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씨근덕거리던 마티어스가 체자레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체자레, 나와. 한판 붙자.”
마티어스의 도발에도 체자레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를 더 깊이 끌어안았다. 마티어스의 관자놀이 위로 파란 힘줄이 돋아났다. 나는 수명이 실시간으로 깎이는 것 같았다.
“하려면 못 할 것도 없겠지만, 지금 좀 바빠서요.”
“바쁘긴 뭐가 바빠? 아, 시종 희롱하느라 바쁜 건가? 헛소리하지 말고 나와.”
“정말 바쁜걸요. 마티어스가 저한테 일 맡겨 놓고 거기서 대련하고 있어서 너무 바빠요.”
“이게 진짜……!”
“그리고, 폐하께서 자리 비운 사이에 우리가 병사들 앞에서 감정적으로 대련했다는 거 알면 참 좋아하시겠어요. 그렇죠?”
유들유들한 체자레의 반응에 당장이라도 원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던 마티어스가 우뚝 멈추어 섰다. 분명 마티어스가 루드비히에게 여전히 조금 약한 걸 알고 있기에 뱉은 말이었다.
체자레가 성난 짐승처럼 씩씩거리는 마티어스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대신, 내 시종을 내보낼게요.”
“……?”
“……뭐?”
체자레의 폭탄선언에 우리는 동시에 체자레를 돌아보았다. 체자레가 검지로 내 볼을 콕 찍으며 빙글 웃었다.
“둘이 대련해 봐요. 이 친구도 일반 병사로 들어왔던 거 내가 시종으로 데려온 거니까.”
체자레의 제안에 마티어스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 다급히 지금까지 쓰던 펜과 종이를 보이며 말했다.
“저, 저도 좀 바쁜데요…….”
“괜찮아, 내가 하고 있을 테니까 안심하고 다녀와.”
체자레가 더없이 상냥한 상관처럼 말했다. 나는 흐린 눈으로 체자레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체자레 너 진짜…… 성격 나쁘다.
체자레가 물러날 기색이 없었기에 나는 결국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일어나자 마티어스가 움찔해 내 시선을 피했다. 검으로 하는 대련이야 종종 해 왔지만, 맨손 대련은 어쩐지 좀 걸쩍지근한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원 안에 들어온 애들을 한 대씩 패고 내보내서 더 그렇겠지. 체자레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고.
“…….”
“…….”
내가 원 안으로 들어서자 마티어스가 난감한 듯 마른 입술을 핥았다. 우리는 착잡한 시선으로 서로를 가늠했다.
“제대로 해야 해요, 마티어스. 알죠?”
“…….”
나는 오늘 저녁 체자레의 식판에 침을 뱉어야겠다 결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나는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쥐었다. 사실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이현이었을 때에는 종종 주먹다짐도 했었는데. 둘 다 쪼렙이었을 때 얘기긴 하지만.
공격 자세를 취하는 나를 보며 마티어스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당황과 동정이 섞인 낯짝. 마티어스는 마치 인간을 공격하는 다람쥐를 보는 것처럼 나를 보고 있었다. 이 쪼만한 걸 어떻게 안 때리고 밖으로 내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는 모습이 보여 어이가 없었다. 나를 아주 만만하게 보네, 얘가.
원래는 적당히 하다가 실수인 척 원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생각이 바뀌었다. 나는 마티어스의 사정거리 밖에서 얼쩡거리다 그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지금껏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공격을 피해 왔던 그답게 마티어스는 턱을 살짝 올리는 것으로 공격을 피했다. 쉬익, 짧은 바람 소리와 함께 주먹이 허공을 갈랐다. 마티어스가 피할 걸 이미 예상했던 나는 그의 정강이를 힘껏 찼다. 깡-! 군화와 갑옷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났다. 마티어스가 당황스러운 듯 두어 걸음 떨어져 나를 바라보았다. 체자레가 뒤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눈을 깜빡거리던 마티어스가 이내 자세를 다잡았다. 어쩔 줄 모르던 아까와는 달리 눈빛도 매서워졌다. 어쩐지 좀, 불안했다.
“넌 진지하게 응했는데 내가 너무 어설펐다. 지금부터 제대로 할게.”
마티어스가 나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내게 중얼거렸다. 당황한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 마티어스가 순식간에 내 쪽으로 달려들었다.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속도에 나는 납작 엎드릴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주먹을 피하자마자 마티어스는 팔을 접은 뒤 팔꿈치로 내 등을 찍을 듯 내리쳤다. 피하기 어려운 각도라 나는 옆으로 돌아 피하는 대신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 옆으로 두어 번 데굴데굴 구른 뒤 바로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다소 꼴사나운 모습이었지만, 저 주먹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아냐, 마티어스. 그냥 봐주라.
바로 이어지는 속공에 나는 원 안을 거의 도망 다니듯 뛰어다녀야 했다. 빨리 달리느라 이지러지는 시야에 사람들이 흥미로운 시선이 보였다. 개중 체자레가 가장 즐거워하고 있었다. 침을 두 번 뱉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만 치지 말고 공격도 해.”
