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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08화 (108/149)

#109

카강! 나는 다급하게 가고일의 발톱을 검으로 막아 내었다. 다행히 조금 전 우리를 공격하는 모든 가고일들이 불을 내뿜어서 다음 화염 공격까지는 쿨 타임이 좀 남아 있었다.

루드비히가 그들이 떠 있는 쪽을 향해 검을 횡으로 그으며 검기를 날렸다. 불시에 검기를 맞은 가고일의 날개 한쪽에 실금이 생기더니 이내 피를 내뿜으며 떨어져 나갔다.

끼에엑! 공격당한 가고일이 한쪽 날개를 퍼덕여 보았지만, 이미 균형을 잃었기에 천천히 추락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가고일 두 마리가 당황해 추락하는 가고일을 따라 내려갔다. 추락하는 가고일의 동료나 가족인 듯했다.

따라붙는 가고일이 적어지자 공격을 막아 내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조금 전에 비해 낫다는 거지, 절대적으로 쉬워진 건 아니라 나는 나를 향해 발톱을 세우고 달려드는 가고일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애를 먹었다. 카가가각! 간신히 방어하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검의 내구도가 뚝뚝 떨어졌다.

<검의 내구도가 떨어졌습니다. 275/300>

<검의 내구도가 떨어졌습니다. 254/300>

<검의 최종 내구도가 떨어졌습니다. 247/298>

“젠장.”

나는 공격을 힘겹게 물리치며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가고일은 치사하게도 체중을 실어 공격했다. 공격을 막아 낼 때마다 힘을 주고 있는 무릎이나 팔꿈치가 아릿해지고 발이 움푹움푹 파였다.

체자레나 루드비히 역시 나를 도와주지 못할 정도로 고전하고 있었다. 다행히 독이 먹히고 있는지 체자레가 상대하고 있는 가고일들의 공격 속도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안도하던 나는 헤일러가 루드비히를 향해 슬그머니 다가가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다.

“안 돼!”

날카로운 외침에 루드비히가 사방을 경계하다 헤일러와 눈을 마주쳤다. 헤일러가 치잇, 혀를 차며 루드비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루드비히가 거의 기적과도 같은 반응 속도로 헤일러의 검을 막아 냈다. 루드비히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헤일러, 네가 왜…….”

주군의 의아한 물음에 헤일러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여전히 맑은 빛을 간직하고 있는 눈동자에 물기가 고였다. 그와 동시에 가고일 두 마리가 때를 놓치지 않고 루드비히에게 달려들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만두십시오! 이건 반역입니다!”

조금 전 루드비히가 구해 준 기사들이 루드비히의 곁에 서서 헤일러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러나 헤일러는 그들이 안 보이는 사람처럼 오로지 루드비히만 공격해 댔다. 그 절박한 태도에 기사들이 곤란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헤일러는 그들의 상관이었다. 상관의 반란이 그들도 퍽 당혹스러운 듯했다.

루드비히가 바닥을 딛고 뛰어올라 가고일의 목부터 다리가 시작되는 부분까지 깊숙이 베어 냈다. 단단한 가고일의 몸체가 두부 잘리듯 부드럽게 잘려 나갔다. 공중에서 가고일을 밀어내며 헤일러에게 바싹 붙은 루드비히가 그의 어깨를 잡고 비틀었다. 우둑, 어깨가 탈골되는 소리와 함께 헤일러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흐윽……!”

“상대해.”

루드비히가 기사들에게 하나 남은 가고일을 가리키며 말했다. 헤일러와 마지막 대화를 나눌 생각인 듯했다. 그와 동시에 체자레가 가고일 두 마리를 기어코 쓰러트렸다. 땀에 젖은 머리칼을 흔들며 체자레가 옅게 웃었다.

“고생했어. 생각보다 실력이 좋네.”

“칭찬 감사합니다.”

“뒤로 가 있어. 독 묻어 있어서 스치기라도 하면 좀 곤란해지거든.”

나는 체자레의 경고에 냉큼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괜히 객기 부리다 그의 검에 스쳐 저세상에 가고 싶진 않았다. 체자레가 단검을 들고 집요하게 나를 공격하는 가고일의 발톱을 수직으로 내리찍었다. 흑요석 같은 발톱이 깨지며 사방으로 튀겼다.

끼아아아아아! 가고일이 비명을 지르며 발가락 관절을 굽혔다. 체자레는 이후로 가고일의 공격을 흘리며 가장 약한 관절 부분에 생채기를 내는 데 열중했다. 나는 체자레의 비열함에 새삼 감탄하며 루드비히가 있는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헤일러가 무릎을 꿇은 채 루드비히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어느새 피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 그러셨습니까.”

“내가 물어야 할 말이 아닌가 싶은데.”

“믿고자 했습니다. 달라지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헤일러가 침통한 태도로 외쳤다. 오랜 부하의 배신에 루드비히가 금이 그어진 것처럼 쩍 갈라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대나 그대의 가족을 해치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그 배려가 감사했던 적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 너무 많이 죽었습니다. 제 부하, 친지, 지인의 가족들. 모두가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죽어 가고, 죽기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게 정말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폐하……?”

