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진짜 올 생각이 없었다. 정말이다. 그냥, 그냥 내가 입맛이 없어 남긴 배식에 온전한 빵이 남아 있었고, 그게 또 맛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고, 가는 길에 어쩌다 보니 마티어스의 천막이 있어서…… 오게 된 것뿐이다.
나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굳게 닫힌 마티어스의 천막 주변을 서성였다. 애꿎은 잔디만 5분째 밟던 나는 발밑에서 풍겨 오는 꽃향기에 멈칫했다. 발을 들어 보니 하얀 꽃 한 송이가 반쯤 으깨어져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짓이겨진 꽃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심란해졌다. 평소 같으면 나 버리고 간 놈은 사과할 때까지 보지도 않았을 텐데, 그 이유를 알고 있다 보니 마음을 안 쓰기가 어려웠다.
“왜 하필 그걸 아직도 보관하고 있냐고…….”
그렇게 소중한 거면 집에 두고 오든가……. 아니지, 소중한 거니까 집에 두지 못한 거겠지. 어쩌면 이번 토벌에서 죽음을 각오했던 걸까. 그래서 품속에 계속 간직하고 있었던 걸까. 생각해 보면 쟤가 나한테 준 거잖아. 따져 보자면 나한테 준 선물인데 왜 지가 보물로 가지고 있는 거야. 고작 말린 꽃 쪼가리가 뭐가 그렇게 소중해서는…….
“하아…….”
그래, 마티어스의 그런 점이 내가 좋아하는 부분이었지.
나는 심란함에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더럽게 신경 쓰이네. 팔 사이로 조금 전 내가 밟은 꽃이 보였다. 나는 그 꽃을 꺾어 들었다. 축 늘어지긴 했지만 던전에 핀 꽃치고는 모양새가 제법 괜찮았다.
“다른 꽃도 있나.”
나는 꽃줄기를 든 채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근처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제법 피어 있었다. 예전의 내가 말려 놓은 한 송이를 잃고 낙심했다면, 지금의 내가 주는 열 송이로 그 낙심을 수습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예뻐 보이는 꽃들을 하나하나 신중하게 골라 꺾기 시작했다.
“아씨, 따가워.”
아무래도 던전에서 살아남은 꽃들이라 그런지 모양은 예뻐도 줄기가 억세고 가시가 돋은 것도 제법 있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도 제법 그럴듯한 꽃다발을 만들어 냈다.
차마 천막 앞쪽으로 당당히 들어갈 자신이 없었던 나는 꽃다발을 든 채 주춤주춤 뒤쪽 천막 앞에 섰다.
“으흠…….”
왔다는 걸 알리기 위해 헛기침을 했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설마 어디 간 건가? 혼자 있을 때 전해 줘야 하는데. 불안한 마음에 천막 안을 슬쩍 엿보자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마티어스의 넓은 등이 보였다. 뭐 하나 싶어 자세히 지켜보고 있는데 안에서 불현듯 욕설이 들려왔다.
“제기랄.”
나한테 한 건가 싶어 깜짝 놀라 몸을 움츠리는데 다행히 그건 아닌 듯했다. 마티어스가 책을 펼친 채 그 큰 손으로 무언가를 꼬물꼬물하고 있었다. 눈매를 가늘게 좁힌 나는 곧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
마티어스는 바스러진 꽃을 하나하나 붙이고 있었다. 제대로 된 도구도 없이, 어디선가 가져온 풀과 손에 비해 너무 작은 나뭇가지로 한 잎, 한 잎 힘겹게 잇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참으로 눈물겨웠다. 테이블 위 초의 어른거리는 불빛에 의지해 꽃잎을 이어 붙이던 마티어스가 긴 한숨을 쉬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 씨. 그냥 죽일 걸 그랬나…….”
그 말투가 너무 진지해 나까지 오싹해졌다. 그 진지한 분위기에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마른 입술을 핥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손길에 천막이 활짝 열렸다.
“뭐, 해?”
압실론이 내 뒤에서 무구한 낯으로 물었다. 그와 동시에 벌어진 천막 틈새로 거센 바람이 불었다. 아차 싶어 마티어스 쪽을 바라보니, 그가 공중에 날리고 있는 마른 꽃잎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아……!”
마티어스는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처럼 꽃잎을 손으로 쥐었다. 실제로 꽤 많은 꽃잎을 잡긴 했지만, 억센 손으로 쥔 꽃잎은 더 작게 바스라질 뿐이었다. 제 손안에 남은 것을 망연자실하게 내려다보던 마티어스가 열린 천막 뒤쪽을, 정확히는 압실론을 노려보았다.
“여긴, 왜 왔어.”
“꽃잎에 보존 마법, 걸어 달라며. 그래서 왔는데…… 걸 수 있는 게 없어 보이는데?”
압실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앞쪽으로 오면 됐잖아. 왜 뒤로 왔냐고!”
마티어스에게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압실론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를 가리켰다.
“이안이 여기서, 엿보고 있길래. 여기로 들어가는 게 더 재밌을 것 같아서.”
“…….”
나는 어이가 없어 압실론을 돌아보았다. 압실론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한 소리 하려던 나는 문득 압실론이 시간 왜곡 마법을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압실론에게 귀엣말을 했다.
