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내 미약한 부름에 손길이 잠시 멎었다. 루드비히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한결 더 조심스러워진 손길로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새벽녘 숲속에 들어온 것처럼 화한 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이내 땀에 젖은 이마에 서늘하면서도 부드러운 입술이 잠시간 닿았다가 떨어졌다. 나도 사랑한다.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꿈결처럼 말했다.
나는 고백한 거 아닌데,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언제까지고 기분이 좋아서, 나는 그의 굳은살 박인 손에 뺨을 비볐다. 의식이 다시금 서서히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갔다. 행복한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잠결에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아.”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눈을 감은 것과 비슷한 정도의 암흑에서 서서히 사위가 눈에 익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허공을 향해 뻗은 내 손의 실루엣이었고, 그다음으로 든 건 의문이었다.
눈이 보이네?
그것도 꽤나 멀쩡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기절하기 직전의 기억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반란, 배신, 가고일, 공격, 얼굴로 흩뿌려진 초록색 액체, 고통, 패닉, 땅울림. 그리고 암전.
나는 다시 손을 얼굴로 가져와 손끝으로 낯을 더듬었다. 분명 치익 소리와 함께 살이 녹았었는데 매끈매끈 멀쩡했다. 마치 지금까지의 일이 꿈이었던 것처럼.
“일어났네.”
어둠 속에서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익숙한 형체가 어깨를 눌러 나를 다시 눕혔다. 풀을 엮어 만든 깔개에서 싱그러운 냄새가 물씬 났다.
“더 누워 있어. 괜찮으니까.”
다정하면서도 살짝 지친 듯한 목소리. 체자레가 어둠을 등진 채 나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많이 피곤했나 봐. 이틀을 꼬박 잤어.”
“아,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지. 피로는 좀 풀렸어?”
체자레가 내게 수통의 뚜껑을 따 건네주며 물었다. 나는 작게 네, 대답하며 수통을 입술에 붙이고 기울였다. 미지근하면서도 단맛이 나는 물이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가요?”
나는 입가에 묻은 물을 손등으로 훔치며 물었다. 궁금한 게 많았다. 주변이 지저분한 걸 보니 천국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지옥도 아닌 것 같고. 애초에 AI가 사후 세계까지 함께 갈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저 분명히 약을, 맞았는데…….”
“그래, 맹독이었지.”
“왜 멀쩡한 건가요, 전……?”
“글쎄…….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나는 체자레가 좀처럼 답을 알려 주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압실론이 와서 치료해 준 건가 싶었는데, 그게 아닌 듯했다. 불쑥 불안감이 차올랐다.
“폐하는, 어디 계시나요?”
나도 모르게 높고 새된 목소리로 묻자 체자레가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대었다. 나는 체자레의 눈치를 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입을 꾹 다문 나를 보며 체자레가 미소 지었다.
“쉿, 지금 옆에서 자고 있어.”
체자레의 말에 시선을 밑으로 내려보니 정말로 루드비히가 내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하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죽은 듯이 자는 평소와는 달리 그의 숨소리가 생각보다 거칠었다. 설마 루드비히가 치료해 준 건가? 하긴, 얘도 마법 쓸 줄 알았지. 하지만, 그 독이…… 루드비히의 마법으로 수습될 정도로 약했던가? 아니, 오히려…….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쩐지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루드비히 쪽으로 손을 뻗고 있는데, 체자레가 중간에서 내 손을 가로막았다. 손목을 잡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마주하고 자연스럽게 깍지를 끼는 모습에 나는 황당하다는 듯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아, 손잡자는 거 아니었어?”
“아닌데요…….”
“난 그런 줄 알았지.”
“손 놔주시면 안 돼요?”
“싫은데. 계속 잡고 있을래.”
“……왜요?”
“잡고 있으니까 좋아서.”
기가 찬 나는 그와 대거리를 하는 대신 잡히지 않은 반대편 손을 루드비히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그리고, 또 막혔다.
엉겁결에 나는 체자레와 양손으로 깍지를 끼게 되었다.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 체자레가 내 손을 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으앗……!”
덩달아 함께 일어나게 된 나는 눈을 깜빡이며 어둠 속에서 체자레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체자레가 깍지를 풀지 않은 채 나를 제 몸 쪽으로 당겼다. 체자레의 품속에 얼굴을 묻자 코를 찌를 듯이 매운 꽃향기가 올라왔다. 들판을 쏘다니며 온갖 독초를 채집한 뒤 짓찧은 풀을 맥이 뛰는 곳에 문지르면 이런 향이 날까.
“콜록…….”
익숙하지 않은 향기에 콜록거리고 있는데, 체자레가 제 옷을 여몄다.
“미안, 이것저것 실험을 좀 해야 했거든. 너한텐 좀 독했을 수도 있겠다.”
“실험……이요?”
“응, 이젠 괜찮지?”
