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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100화 (100/149)

#100

마티어스가 검을 빼 든 채 소리가 난 수풀을 향해 서서히 전진했다. 그가 망설임 없이 칼로 수풀을 베어 냈다. 나뭇가지와 초록색 이파리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모든 이파리들이 바닥으로 가라앉자 그제야 성인 남성 몸체보다 조금 더 큰 형체가 풀을 덮어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게…… 뭐지?”

잔뜩 경계하며 그것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푸르륵 소리가 나며 수풀의 잔해가 그것의 몸 위에서 미끄러져 추락했다. 막 해가 뜨기 시작하며 사위가 밝아지고 있던 차라 우리는 그것의 정체를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가고일?”

아직 새끼인 듯 가고일의 몸체에 회색 털이 듬성듬성 섞여 있었다.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란 가고일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몇 번 날개를 푸드덕거리던 가고일이 이내 정글 위로 날아올랐다. 마티어스가 하늘의 점이 되어 가는 가고일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가고일 떼가 근처에 있나 보군.”

가고일은 기본적으로 무리를 이루고 살았다. 특히나 가족애가 강해 새끼를 위해 부모가 목숨을 버리는 경우도 허다했다. 조금 전 들었던 소름 끼치면서도 구슬픈 울음소리는 부모를 찾기 위해 보내는 신호였던 듯했다. 길을 잃은 새끼가 이곳에 있다는 건 주변에 부모가 아주 가까이 있다는 소리와 같았다. 간담이 서늘했다. 만약 어젯밤 가고일 떼가 작정하고 임시 숙소를 습격했었다면…….

마티어스가 지체 없이 돌아섰다. 마티어스의 붉은 망토가 둥글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알려야겠어. 돌아가자.”

* * *

가고일 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티어스의 발언은 즉각 받아들여졌다. 안 그래도 야간 불침번을 섰던 병사 하나가 가고일의 깃털 뭉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전진하기보다는 잠시 멈추어 주변을 살피기로 했다.

압실론과 루드비히가 수색 팀을 꾸려 떠나고, 남은 인원은 전부 풀을 깎아 만들어 놓은 공터에 모여 대기하게 되었다. 나는 마티어스와 체자레의 옆에서 그의 업무 시중을 들었다. 새벽에 있었던 사고 때문에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할 일이 많아 이상한 분위기가 형성될 틈이 없었다. 나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꽃을 태운 듯한 체향이 나, 나는 때때로 몸을 흠칫 떨었다.

괜히 훈련을 했다가 위치가 발각되면 안 되기 때문에 훈련도 불가능했다. 처음엔 잔뜩 긴장해 쥐 죽은 듯 있던 병사들의 목소리가 오후를 넘기며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가고일? 나도 전에 해치워 본 적 있는데 별거 아니야.”

“한 놈이야 별거 아닐 수도 있겠지. 그때 가고일 떼가 수도를 습격했던 거 몰라? 여긴 거기 본거지야. 몇 마리나 있을지 모른다고.”

“마릿수가 다 무슨 상관이야. 전부 죽여 버리면 되는 거.”

이마가 유독 넓은 병사 하나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저런 말 하는 놈이 제일 일찍 뒤지더라.”

군중 가운데 하나가 비웃듯 말했다. 남자가 그 말을 들었는지 씩씩거리며 외쳤다.

“어떤 새끼야?”

“정숙하라!”

관리 중 하나가 남자에게 날카롭게 주의를 주었다. 잠시 사위가 고요해지나 했더니 다시 10분도 안 되어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체자레가 말하는 물품들을 적다가 그들을 곁눈질했다. 병사들을 담당하는 기사가 당황해 체자레와 마티어스의 눈치를 보며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정숙……!”

“됐어.”

“……예?”

“힘이 남아도니 떠들고 싶나 보지.”

체자레와 물품을 점검하고 있던 마티어스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나 잠깐 쉰다.”

간이 테이블 위에 펜을 툭 떨어트린 마티어스가 어깨를 돌리며 남자가 있는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병사들의 시선이 마티어스에게 집중되었다. 마티어스가 제 키의 반만 한 나뭇가지 하나를 신발로 굴리더니 이내 발등 위에 올려 튕겼다. 허공에 떠오른 나뭇가지가 마티어스의 손에 마법처럼 감겼다. 몇몇 사람들이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마티어스는 그 나뭇가지로 흙바닥에 성인 남성 다섯 정도 들어갈 크기의 원을 그렸다. 나뭇가지를 주저 없이 원 밖으로 내던진 마티어스가 원 중앙에 서서 손가락을 까딱해 보였다.

“거기 너.”

“예? 저 말이십니까?”

“그래, 아까 ‘어떤 새끼야?’라고 했던 너. 안으로 들어와.”

남자가 쭈뼛거리며 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멀리서 봤을 땐 꽤 크다고 생각했는데 마티어스의 앞에 있으니 꼭 거대한 늑대 앞의 토끼처럼 보였다. 움츠러들어 있어 더 그래 보이는 듯했다. 습관적으로 검 손잡이를 쥐었던 마티어스가 다시금 손을 떼어 냈다.

“소리 나니까 검 없이 하자.”

“예……?”

“맨손으로 싸워 보자고.”

마티어스가 가볍게 목 스트레칭을 하며 남자를 향해 손짓했다.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하다 소리를 지르며 마티어스한테 달려들었다.