“너 시간 왜곡 마법 할 줄 알지 않아, 압실론?”
“할 수 있지.”
“그러면…….”
“으응, 그런데 여기선 안 돼. 너무 고위 마법이라.”
드래곤에게 들킬 수도 있으니 안 된다는 말이었다. 나는 막다른 길에 몰린 기분으로 마티어스를 돌아보았다. 마티어스와 나의 시선이 복잡하게 얽혔다. 그의 콧잔등이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제 얼굴을 손으로 덮으며 일갈했다.
“나가.”
“……어?”
“오랬다가 가랬다가, 자기 마음대로네.”
압실론이 투덜거리듯 중얼거렸다. 압실론의 말을 들은 마티어스의 관자놀이에 푸른 정맥이 돋아났다.
“당장 내 눈앞에서 꺼져. 꼴도 보기 싫으니까!”
“어이없어. 가자.”
압실론이 기가 찬다는 듯 중얼거리며 나를 이끌었다. 세게 당겨지는 바람에 움켰던 손이 풀리며 내가 쥐고 있던 꽃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흙바닥에 꽃다발이 풀어 헤쳐진 채 나뒹굴었다.
나는 압실론에게 이끌려 걸으면서도 이따금 뒤를 돌아보았다. 바람이 불어 천막 안의 마티어스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 그는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꽃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 *
폭풍 같았던 대기 시간이 끝난 뒤 새벽녘, 우리는 샛길을 향해 출발했다. 샛길이라고 하기에 오솔길을 생각했는데, 조용조용히 걸어 도착한 곳은 까마득히 높은 산맥이었다.
“……샛길?”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누군가가 바람 새는 소리를 내며 중얼거렸다.
“중간부터 길이 가팔라지는 구간이 있다 하니 조심해.”
뒤에서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체자레가 내 뒤에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앞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뒤로 왔대.
“네에, 감사합니…… 으엑.”
체자레에게 얌전히 대답하고 걸음을 빨리하자마자 나는 누군가의 등에 코를 박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큰 키와 곧은 등을 보자 어쩐지 불안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루드비히였다. 어둠 속에도 빛을 발하는 이목구비 때문에 모를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싸늘한 시선에 기가 죽어 고개를 숙이자 루드비히가 새침하게 돌아섰다. 새침하다는 표현이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내가 보기엔 그랬다. 마티어스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모르고 있었는데, 루드비히까지 있었구나. 어쩐지 초장부터 기가 쪽쪽 빨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지, 어쩌면 마티어스와 같이 걷는 것보다는 나을지도. 가장 편했던 상대가 불편해지는 감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 별똥별이다.”
산을 타던 중 병사 하나가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를 올려다보자 별똥별은 이미 지나가고 없었지만, 남청색 하늘에 별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아쉽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별 하나가 하얀 선을 그리며 낙하했다.
“오.”
두 개가 끝이 아니라 별똥별이 세 개, 네 개로 늘어나더니 별이 비처럼 쏟아졌다. 아름다운 광경에 고개를 들고 걷고 있는데, 가방과 짐의 무게에 기우뚱하며 몸의 중심이 뒤로 쏠렸다. 당황해 뒤꿈치로 중심을 잡으려는데 시야에 거꾸로 된 체자레가 가득 찼다. 꽃을 태운 듯한 향이 그의 품에서 훅 풍겨 나왔다.
“조심해야지.”
“네…….”
체자레가 가방을 끌어 올리며 내 몸을 곧게 세워 주었다.
“짐이 많이 무거워?”
“아, 아뇨. 그건 아니에요…….”
별똥별에 정신 팔다가 중심 잃었다고 말하면 한심하게 볼까 봐 나는 답을 어물거렸다. 체자레가 미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가방을 살짝 들었다.
“가방 하나 줘. 내가 들어 줄 테니까.”
“진짜 괜찮아요.”
“통행 방해하지 말고, 얼른.”
아니, 세상에 시종 짐 들어 주는 상관이 어디 있습니까…….
이래도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아예 체자레가 내 가방을 빼앗듯이 낚아챘다. 황당한 한편 편하기도 해서 나는 도로 달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소원 빌었어?”
체자레가 불쑥 내 옆으로 와 소년 같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나는 어리둥절한 시선으로 체자레를 올려다보았다.
“네? 소원이요?”
“별똥별 봤잖아. 소원 안 빌었어?”
발 헛디디느라 빌 틈도 없었는데요. 내가 어색한 미소를 짓자 체자레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즐겁네. 이런 풍경도 보고.”
체자레가 밤하늘을 가득 메운 별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여전히 하늘에는 이따금 별똥별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체자레의 말투에는 두려움이 전혀 없어 보여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무섭지 않으세요?”
“응? 뭐가 무서워?”
“이 던전에 들어오신 거요. 어디서 뭐가 나올지도 모르고, 운 나쁘면 죽을지도 모르잖아요.”
“글쎄, 무섭다기보다는 재밌어서 두근거리는데. 넌 무섭구나?”
아, 잘못 걸렸다. 상종하지 말아야지.
도파민 중독자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진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예, 전 무서워요.”
“그럴 수 있지. 그런데 내가 무서워하는 건 다른 거라.”
“뭐가 무서운데요?”
“아무것도 궁금하지 않은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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