루드비히는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가 당혹스러워하는 것으로 보아 헤일러는 원래 이 전쟁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확률이 컸다. 리로가 알려준 걸까, 스스로 깨달은 걸까. 모를 일이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질 줄 아는 인간이 내가 전 황제를 죽였을 때 동참했나?”

“그때의 폐하는 달랐습니다! 뜻이 있으셨고, 더 좋은 나라를 만들 거라는 신념이 있었습니다. 따를 만하다고 생각해 따랐고, 목숨도 바칠 수 있었습니다.”

헤일러가 분하다는 듯 눈을 부릅뜨며 루드비히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거군.”

“……예, 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나라를 위해 충성한 이들이 죽지도 못하는 존재가 되어 싸우기 위해 살아가는데, 도대체 어떤 뜻이 있는 겁니까. 제가 무지해서 모르는 겁니까?”

“…….”

루드비히는 말없이 헤일러를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할 말이 없겠지. 나 하나 로그아웃 못 하게 하려고 제국민을 다 인질로 잡은 셈이니까. 충성하던 부하들이 돌아서는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했다.

“폐하, 저희가…… 인간으로 보이기는 하십니까?”

“……보이지 않을 리가.”

“저는, 저희라고 물었습니다. 제가 아니라요. 폐하, 다시 여쭙겠습니다. 제국민들이, 폐하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고 전쟁터로 나간 이들이, 인간으로 보이긴 하십니까?”

“…….”

“보일 리가 없으시겠지요. 그들이 인간으로 보인다면, 그러실 수는 없습니다. 당신의 백성에게 그렇게까지 잔인하실 수는 없습니다…….”

루드비히가 대답이 없자 헤일러가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가 불시에 고개를 들었다. 헤일러의 투명한 회색 눈동자 위에 루드비히가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이 그대로 비쳐 보였다.

“당신들을 증오합니다…….”

헤일러는 씹듯이 말을 내뱉는 것과 동시에 소매에 숨겨 두었던 물건을 꺼내 루드비히를 향해 뿌렸다.

“폐하-!”

나는 루드비히를 부르며 그의 망토를 뒤로 끌어당겼다. 루드비히가 뒤로 넘어가며 내 몸이 액체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나는 팔꿈치를 위로 올려 막아 보려 했지만, 짙은 초록색을 띤 액체의 일부가 뺨과 눈에 튀고 말았다. 파삭, 약을 담았던 유리병이 깨지는 소리와 동시에 액체가 닿은 곳에서부터 아득한 고통이 시작되었다.

“아아아악!”

불에 타는 듯한 고통에 나는 주저앉아 비명을 질렀다. 루드비히가 다급히 일어나 나를 끌어안고 상태를 확인했다. 나는 미친 듯이 눈 주위를 긁어 댔다. 눈알을 꺼내어 물에 박박 씻고 싶은 심정이었다. 살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녹아 가고 있었다. 피부를 긁어낸 손톱이 금세 화끈화끈해져 왔다. 시야가 차단되자 공포가 배가되었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소리가 깊숙한 물 안에서 들리는 것처럼 웅웅거렸다.

“정신……! 이……!”

“아,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내가 긁지 못하도록 누군가가 손목을 강하게 틀어쥐었다. 손목이 결박되자 자연스레 패닉이 찾아왔다.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기 전 고통이 나를 덮쳤다. 하지 마. 그만둬.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해 줘.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시스템 창이 위협적으로 경고음을 울려 댔다. 그 소리조차 물에 먹힌 듯 먹먹하게 들렸다. 그때 발밑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앞은 볼 수 없었지만 아주 거대한 것이 몰려오고 있었다. 산사태인가. 땅이 무너지는 걸까. 깊게 생각하기도 전 고통이 나를 짓눌렀다. 나는 땅의 진동에 몸을 휘청였다.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다. 누군가가 나를 끌어안고 보호하는 듯한 감각과 함께 정신이 그대로 끊겼다.

* * *

따스한 바람이 부는 계절이었다. 나는 폐허가 된 황제궁의 방 침실에 대자로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반란이 성공한 뒤 우리 넷은 반쯤 폐허가 된 황궁을 내 집처럼 썼다. 황제의 폭정을 막아 낸 우리를 모두가 웃으며 환영했다. 아무 갈등도 없는 에필로그처럼, 그야말로 꿈같은 시절이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를 타고 봄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누군가가 방 안에 들어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드러운 시선에 잠결에도 몸이 간질간질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불시에 간지럼을 타는 아이처럼 히힛, 작게 웃었다. 나를 보던 이가 따라 낮게 웃었다.

“좋은 꿈을 꾸나 보군.”

눈꺼풀 위로 햇살이 비쳤다. 시야가 오렌지색으로 꽉 들어찼다. 눈이 좀 부시네, 생각하고 있는데 큰 손이 내 얼굴을 덮었다. 서늘한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가 내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고는, 다른 손으로는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햇빛 아래서 쓰다듬음받는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잠에 취한 나는 무심코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미소 지었다.

“루드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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