“으아아……!”

“소리는 지르면 안 되지, 이 돌대가리야.”

마티어스가 혀를 차며 낮게 중얼거렸다. 흥분해서 동작이 커진 남자의 허점이 내게도 그대로 보였다. 남자의 옆으로 파고든 마티어스가 그의 갈비뼈 부근을 주먹으로 강타했다.

“끄윽…….”

남자는 새파랗게 질려 신음 한 번 내지 못하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한심하다는 듯 남자를 내려다보던 마티어스가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다른 이를 지목했다.

“너, 이리 와.”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지목당한 병사가 잔뜩 주눅 들어 쭈뼛거리며 원 안으로 들어왔다. 그사이 기사 둘이 쓰러진 남자를 원 밖으로 끌고 나갔다.

처참한 선례를 목격한 병사는 신중한 태도로 마티어스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긴장해서인지 자세가 좀 구부정하고 어설펐다. 예전이었다면 안 보였겠지만, 이제는 보였다. 그리고 그 점을 마티어스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듯했다.

“거기 글자 틀렸다.”

“아, 죄송합니다.”

체자레의 부름에 잠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을 뿐인데, 승부는 어느새 판가름 나 있었다. 땅바닥에 쓰러진 남자는 다시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나지 못했다.

“턱을 지킬 거면 제대로 지켜. 어중간하게 방어하면 오히려 네 주먹이 턱을 부수게 되니까.”

“아, 알겠흡니다…….”

마티어스가 건조한 태도로 병사의 잘못된 점을 말해 주었다. 병사가 새는 발음으로 답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눈 깜짝할 새 둘을 눕힌 마티어스가 병사들을 훑었다. 병사들이 흠칫 놀라 마티어스의 시선을 피했다.

“다음.”

안타까운 운명이 예정된 병사들을 보며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쨌든 이 대련으로 마티어스에게 하나라도 배워 생존하게 되면 다행이긴 했다. 마티어스 역시 의도가 그거였는지 대련이 끝난 뒤에는 고쳐야 할 점을 하나씩 말해 주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생각하는 병사들의 고칠 점과 마티어스가 생각하는 병사들의 고칠 점이 비슷했다. 나 검 실력이 늘긴 했구나.

즐거운 마음으로 듣고 있는데, 어깨를 가볍게 누르는 감각과 함께 귓가에 체자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중을 못 하네.”

부드러우면서도 압박감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당황해 옆을 돌아보자 체자레가 내 어깨를 짚은 채 웃고 있었다.

“내 옆에 있을 땐 나한테 집중해야지.”

연한 주홍빛이 도는 체자레의 입술이 평소보다 조금 더 나와 있는 듯도 했다. 자연스레 입술에 시선이 갔다. 어젯밤, 저 입술과 부딪친 거였구나. 의식하자마자 이 자세가 단박에 불편해졌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몸을 뒤로 뺐다.

“죄송해요. 집중할게요.”

어쨌든 집중하지 못한 건 내 잘못이었기에 나는 납작 엎드리기로 했다. 체자레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놔주었다. 집중해야지 싶어 펜을 고쳐 잡는데, 체자레가 불시에 물음을 던졌다.

“둘이 무슨 사이야?”

“……네?”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풀렸다. 놓친 펜이 간이 테이블 위를 굴렀다. 펜은 정확히 나와 체자레의 사이에 멈춰 얕게 흔들거렸다. 누가 봐도 수상한 반응이었다. 체자레는 눈매를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엔 일방적으로 마음에 들어 하는 건가 싶었는데…… 너도 마티어스를 보고 있네.”

“아, 아뇨. 그냥…… 어떻게 숨 한 번 안 흐트러트리고 저렇게 잘 싸우시나 싶어서 계속 보게 되네요.”

나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길 바라며 변명을 주워섬겼다. 한편으로는 좀 억울하기도 했다. 이 심심한 공터에서 저렇게 재밌는 대련을 하는데 어떻게 안 보고 배긴단 말인가.

“정말 그것뿐이야?”

“네? 네, 그럼요.”

“그럼 쟤는 왜 저러는 걸까?”

체자레가 내게 몸을 더 바싹 붙이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반쯤 끌어안긴 모양새가 되어 당황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

마티어스가 대련을 하면서도 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나와 체자레를. 살갗이 따끔따끔해질 정도로 강렬한 시선에 나는 난감해졌다. 시선의 정체가 질투라는 걸 체자레도 눈치챈 듯했다. 그는 재미있다는 시선으로 나와 마티어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제발 그만 쳐다봐, 마티어스.

고래 사이에 낀 새우가 된 기분에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마티어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된 틈을 타서 대련하고 있던 병사가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를 보느라 그 병사에게 아예 등을 보이고 있었기에 병사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마티어스는 제게 달려드는 병사의 셔츠를 잡아채 그대로 원 밖으로 날려 버렸다. 병사는 하늘을 날면서도 자신이 왜 나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흐억.”

어제 깎아 뾰족뾰족한 풀 위로 병사가 꼴사납게 엎어졌다. 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 불쌍한 병사를 애도했다. 흉흉한 분위기에 다음 순번인 병사가 원 안으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오들오들 떨었다.

나를 뒤에서 끌어안은 체자레가 재밌다는 듯 웃었다. 불행하게도 체자레는 지금의 이 상황을 철저하게 즐기고 있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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