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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루드비히와 체자레는 등을 붙이고 싸우고 있었다. 상황이 아주 나쁘진 않았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구른 이들이라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빠르게 적응했고, 무엇보다 길이 좁아 일대일 전투가 된 게 크게 도움이 된 듯했다. 둘이 붙어 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마티어스와 압실론은 어떠려나. 나는 불안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야, 데인. 찔러-!”
루드비히가 병사의 심장에 박아 넣은 검을 빼려 하던 찰나, 병사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검을 붙잡은 뒤 내 앞에 있는 병사에게 외쳤다. 내 앞의 병사가 틈을 놓치지 않고 루드비히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발을 박차고 루드비히를 향해 달려드는 남자의 어깨와 등 위에 올라탔다.
“윽……!”
불시에 무게가 실리자 남자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루드비히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병사의 심장을 찔렀던 검을 빼내어 내가 올라탄 병사의 옆구리를 깊숙이 베어 냈다. 신음을 터트린 병사의 자세가 흐트러지나 싶더니, 이내 중심을 잃고 낭떠러지 쪽으로 비틀거렸다. 동시에 내 몸의 중심축도 함께 뒤틀렸다. 나를 응시하는 루드비히의 자색 눈동자에 파동이 일었다. 나는 문득 그가 나를 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뛰어내려!”
루드비히가 쥐고 있던 검을 내던지는 것과 동시에 나를 향해 양손을 내밀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루드비히의 품 안으로 뛰어내렸다. 비릿한 피 냄새와 루드비히 특유의 체향이 코를 찔렀다. 동시에 루드비히에게 빈틈이 생겼다. 병사 하나가 루드비히를 향해 달려들었다. 루드비히가 나를 안은 채 남자의 옆으로 돌아서서 다리로 그의 가슴을 찼다.
“……어억!”
가슴을 정통으로 차인 병사는 숨을 쉬지 못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루드비히가 비틀거리는 병사의 배를 다시금 차 확실하게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트렸다. 끝없는 무저갱으로 떨어지는 병사의 모습에 소름이 일었다.
루드비히가 나를 체자레와 저 사이에 내려놓았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루드비히가 내 머리칼을 쓸어 올려 이마를 드러나게 했다.
“다친 덴 없는 것 같군. 여기 있도록.”
루드비히의 말소리에 체자레가 병사의 손목을 베어 내며 뒤를 돌아보았다.
“늦었네? 어디 갔다 왔어?”
체자레가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긴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매끈한 낯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보고했다.
“단순한 소동이 아닙니다. 반란이에요. 주동자가 여기 있어요. 많은 병사가 동참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 같군.”
루드비히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해치우는 족족 낭떠러지에 떨어트리는 루드비히와는 달리 체자레 쪽에는 시체가 언덕을 이루고 있었다. 그는 검에 독을 발라 놓기 때문에 부상자도 쓰러지곤 해서 그런 듯했다. 체자레가 루드비히 쪽으로 돌아서서 접근하는 병사들을 공격하는 동안, 나는 내가 왔던 길 쪽을 돌아보았다. 굽이진 산길이라 이 위치에서는 한눈에 뒤의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상황은 거의 다 정리되어 있었다. 마법을 쓰지 못하니 압실론 혼자였다면 여럿을 상대하기 버거울 수도 있었을 텐데, 다행히 마티어스가 옆에 붙어 있어서인지 사람들은 쉽사리 둘에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드비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는 달려드는 적을 해치우면서도 이따금 하늘과 산맥 뒤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곧 그가 걱정하는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끼아아아아아아!
<가고일 떼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던전의 위험도가 5초 후 재조정됩니다.>
희끄무레하게 밝아오는 하늘 위로 가고일 떼가 새카맣게 날아오르고 있었다. 소란에 성난 가고일이 한꺼번에 들고일어난 것이다.
“아, 곤란하게 됐네요.”
항상 싱글벙글 웃는 낯인 체자레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루드비히가 무심코 나를 뒤로 숨기며 검을 쥔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상했던 일이다.”
싸우던 이들도 잠시간 싸움을 멈춘 채 가고일이 그들에게 다가오는 걸 보고 있었다.
“으아아악! 피해!”
“가고일이다!”
“도대체 어떻게 피하라는 거야!”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명이라도 더 죽여!”
시시각각 가고일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반응이 나뉘었다. 패닉에 빠져 도망치려다 절벽으로 떨어지는 사람, 끝을 예감한 듯 주변에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는 사람, 오줌을 지리며 주저앉은 사람…….
루드비히는 이를 악문 채 차가운 시선으로 가고일 떼를 노려보고 있었고, 체자레는 이 와중에도 우리를 노리는 이들을 노련한 솜씨로 해치우고 있었다. 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검을 다잡았다. 검을 쥔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아아악! 아파, 아파, 아파……!”
“살려 줘-!”
성난 가고일들이 병사들을 발톱으로 움켜쥔 채 이리저리 흔들다 절벽으로 내던졌다. 몇몇 사람들이 벽에 바싹 기댄 채 살아 보려고 애썼지만, 패닉에 빠져 도망치려는 사람들로 인해 그것조차 불가능했다.
