린 내 눈에도 보였거든. 아버지가 어머니를 너무 사랑했던 게. 어머니의 관심을 끌려고 기상천외한 행동들도 많이 했지. 사람을 만나고 다녔던 것도 그 일종이었어. 그 외에도 정원 나무 위에서 외발자전거를 탄다든가……. 뭐, 어린애가 보기에 재미는 있었지.”
그때가 생각나는지 체자레가 낮게 웃음 지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 만족스러워 보였어. 항상 어머니보다 일찍 죽는 게 소원이라고 했거든. 그 소원이 이루어졌으니 왜 기쁘지 않겠어?”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리고 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어.”
“체자레 님이요?”
“응. 내 사랑은 한번 깊어지면 잘 변하지 않아.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 거짓말쟁이. 내가 이현이 아니었다면 저 근사한 외모와 언변에 홀랑 넘어갔겠지.
“네? 저 걱정 안 했는데요?”
“왜 안 해? 좀 서운하네.”
내가 기가 막힌다는 듯 체자레를 돌아보자 그가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어쩐지 얄미운 마음에 그의 귀에 들고 있던 꽃을 꽂아 주었다. 붉고 화려한 꽃은 체자레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잘 어울리지?”
거울도 보지 않았으면서 체자레가 여유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입을 삐죽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뭐…… 네.”
무릎에 고개를 파묻은 채 꽃을 보던 나는 불현듯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 내 쪽으로 달려오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였다.
“저게 뭐지?”
“뭐가?”
“저기요. 저기 뭔가가 오고 있는데…….”
눈매를 좁히며 초점을 맞추던 나는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이안?”
꽃밭을 절박하게 뛰어오는 인영을 본 나는 얼이 빠졌다. 숲속에 잘 있어야 할 이안이 여긴 왜 있는 거지? 하지만 나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한 저 모습, 저건 분명히 이안이었다. 이안은 꽃밭을 뛰어오며 절박한 모습으로 나를 향해 손을 뻗다가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어……?”
나는 믿기지 않는 상황에 눈을 비비고 다시 그쪽을 쳐다보았지만, 꽃밭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멀쩡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언덕을 구르듯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심해!”
뒤에서 체자레가 내게 소리쳤다. 꽃이 짓밟히며 아찔한 향을 냈다.
“으앗!”
발을 헛디딘 나는 굴러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이안이 있었던 쪽으로 향했다. 분명 여기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몸을 일으키기 무섭게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러나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짚었다.
“……!”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나를 뒤따라온 체자레가 서 있었다.
“왜 그래?”
체자레는 정말 영문을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머릿속에 어떤 가설이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쯤에서 저 향해서 달려오는 사람 못 보셨어요? 키는 이만하고…….”
“없었어. 아까부터 우리 둘뿐이었어.”
체자레가 고개를 저었다. 목덜미가 싸해져 왔다.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럼 뭐야, 귀신이라도 된다는 거야? 나는 당황해 발밑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안이 이쪽으로 뛰어온 게 맞는다면 꽃이 밟힌 흔적이 있을 테니까. 그러나 나와 체자레의 흔적만 있을 뿐, 이안의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체자레가 꽃을 꺾어 주의 깊게 향을 맡았다.
“독이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쩌면 환각 효과가 있을 수도 있겠네.”
“환각 효과요?”
“그래. 네가 나에 비해 독에 약해서 그런 거일 수도 있고.”
“…….”
그럴 수도 있겠네. 하지만 환각이라기엔 뭔가…… 애타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이안이 내게 알리고 싶어 했던 건 뭐였을까.
“여기 가파르다. 잡고 올라와.”
“……감사합니다.”
나는 체자레가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언덕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 * *
“이제 거의 다 왔어.”
나는 어두운 동굴 속을 살피며 조심조심 발을 디뎠다. 갑자기 공간이 넓어지며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눈에 익은 어둠 속, 인영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루드비히, 언제 일어났어요?”
체자레가 반갑게 루드비히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조금 전에.”
목소리가 잠겨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아져 있었다. 나는 쭈뼛거리며 루드비히가 있는 곳 근처에 약간의 거리를 두고 앉았다.
“몸은 좀 어떤가요?”
“아까보다 좀 나은 정도.”
“흐음……. 진통 효과가 있는 약초를 좀 가져왔는데, 먹을래요, 바를래요?”
“효과가 좋은 쪽으로.”
“그럼 먹는 게 낫겠네요. 맛은 좀 없겠지만.”
돌아오기 전 캐낸 약초를 꺼낸 체자레가 납작한 돌 위에 올려놓고 솜씨 좋게 찧었다. 짓이기고 뭉쳐 약초를 환 형태로 만든 체자레가 그것을 루드비히에게 건네주었다.
“여기요. 한 번에 삼키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 고맙다.”
루드비히가 약을 입 안에 넣고 약간의 물과 함께 삼켰다. 어둠 속에서도 그가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역겹군.”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잖아요.”
체자레의 말에 루드비히가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았다. 저거 예전에 내가 알려 준 말인 것 같은데. 이현이었을 때. 나는 어쩐지 루드비히의 시선을 감당하기 어려워 딴청을 피웠다. 그래도 생각보단 멀쩡한 것 같아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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