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마티어스에게 대롱대롱 매달린 채로 밑을 내려다보니 발밑에 까마득한 낭떠러지가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뾰족하게 반짝이는 돌바닥을 보자 소름이 쭉 끼쳤다.
“무슨 생각을 하는데 발밑에 뭐가 있는지도 몰라.”
마티어스가 별로 힘주지 않고 나를 위로 당겼다. 순식간에 몸이 딸려 올라갔다. 다시 단단한 땅 위에 서게 된 나는 화난 마티어스를 보며 난감하게 볼을 긁적였다.
“그냥, 이것저것 고민하다가…….”
“그래도 발밑은 봐야 할 거 아니야.”
그 후로도 마티어스는 잔소리를 일장 연설로 늘어놓았다.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냐느니, 뭐가 있을 줄 알고 이 깊은 곳까지 들어왔냐느니 하는 잔소리에 귀가 따가웠지만, 걱정에서 비롯된 거라는 걸 알고 있기에 얌전히 들었다. 하지만 점점 듣기 힘들어졌던 나는 말꼬리를 슬쩍 돌려 보기로 했다.
“그런데 여긴 왜 왔어? 준비하느라 바쁘지 않아?”
“너 금방이라도 사고 칠 것 같은 표정으로 어디 가길래 급히 따라와 봤지.”
“그래, 덕분에 살았네. 근데 우리 어떻게 돌아가지?”
마티어스가 혀를 쯧쯧 차며 나무 사이 숲길로 고갯짓했다.
“나 없으면 어떻게 할 뻔했냐? 따라와.”
“그러게, 정말 든든하다.”
영혼 없이 칭찬을 건네자 마티어스의 귀 끝이 살짝 붉어졌다. 나는 그런 그가 꽤 귀엽다고 생각하며 마티어스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너 정말 길 아는 거 맞아?”
“……아마?”
마티어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꼬박 30분 넘게 걸었지만, 야영지는 나오지 않았다. 어째 점점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마티어스는 당황해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 주위를 살폈지만, 숲이 너무 빽빽했던 탓에 찾지 못했다. 이래서야 마법을 쓴다 해도 야영지까지 찾아갈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모른다고 솔직히 말했으면 나도 같이 찾아봤을 거 아냐.”
“애초에 네가 정신 놓고 숲속으로 들어가지만 않았어도 따라가다 길 잃어버릴 일도 없었어.”
“그래서 아까 잔소리 실컷 들어 줬잖아.”
우리는 숲속에 서서 네가 못했네, 내가 잘했네를 두고 아웅다웅 다투었다. 울컥해서 한마디 더 던지려는데 마티어스가 내 입을 갑자기 틀어막았다. 바로 떼어 내고 뭐라 하려는 찰나, 마티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물소리 안 들려?”
“무오이?”
“맞네. 저쪽에서 난다, 물소리.”
입술이 덮여 있어 뭉개진 발음을 내뱉으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한테는 전혀 안 들리는데.
“일단 물가로 가자. 야영지 근처에도 물가가 있었으니 물가의 크기를 보고 상류로 갈지 하류로 갈지 결정해야겠어.”
“원랜 그게 맞긴 하는데, 던전에서도 그게 똑같이 적용될까?”
내 말에 마티어스가 콧잔등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별수 있겠어. 어쨌든 우리는 지금 길을 잃었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인데.”
“그건 그러네. 가 보자.”
마티어스가 단검으로 높게 자란 풀을 베어 내며 거침없이 전진했다. 마티어스 덕분에 편하게 걸을 수 있게 된 나도 3분 정도 지나자 물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파리와 가지가 마찰하는 바람 소리 사이로 희미하게 들리는 물소리를 들으며 마티어스의 뒷모습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바람도 이렇게 세게 부는데 어떻게 들었을까. 하여간 감각 하난 짐승 같은 녀석이었다.
“맞게 가고 있는 것 같아. 나도 이제 물소리 들린다.”
“그러게. 조금 더 속도 높인다.”
마티어스가 풀을 베어 내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나는 그런 마티어스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굳이 안 베고 그냥 지나가도 되지 않아?”
사람이 많이 지나갈 길이야 선발대가 베어 내면서 이동하는 게 유리했지만, 지금처럼 둘만 있는 곳에서는 그냥 헤치고 걸어가는 게 속도 면에서나 피로도 면에서나 더 나았다. 마티어스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너 아까 풀에 손등 베여서 계속 만지고 있더만. 그 꼴 보느니 베어 내면서 가는 게 낫지.”
의외의 말에 놀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좀 따끔하길래 잠깐 문질렀던 것뿐인데, 언제 그걸 또 본 건지. 나는 민망해지는 마음에 뜨거워진 목덜미를 긁적였다. 드러난 목덜미 위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으엑.”
풀을 베어 낸 마티어스가 우뚝 멈추어 섰다. 갑옷을 입은 마티어스의 등에 코를 부딪히자 눈물이 찔끔 났다. 인상을 쓰며 코를 문지르고 있는데 핀잔을 주기엔 분위기가 어째 여의치 않았다. 마티어스가 숨을 죽인 채 뒤로 가라는 수신호를 보냈다. 뭐라도 있는 건가. 나는 얌전히 그의 말을 따라 조심스레 뒷걸음질했다. 나를 감싸듯 끌어안은 마티어스가 귓바퀴 위에서 속삭이듯 말했다.
