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으로 몰려들었다.
설마, 아니야. 아닐 거야.
있을 수 없는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두통이 일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내 옆에 벗고 누워 있는 거지?
나는 실눈을 뜨고 체자레를 바라보았다. 거의 다 녹아내린 초의 불빛에 체자레의 매끈한 몸이 언뜻언뜻 드러났다. 체온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자기 전에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았다. 같이 저녁을 먹고, 씻으러 간 사이에 침구를 정리하다…… 푹신한 침구가 탐나서 그대로 잠들었었구나.
미친 자식.
나는 부담감을 잔뜩 안은 채 체자레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체자레는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이 예전 미술관에서 보던 천사 그림과 닮아 있었다. 설마 다 벗고 있는 걸까. 다행히 훑어본 내 몸에는 별 이상이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제발, 깨지 마라.
나는 뻣뻣하게 굳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체자레가 덮고 있는 시트를 끌어 내렸다.
“하아…….”
그러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체자레는 속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게 맞았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벗고 있는 거야. 아무리 벗고 자는 게 편하다고 해도 이 위험한 던전에서 이렇게까지 벗어도 되는 거야? 툴툴거리며 입을 삐죽이는데 체자레의 팔이 뱀처럼 내 허리를 휘감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으켰던 몸이 시트로 추락했다.
“……!”
“더 자, 불청객.”
체자레가 잠에서 막 깨 가라앉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그는 제대로 눈도 뜨지 않고 뒤에서 나를 끌어안았다. 체자레의 건조한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밀어냈지만, 허튼짓하지 말라는 듯 체자레는 뱀처럼 나를 칭칭 옭아맸다.
“왜, 왜 이러세요…….”
“일부러 누워 있었던 거 아닌가?”
내가 먼저 유혹이라도 했다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젓고는 변명을 이어 나갔다.
“그런 거 아니에요. 침구 정리하다 푹신해 보여서 잠깐 눕는다는 게 깜빡 잠든 거예요. 죄송합니다.”
“흐응…….”
“……나와 주시면 안 될까요?”
“계속 누워 있어도 되는데.”
“아뇨, 아뇨, 아뇨. 일어날게요. 일어나고 싶어요…….”
목덜미에 체자레의 숨이 닿아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최대한 그를 자극하지 않으려 작게 움직이며 돌아누웠다. 그러면서 몸을 뺄 요량이었으나 체자레는 내 말을 듣고도 내 허리를 쥔 손을 놓지 않고 있었다.
“흐음…….”
시트 위 우리의 머리카락이 뒤섞였다. 체자레의 금색 머리칼은 채도가 낮은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닫혀 있던 눈꺼풀이 두어 번의 깜빡임 끝에 완전히 열렸다. 마주 보는 시선에 숨이 막혔다. 거대한 뱀과 맨몸으로 마주하는 듯한 압박감이 나를 조여 왔다. 눈동자에 담긴 서늘한 욕망에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어쩌지.”
“……네? 뭐가요?”
“싫은데.”
그렇게 말하는 체자레의 목소리에 장난기가 어려 있었다. 긴장이 살짝 풀리는 것과 동시에 불쑥 화가 치밀었다. 성질대로 들이받을 수도 없고 진짜. 그냥 마법사로 들어갈걸. 뭔 팔자에도 없는 시종 일을 한답시고……. 새삼 후회가 들었다.
“루드비히에게 시종이 필요하더군.”
빠져나가려 몸을 바르작거렸던 나는 뜻밖의 말에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럼 리로가 루드비히에게 가게 되는 건가.
“잘 됐…….”
“그런데, 너를 달라 했어.”
“……네?”
나는 당황해 체자레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루드비히가 나를 시종으로 달라 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
‘……불쾌하군.’
‘…….’
‘물러가라.’
그게 고작 얼마 전의 일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시종으로 달라니. 혹시 내 정체를 눈치채기라도 한 걸까. 고민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체자레가 검지로 볼록 튀어나온 미간을 꾹 눌렀다.
“그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
“뭐라고 했을 것 같아?”
체자레가 유혹적인 미소를 띤 채 물었다.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처음엔 거절했어.”
“아…….”
“그랬더니 교환 조건으로 꽤 좋은 걸 걸더라고.”
체자레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진짜 좋은 거였나 보네. 나라라도 팔아먹었니, 루드비히야……?
“그래서 어떻게 할지 고민 중이야.”
체자레가 미간을 누르고 있던 검지로 내 얼굴선을 덧그렸다.
“한번, 하고 줄까.”
……뭐?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얼어붙었다. 방금 얘가 무슨 미친 소리를 한 거지?
“신기하지. 하나도 안 닮았는데 이렇게까지 닮을 수가 있다니.”
내 뺨을 쓸어내리며 체자레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더 이상 이 세계에 내 호기심을 자극하는 존재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
“다행히 넌 아직 소중하진 않은데, 끌리기는 하고.”
“끄, 끌린다고 하신 거 맞죠?”
“하하, 글쎄.”