쫄래쫄래 도망만 다니는 내가 불만스러운지 마티어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한 대 맞으면 죽을 것 같은걸.
공격을 피하고 나면 뒤늦게 살갗에 닿는 바람의 세기가 유리창도 깨트릴 것처럼 강했다. 한 번도 맞은 적 없는데도 바람이 닿았던 살갗이 얼얼해질 지경이었다. 당황스러운 건 마티어스가 지금 전력을 다하고 있는 것도 아니라는 거였다. 공격 한 번 더 하기 전까지는 원 밖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작은 다짐이 한여름 날의 얼음처럼 사르르 녹아 가고 있었다.
내가 계속 피하기만 하니까 마티어스는 아예 허점을 노출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의 대련에 익숙한 나는 절대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검을 들고 하는 대련이었다면 한 번쯤 각을 잡고 덤벼 볼 만도 했지만, 주먹다짐으로는 마티어스를 영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일단 체격에서부터 너무 차이가 났고, 힘과 기술의 격차도 컸다. 그나마 비등했던 건 속도 정도였는데, 사실 마티어스의 몸이 나보다 훨씬 크다 보니 속도도 마티어스가 우위에 있다고 보면 됐다.
“…….”
요리조리 도망 다니는 날 보는 마티어스의 안색이 갑자기 급변했다. 설렁설렁 나를 쫓는 듯 보이다가도 가만히 보면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얘…… 지금 누굴 보고 있는 거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만해야겠다.
잠깐의 치기로 위험을 자초하고 싶진 않았다. 대련이라는 말에 나 역시 너무 흥분했다는 걸 느꼈다. 나는 결심하자마자 마티어스를 등진 뒤 원 밖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어?”
거대한 그림자가 내 머리 위를 덮쳤다. 인식하기도 전 그림자의 본체가 나를 짓눌렀다. 갑작스럽게 무게가 더해지자 무릎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그것을 얹은 채 풀밭 위에 꼴사납게 엎어졌다.
“으……. 뭐야?”
팔꿈치며 무릎이 땅에 쓸려 얼얼했다. 당황해 굳은 목덜미에 뜨거운 숨이 닿았다. 목을 움츠리며 눈알을 굴려 옆을 돌아보자 마티어스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마티어스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이지를 잃은 맹수의 눈동자가 이러할까. 금방이라도 목 줄기를 물어뜯을 듯한 시선에 오금이 저렸다. 나는 마티어스의 팔을 살살 긁듯이 쓸어내리며 그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마티어스……. 왜 그래?”
겁에 질려서인지 목소리가 평소보다 떨려서 나왔다. 내 목소리를 들은 마티어스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하.”
밑에 깔려 있는 나를 내려다보던 마티어스가 큰 손으로 제 얼굴을 덮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느새 다시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내 귀에 사과의 말을 속삭인 뒤 몸을 일으켰다.
“미안.”
마티어스는 상체를 세우는 것과 동시에 나를 거의 안듯이 일으켰다. 나는 떨떠름하게 그가 일으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심코 흙을 털어 주려는 마티어스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아직 보는 눈이 많았다. 그러자 마티어스의 시선이 다시금 뾰족해졌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허, 짧게 한숨을 내쉬며 몸을 털었다. 팔꿈치와 손바닥에 생채기가 났는지 따끔거렸다.
아니, 등 좀 보였다고 이렇게 전력으로 달려와서 덮칠 일인가. 자기가 진짜 맹수인 줄 알아.
나는 툴툴거리며 다시금 체자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마티어스가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이며 내 쪽을 바라보다 다음 순번의 병사를 불렀다.
* * *
하나씩 상대하기도 귀찮아졌는지 중간부터 마티어스는 다섯씩 원 안으로 들이기 시작했다. 대부분 마티어스의 압승으로 끝났지만, 시간과 쪽수에 장사 없다고 가끔 마티어스의 뺨이나 손등에 생채기를 내는 이들도 생겨났다.
“죄, 죄송합니다!”
바로 이 병사처럼. 희미한 존재감으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저 녀석은 마티어스가 다른 병사를 원 밖으로 내던지는 사이 그의 뺨을 날리는 데 성공했다. 마티어스가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긴 했지만, 병사도 실력이 없는 편은 아니었다. 존재감이 희미한 데 비해 몸이 가볍고 빨라 암살자에 잘 어울릴 듯했다. 체자레 역시 턱을 쓰다듬으며 관심을 보였다.
마티어스가 이렇게까지 정통으로 얻어맞은 건 처음이라 좌중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병사는 거의 기절하려고 했다. 벌겋게 부푼 뺨을 매만지던 마티어스가 병사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병사는 덫에 걸린 아기사슴처럼 몸을 덜덜 떨었다.
“이름과 직위가 어떻게 되지?”
병사는 거의 울려 하고 있었다. 단단히 찍힌 모양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 잘못했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아니, 네 목숨 말고. 이름이랑 직위가 뭐냐고.”
마티어스가 인상을 쓰며 병사에게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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