‘천천히, 뒤로 물러나자.’
‘왜 그러는데?’
‘비아나가 있어.’
비아나가 뭐지 생각하던 나는 그것이 환각 마법을 쓰는 고위급 몬스터의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비아나는 늑대의 몸에 사람 피부와 비슷한 색 가면을 쓴 몬스터인데, 가면 안에 든 금색 눈과 마주치면 희생양이 가장 끌리는 상대의 모습으로 변했다. 실제로 변하는 건 아니고 환각이긴 했지만.
비아나는 던전이나 깊은 숲속에 종종 출몰했는데, 입에서 맑은 물소리를 내 희생양을 끌어당겼다. 그렇게 비아나에게 접근한 희생양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며 천천히 잡아먹혔다.
전투력은 낮은 데 반해 환각 능력이 7클래스 이상이라 클래스가 낮은 마법사나 정신 수양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검사들에겐 아주 곤란한 상대였다. 마티어스 정도 되는 검사면 아주 방심하지 않고는 당하지 않겠지만, 나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찌 되었든 곤란한 상대긴 해 나는 마티어스의 지시를 따랐다. 하지만 궁금하긴 했다. 비아나와 마주하면, 나는 누구의 모습을 보게 될까?
‘조용히 하고 발밑만 보고 걸어.’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마티어스는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내 뒤에서 손에 깍지를 꼈다. 조심스레 한 걸음, 두 걸음을 디뎌 비아나의 사정거리 안에서 벗어나기 직전, 마티어스가 불시에 내 뒷덜미를 잡고 뒤로 끌어당겼다.
“……!”
추락하는 순간, 시계가 느리게 돌았다. 덕분에 나는 나무와 나무 사이에서 날아온 석궁이 마티어스의 가슴을 정통으로 꿰뚫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쐐애애액- 퍽! 석궁은 마티어스의 갑옷을 뚫고 그대로 가슴에 처박혔다. 마티어스의 붉은 머리카락이 공중에 떠 흩날리고, 관자놀이에서 흘러내린 작은 땀방울이 달무리를 받아 반짝였다. 적 앞에서도 선 채로 죽을 것 같은 남자가 내 앞에서 허물어지는 모습을 목격하자 눈에서 불이 튀는 것 같았다. 귓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윙윙 울렸다.
“마티어스-!”
나는 있는 힘껏 그를 받아 내며 목소리를 높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석궁을 쏜 상대를 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도저히 마티어스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허억……!”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던 마티어스가 막혔던 숨을 토해 냈다. 마티어스의 뺨 위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나는 그제야 내가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티어스, 괜찮아?”
물을 잘못 마신 사람처럼 거세게 기침하던 마티어스가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무참히 깨진 갑주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깊이였다. 화살에 맞은 상처를 살피려던 나는 갑주 안에 갈색의 단단한 무언가가 더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갑인가? 확인하려 손을 뻗은 순간, 몸이 나동그라졌다.
“……?”
나는 방금 일어난 일을 이해하지 못해 눈을 끔뻑였다.
마티어스, 지금 너 날…… 밀쳤어?
오늘은 도대체 해가 어느 쪽에서 뜬 걸까 생각하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다급히 제 갑옷 끈을 풀었다. 아니, 누가 또 석궁을 쏠지도 모르는데 갑옷을 풀어 버린다고? 나는 우리 주변으로 다급히 보호막을 생성하며 몸을 일으켰다. 풀린 갑옷과 옷 사이에서 화살이 박힌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책?”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두께의 갈색 책이 화살에 관통되어 있었다. 책 뒤편 정중앙에 화살촉 끝이 아주 미세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마티어스의 가슴 한가운데에서 피가 방울방울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새빨간 선혈을 보자 목덜미가 오싹했다. 책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윽…….”
책을 쥔 마티어스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듯한 표정에 가슴이 저려 왔다. 이렇게까지 책을 사랑하던 녀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책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나는 그 책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걸 깨달았다. 저걸 내가 어디서 봤더라. 무심코 책 쪽으로 손을 뻗는데 마티어스가 내 손을 매섭게 치며 소리쳤다.
“손대지 마!”
순간적으로 숨이 멎을 정도로 강렬한 분노였다. 날 선 시선이 온몸을 베어 내는 것 같았다. 손등이 얼얼하다 못해 아려 왔다.
“마티어스……. 너 왜 그래?”
마티어스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다. 화살의 뒷부분을 부러트린 마티어스가 화살촉 부분을 쥔 채 뽑아냈다. 안위를 전혀 생각지 않는 무심한 손길에 내가 더 아파지는 기분이었다. 화살을 빼 떨군 손바닥에서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부풀어 오른 턱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마티어스가 갓 태어난 병아리를 대하는 듯한 손길로 책을 펼쳤다. 중앙이 뚫린 책을 팔랑거리며 넘기는 모든 행동이 극도로 조심스러웠다.
책갈피를 꽂아 넣은 것처럼 책장이 어느 한 부분에서 훌쩍 펼쳐졌다. 세월이 지나 낡고 바랜 금색의 꽃. 꽃봉오리 부분이 화살에 꿰뚫려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마티어스가 바싹 마른 꽃을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들어 올렸다. 내구도가 떨어진 꽃잎 몇 장이 팔랑팔랑 바닥으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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