‘끌’인지 ‘꼴’인지 불분명한 발음에 나는 잔뜩 쫄아 버리고 말았다. 광대와 턱선을 따라 내려온 손가락이 내 턱을 가볍게 쥐었다. 얄팍한 줄을 양쪽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듯한 아슬아슬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어떻게 할까.”
식은땀에 등 뒤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나는 조심히 말을 골랐다.
“제 의견을 물어보시는 거라면…….”
몸을 빼려 발가락을 꼼질거리고 있는데, 체자레가 불시에 내 셔츠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입술에 미지근하고 물컹한 것이 닿았다. 나는 그게 뭔지 인식하자마자 온 힘을 다해 체자레를 밀쳤다. 그러나 체자레의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고, 도리어 내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간이침대 밖으로 튕겨 나갔다.
“……!”
나는 종아리만 침대 위에 걸친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눈을 끔뻑였다. 체자레가 드물게 당황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정적을 깨고 체자레가 웃음을 터트렸다. 금방이라도 모두를 깨울 것처럼 큰 웃음소리였다. 한참을 웃던 체자레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손잡아요. 아니, 하하……. 손잡아.”
하지만 이미 빈정이 상할 대로 상한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스스로 일어났다. 시종을 연기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바닥에서 한 번 뒹군 바람에 옷을 털 때마다 풀 냄새가 배어 나왔다. 체자레는 머쓱한 기색도 없이 손을 거두었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낯짝을 보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문지르며 말했다. 어차피 표정 관리도 안 되고 있었다. 그러자 체자레는 더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뒤돌아서자마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결정했어.”
“…….”
“안 줄래.”
웃음기 섞인 가벼운 음성에서 진득한 소유욕이 묻어 나왔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천막에 비친 체자레의 그림자가 나를 삼키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듯 천막을 빠져나왔다.
* * *
“이…… 미친 새끼!”
천막에서 나온 나는 망설임 없이 샘물가로 달려갔다. 새벽으로 들어선 하늘이 저 멀리서부터 희미하게 밝아져 오고 있었다. 수풀을 헤치고 샘물가에 도착한 나는 무릎을 꿇고 샘물로 입술을 닦아 냈다. 아직도 체자레와 입술을 맞댔던 순간이 생생했다.
뺨을 간질이던 체자레의 속눈썹, 내 것보다 조금 더 체온이 낮았던 입술, 꽃밭인지 독초밭인지 모를 곳에서 한바탕 뒹군 것처럼 아찔하고 매캐한 향. 입을 맞춘 순간 인식되었던 모든 것들이 끊임없이 그 순간을 되새겼다.
“잊어, 미친놈아. 잊어!”
나는 찬물에 서늘해진 손바닥으로 뺨을 철썩 내리쳤다. 아플 정도로 때리고 나서야 정신이 좀 깨는 것 같았다.
“뭐 해?”
나는 불시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운동을 하려 했는지 가볍게 차려입은 마티어스가 뒤에서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입을 가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냥, 잠 좀 깨려고 세수했어.”
“세수만 하면 되지, 뭘 그렇게 아프게 해. 빨개졌잖아.”
마티어스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손등으로 내 뺨을 쓸었다. 어쩐지 마티어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여기도 빨개졌네.”
마티어스가 엄지로 내 미간을 쓸며 말했다. 조금 전 체자레가 문지른 곳과 정확히 일치해, 나는 불에 닿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뭔데?”
내가 한 걸음 떨어지자마자 마티어스의 표정이 단박에 흉흉해졌다.
“어…….”
당황한 내가 주춤거리고 있자 마티어스가 아차 싶었는지 입술을 깨물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한차례 머리를 쓸어 올린 마티어스의 기분은 여전히 안 좋아 보였지만, 표정은 아까보다 덜 험악했다.
“화내려는 게 아니라, 네가 갑자기 피하니까…….”
“그냥, 좀 놀라서 그랬어. 별거 아니야.”
불만스러운 듯 내 미간을 응시하던 마티어스가 이내 나를 꽉 끌어안았다. 소금기가 옅게 섞인 체향에 마음이 물결치듯 울렁거렸다.
“나한테서 도망치지 마. 부탁이니까.”
“……여기 도망갈 데가 어디 있다고 그래.”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부루퉁하게 속삭였다. 마티어스가 무어라 말하려다 말을 멈추고 쓰게 웃었다.
“……그래.”
그때, 저 먼 풀숲에서 무언가가 길게 우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마티어스가 순간적으로 나를 뒤로 숨기며 칼을 빼 들었다. 나도 뒤늦게 칼자루를 잡고 있는데 다시 끼아아아, 소름 끼치면서도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다.
“뭐, 뭐야?”
“여기 있어. 내가 확인해 볼 테니까.”
나는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마티어스를 뒤따라갔다. 셔츠를 쥔 채 옆에 서자 마티어스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았다.
“뒤에 있으라니까.”
“싫어, 같이 가.”
내 말에 마티어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나를 한 번 훑고는 나직이 한숨 쉬며 말했다.
“고집은. 대신 세 걸음 떨어져서 와.”
위험한 상황일 수도 있어 나는 더 이야기하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