“괜찮긴 한데…….”
이 손을 좀 놔주면 더 괜찮을 텐데. 하지만 체자레는 그럴 의향이 요만큼도 없어 보였다. 그사이 내 마음은 점차 불안해져 갔다. 루드비히가 있는 쪽을 내려다보려는 찰나, 체자레가 내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나를 들어 올렸다.
“뭐, 하는…….”
“너무 동굴 안에만 있어도 안 좋아. 바람 좀 쐬러 나가자.”
나를 아이처럼 안아 든 체자레가 내려 달라 버둥거리는 나를 철저히 무시하며 동굴을 걸어 나갔다.
동굴은 생각보다 길었다. 개미굴을 몇 배로 확대해 놓은 듯 복잡한 길을 체자레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돌아오는 길은 알고 있는 건지. 나는 혹시 체자레가 루드비히와 나를 떨어트려 놓을 생각인가 싶어 동굴의 종유석이나 특이한 버섯 모양 돌들의 위치를 기억하려 애썼다.
이윽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싶더니 동굴 속 어둠이 끝나고 하늘을 반쯤 메운 붉은 달이 시야에 가득 찼다. 보름달은 내가 본 어떤 달보다도 컸다. 요요한 붉은 빛을 뿌려 대는 모습이 꼭 교태를 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예쁘지?”
“네……. 예쁘네요. 그런데 이제 내려 주셔도 되는데요.”
“아직 아파서 안 돼. 일어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안 되기는 개뿔. 밥을 먹지 못해 힘이 좀 없긴 했어도 나는 멀쩡했다. 하지만, 누군가의 희생으로 이 멀쩡함의 값을 치른 것 같다는 느낌이 사라지질 않았다. 나는 체자레의 어깨를 잡고 불안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솔직히 말해 주세요. 어떻게 된 건가요?”
내 말에 체자레가 곤란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가고 싶어요. 내려 주세요.”
“안 된다니까. 포기해.”
계속되는 거절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확 기절시켜 버려? 아니지, 얘가 없으면 동굴로 돌아가지도 못할 텐데. 나는 여전히 옅은 미소를 띠고 있는 체자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안이 아니라 이현이었어도 내게 그럴까.
마티어스가 비아나 앞에 나를 두고 가 버렸을 때부터 들었던 생각이었다. 내가 이안이 아니라 이현이었다면, 마티어스는 같이 죽을지언정 절대 나를 두고 가지는 않았겠지. 모습을 바꾼 나는 또 다른 진짜가 아니라 그저 대체재였을 뿐이라는 걸 절절히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마티어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압실론은?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데 체자레가 가볍게 내 손가락을 쥐고 입 맞췄다. 어리둥절해져서 바라보자 체자레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하도 맛있게 씹길래. 궁금해서.”
“…….”
너의 플러팅은 정말로 상황을 가리지 않는구나……. 나는 심란함을 가득 안은 채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체자레는 절대 나를 놔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 이상 에너지를 쏟지 말자는 생각에 침울하게 한숨을 쉬며 체자레의 품에 축 늘어졌다. 체자레가 살짝 몸을 굳히더니 피식 웃으며 나를 도닥였다.
“잘 생각했어.”
나는 체자레의 너른 어깨에 시무룩하게 턱을 괴었다. 체자레가 걸음을 디딜 때마다 지지대를 잃은 내 종아리가 허공에서 달랑거렸다. 코가 둔해지고 있는지 그가 옷을 여며도 났던 독초 향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대신 다른 향기가 코를 스쳤다.
나는 그제야 그곳의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그곳은 유일하게 던전 같지 않은 장소였다. 우리 둘이 팔을 둘러도 모자랄 것 같은 굵기의 나무가 군데군데 자라 있었고, 발밑에서는 부드러운 풀과 꽃이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바람을 타고 온 꽃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낭만적인 장소였다.
“향이 좋지? 그래도 너무 깊이는 안 들이마시는 게 좋아. 미미해서 별 이상은 없겠지만, 그래도 독이 있는 꽃이라.”
“…….”
던전 같지 않다는 말은 취소. 여기도 어쩔 수 없는 던전이었다.
“저 안 무거우세요?”
“무거울 리가. 깃털 같은걸. 잘 먹인 것 같은데 살이 안 찐단 말이지…….”
체자레가 살짝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체자레는 30분이 넘도록 나를 계속 안고 있었다. 동굴 주변에는 오르막길도 있고 내리막길도 있어 한 바퀴를 다 돌고 나면 지칠 만도 한데 체자레는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굴었다.
“다 왔다.”
체자레의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탄성을 내뱉었다.
“우와…….”
언덕 밑의 너른 공간을 붉고 화려한 꽃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모습에 나는 넋을 잃고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서 잠깐 쉴까.”
체자레가 꽃이 잘 보이는 자리에 나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채 내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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