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04화 (104/149)

#104

나는 그제야 모든 걸 떠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거.’

‘이게 뭐야?’

‘오다 주웠어.’

‘온실 들렀다 왔니?’

감금되었던 날 마티어스가 내게 건넸던, 한 송이만으로도 아주 호화롭고 아름다웠던 금색의 이름 모를 꽃. 못되게 구느라 수직 낙하시켰던 꽃을 마티어스가 도로 건네주었었다.

‘……푸엑!’

좀 과격하게. 내 얼굴로 던졌지, 아마.

‘너 얼굴 진짜 웃긴다.’

‘…….’

‘또 올게.’

그때의 나는 그걸 도로 던질까 고민하다가, 책 사이에 몰래 끼워 침대 밑에 숨겨 두었었다.

휘몰아치는 과거의 파편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책을 쥔 채 어딘가로 달려 나갔다.

“마티어…….”

마티어스는 내 부름에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나는 숲의 어둠에 먹혀 가는 것처럼 보이는 마티어스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 나도 일어나야지…….”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나는데 목덜미 위로 차갑고 끈적한 것이 떨어졌다.

“앗, 차가워!”

당황해 목덜미를 문지르며 위를 올려다보자 내 머리 위로 입을 쩍 벌린 비아나가 보였다. 내 머리통쯤은 한 번에 삼킬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입 안에 날카로운 이빨 수십 개가 삐죽빼죽하게 나 있었다.

“으아악!”

나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숙였다. 딱! 비아나의 입과 내 머리가 간발의 차로 아슬아슬하게 어긋났다. 검을 빼려 검집을 쥐는 순간 비아나가 앞발을 들어 내 등을 강타했다.

“헉…….”

순간적인 충격에 골이 흔들렸다. 목구멍으로 울컥 신물이 올라왔다. 비아나가 다시금 내 위로 덮쳐 오는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몸을 굴려 겨우 그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아, 오늘 엄청 구르네.

쿵! 다시금 거대한 앞발이 직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타격했다. 그 자리가 움푹하게 파이며 흙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 진짜…….”

공격력이 낮아도 눈을 보면 안 되니 공격을 피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검보다는 마법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어지러운 시야에 사람이 없는지 확인했다. 두통이 일고 눈앞이 흔들리고 있으므로 마법이 성공할 확률이 확 떨어졌다. 무슨 마법을 쓸지 겨우 결정한 순간, 비아나가 내 눈앞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눈동자의 금빛 안광이 빨아들일 것처럼 나를 덮쳤다.

“젠장…….”

나는 나지막이 욕설을 내뱉었다. 환영에 제대로 걸려 버렸다는 나쁜 예감이 들었다. 늑대의 모습이었던 비아나가 아메바처럼 변하더니 이내 서서히 사람의 형태를 갖추어 갔다. 마취 침이라도 꽂은 것처럼 그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눈 한 번 깜빡이지 못해 안구가 점차 건조해져 갔다.

비아나는 이제 완연한 남자의 골격을 갖추고 있었다. 가면을 쓴 듯 보이는 비아나의 안면 이목구비가 점차 뚜렷해졌다. 제멋대로 자랐다 줄어드는 머리카락이 색을 갖추기 직전, 누군가 비아나의 머리를 잡고 그대로 목을 베어 냈다.

“……!”

머리를 잃은 몸에 균열이 일었다. 이내 비아나의 몸은 산산조각 나 수천 개의 조각으로 화했다. 눈 한 번 깜빡이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풀숲 위로 크리스탈 조각 같은 비아나의 몸체가 후드득 떨어졌다. 고요한 풀숲에서 비아나를 해치운 남자가 로브를 벗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혀언, 괜찮아?”

압실론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참아 왔던 숨을 내쉬었다. 긴장되었던 근육이 점차 이완되고 있었다.

“……어어. 너였구나.”

“왜 여기 혼자 왔어. 던전에서는 탈출도 못 하는데.”

걱정이 가득 담긴 말로 이렇게 기분을 잡치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나는 압실론의 말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압실론이 손수 내 몸을 털어 주었다. 그런 압실론의 머리 위에 풀잎이 붙어 있었다.

지나 잘하지…….

나는 얌전히 압실론의 손길을 받아들이며 생각했다. 앞머리까지 정리해 준 압실론이 배시시 웃은 뒤 검에 묻은 피를 탈탈 털어 냈다. 땡그랑. 압실론이 놓친 검이 풀숲 위로 떨어지며 금속음을 냈다.

“아, 떨어졌네.”

압실론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마티어스가 보면 뒷목 잡을 광경이었지만, 여기에는 우리 둘뿐이었으므로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압실론은 검을 주워 들어 비아나의 피를 대강 닦아 낸 뒤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왜 검을 썼어?”

마법도 잘 쓰면서.

“마법 쓰면…… 걸릴 수도 있어서.”

“아, 맞다.”