<사람들의 ‘두려움’이 전염되어 ‘집단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사람들의 ‘사기’가 20% 꺾입니다.>
<사람들이 ‘도망치기’를 택할 확률이 30% 상승합니다.>
‘집단 패닉’에 걸린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감쌌다.
“……!”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체자레가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뭐…… 하세요?”
“무서워하는 것 같길래. 안아 주면 진정이 될까 싶었지.”
“…….”
이런 상황에서도 너는 멈추질 않는구나, 체자레야…….
“저 괜찮아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그때, 가고일 한 마리가 발톱을 세운 채 우리가 있는 쪽으로 빠르게 하강했다. 루드비히가 가고일이 있는 쪽으로 검을 교차해 그었다. 순식간에 발이 떨어져 나간 가고일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끼에에에-!
비명을 길게 지를 틈을 주지 않고 루드비히가 균형을 잃은 가고일의 목을 단숨에 날렸다. 머리가 떨어져 나간 가고일의 몸체가 이리저리 부딪히며 절벽 밑으로 추락했다.
동료가 공격받은 것을 알게 된 가고일 몇 마리가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너 마리가 넘어가는 숫자에 루드비히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곳을 빠져나간다.”
“좋은 생각이에요.”
체자레가 동의하듯 덧붙였다. 우리는 체자레가 쌓아 둔 시체 쪽을 향해 동시에 달리기 시작했다. 셋만 달린 건 아니었고, 같은 일행이었던 기사들과 병사들 몇몇도 함께였다. 그게 살아남는 길이라는 걸 아는지 그들도 필사적이었다. 체자레가 긴 다리를 이용해 뒤쪽에 쌓아 둔 시체의 산으로 훌쩍 올라갔다. 그러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잡고 올라와.”
“혼자 올라가겠습니다.”
나는 손을 잡고 올라가는 대신 도움닫기를 해 그 언덕을 밟고 올라가 단숨에 뛰어내렸다. 숨이 붙어 있는 이가 있었는지 밑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 신음이 잠시간 속을 찔렀지만, 이내 나는 고개를 저어 감정을 털어냈다. 나를 공격하는 이들까지 동정하기엔 여유가 없었다.
그의 호의를 무시했는데도 체자레는 여전히 내가 마음에 든다는 듯 은근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얘 옆에 서면 자꾸만 위기감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체자레가 지금 꽤 즐거워하고 있다는 데에 손목이라도 걸 수 있었다. 이 미친 도파민 중독자 같으니. 쟤는 죽을 때도 웃고 있을 것 같다.
“저 나무 앞까지 달려.”
루드비히가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큰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달리기 시작했다. 앞에서는 체자레가, 뒤에서는 병사들이 중간의 루드비히와 나를 엄호했다. 사실 길이 좁고 장애물이 많아 달린다기보다는 빨리 걷기에 가깝긴 했다. 가고일들이 우리 쪽으로 따라붙어 공격해 왔다.
“젠장.”
루드비히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왜 그러나 싶어 옆을 돌아보니 가고일의 목 부근이 파랗게 변해 있었다.
“엎드려!”
루드비히가 내 뒤통수를 잡고 바닥에 엎어트리며 큰 소리로 외쳤다.
“읏…….”
바닥에 정통으로 코를 박은 나는 얕게 신음했다. 신음이 새어 나갈 틈도 없이 체자레가 내 몸 위를 덮치듯 누르며 나를 망토로 꽁꽁 감쌌다. 화염 저항이 들어가 있는 망토인 듯했다. 망토가 채 감싸 주지 못한 군화 끝에 후끈한 기운이 몰렸다. 내가 몸을 움찔거리자 체자레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가만히.”
불길이 한 차례 우리를 쓸고 지나갔다. 망토를 뒤집어썼는데도 정면으로 태양을 마주한 것처럼 뜨거웠다. 화염을 정통으로 맞은 이들은 비명 하나 지르지 못하고 숯덩어리가 되어 있었다. 고개를 들고 루드비히 쪽을 바라보니 그가 기사들 몇몇을 긴 망토로 가려 주고 있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목숨을 건진 기사들이 루드비히에게 감사를 전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빠른 속도로 기사들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이름: 베일리스
나이: 28
직업: 그리체 제국 기사
호감도: ???
체력: 32%
마력: 94%
.
.
.
상태: 가고일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마음 엿보기: ???]
[이름: 헤일러
나이: 36
직업: 그리체 제국 기사
호감도: ???
체력: 55%
마력: 88%
.
.
.
상태: 반란을 준비 중입니다.
마음 엿보기: ???]
마지막 상태 창을 보자마자 심장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헤일러라는 기사는 나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략 스토리 중간부터 루드비히를 도와 반란을 함께해 왔으니까. 황제가 되기 전부터 루드비히를 극진히 모시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왜 반란을 준비 중이라고 뜨는 거지.
“폐……!”
그러나 내가 경고해 줄 새도 없이 가고일들이 다음 공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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