드래곤은 마나의 흐름을 예민하게 느끼므로, 고위 마법을 사용하면 드래곤이 우리가 던전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도 있었다. 이 때문에 위급한 상황이 아닌 이상 토벌대에게는 고위 마법을 비롯한 대부분의 마법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지원형이나 생활 마법 정도만 가능했다.

“그런데 압실론 너, 검 실력이 그렇게 뛰어났던가?”

아무리 당황한 상황이라곤 해도 나를 전전긍긍하게 만든 비아나를 압실론이 단숨에 해치웠다는 거에 자존심이 조금 상했다. 압실론이 수줍어하며 검지로 검 손잡이 부분을 톡톡 쳤다.

“검에 마법 몇 개 걸어 놨어.”

“……아.”

어쩐지 애가 막 산산조각이 나더라. 몇 개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내가 비아나가 있던 곳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압실론이 물었다.

“그런데 쟤, 비아나네.”

“응, 맞아.”

“뭔가…… 봤어?”

압실론이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 왔다. 저 창백한 낯에 떠올라 있는 건 어떤 감정일까. 호기심? 두려움?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전에 네가 해치웠어.”

“으응. 그렇구나…….”

압실론이 안심이라는 듯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자기가 나타났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하지 않은 듯한 말투였다. 비바람을 정통으로 맞은 강아지 꼴을 하고 의기소침해 있는 게 좀 안쓰러워 보여 내 자신에게 어이가 없었다. 나는 속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린 압실론의 옆모습을 보다 불시에 그의 머리칼을 헝클어트렸다. 가르마가 아무렇게나 타진 새집 같은 모습을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렇게까지 맹해 보이는 모습은 오랜만이네.

“뭐 해애…….”

내가 웃고 있는 게 비웃는 거라 생각했는지 압실론이 입술을 삐죽이며 제 머리를 정돈했다. 비웃은 건 아니었지만, 압실론 덕분에 기분이 좀 나아진 것도 사실이었다.

“이현, 집합 시간 다 되어 가는데…….”

“아, 그래. 가자.”

나는 압실론과 함께 걸음을 옮기다가 멈춰 섰다. 압실론이 의아하다는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잠깐만.”

아무리 정신없다고 하더라도 이걸 잊어버릴 뻔했네.

나는 비아나가 있던 곳에 다가가 무릎을 꿇고 수풀을 더듬었다.

“뭐 찾는 거야?”

“음…….”

내가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압실론이 손에서 빛의 구를 만들어 내 쪽으로 가볍게 던졌다. 구는 딱 손전등 정도의 밝기라 나는 금방 부러진 화살을 찾을 수 있었다. 은색 화살촉 끝에 갈색 피가 말라붙어 있었다. 마티어스의 거였다. 나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응.”

내 표정이 심각해진 걸 봤는지 압실론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내 소매를 잡고 걷기 시작했다. 그답지 않은 행동에 의아해진 내가 물었다.

“갑자기 이건 왜 잡아?”

“아까 한 번 넘어졌는데, 아프더라고. 이현은…… 아프지 말라고.”

걱정해주는 건 고맙다만…… 꼴이 형편없다 보니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았다. 자기 넘어질 때 나까지 붙잡는 바람에 같이 떼굴떼굴 동산을 구를 것 같달까.

“오늘은 왜 넘어진 거야?”

“그냥, 요즘 할 게 많아서…….”

압실론이 말꼬리를 흐리며 어물거렸다. 마법 쓸 일도 없으면서 마법사가 무슨 할 일이 그렇게 많을까. 더 캐물어 볼까 하다가 그것도 귀찮아져 그만두었다.

야영지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15분도 안 되어 압실론과 나는 금방 야영지에 도착했다. 까치발을 선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나를 빤히 바라보던 압실론이 물었다.

“누구 찾아?”

“마티어스. 어디 있지?”

“저기 있는데?”

“어…….”

어디, 라고 다 말하기도 전에 나는 마티어스를 찾을 수 있었다. 압실론이 가리킨 방향에는 사람들이 모여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었는데, 그 중앙에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마티어스가 누군가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나는 부러진 화살을 쥔 채 마티어스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면 석궁이 발이 달려 도망갔나 보지?”

“그게, 저도 사라져서 찾고 있던 중입니다.”

“전투 중도 아니고 대기 중에 석궁이 사라지는 게 말이 되나?”

가만히 보니 마티어스의 주위에는 석궁과 활을 든 병사들만 있었다. 돌아오자마자 석궁과 활을 든 이들을 집합시킨 모양이었다. 그러다 석궁이 없는 병사를 발견한 거고. 확실히 수상하긴 했다. 전투가 없던 상태에서 대기 중에 석궁이 사라진 거니까. 특히나 검을 잃은 기사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는 마티어스는 절대 믿지 않겠지. 나 역시 저 병사가 수상했다.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중앙으로 차츰차츰 나아갔다. 중앙에 다다른 나는 병사를 심문-심문이라고 하기엔 좀 과격한-하고 있는 마티어스에게 화살을 내밀었다.

“뭐…… 이안.”

흥분한 채로 뒤를 돌아보았던 마티어스가 나를 보며 얼굴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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