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
나는 황당함에 눈을 깜빡였다. 그러니까…… 지금 얘들이 나한테 사과한 거 맞지?
“요, 용서해 주시죠.”
여전히 건방진 말투에 나는 이 사과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표정만 봐도 알겠긴 했다. 그제야 체자레가 했던 말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아, 오늘은 나가서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구석진 데 말고 사람 많은 데서 먹는 게 좋을 거야.’
너 진짜 멋진 녀석이구나, 체자레!
나는 이 끝내주는 호가호위에 감동하고 말았다.
시종 노릇, 할 만한데?
나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무런 반응 없이 음식을 입에 넣으니 델라를 비롯한 그 패거리가 당황해 나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어제 된통 당한 나에겐 이 잠깐의 권세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그들의 낯이 굴욕으로 물들어 있는 것도 제법 즐거웠고.
내가 계속 밥만 먹자 델라의 옆에 있던 패거리 중 하나가 조심스레 내게 말을 걸었다.
“저어…….”
“아야! 어제 넘어졌던 무릎이 너무 아프네…….”
“…….”
그가 다시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고소할 수가 있나. 나는 이 행복을 즐기며 평소보다 느릿한 속도로 식사했다. 그동안 그들은 계속 무릎을 꿇고 있었고, 병사들이 오고 가며 그 장면을 모두 직관했다. 델라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차마 일어날 생각은 못 하는 걸 보니 체자레한테 된통 당하긴 했던 모양이었다.
일 처리 한번 아주 확실하네. 마음에 들어.
나는 체자레를 향한 호감도가 수직 상승하는 걸 느꼈다. 물론 그렇다고 가까이할 놈은 아니었지만.
식사를 마친 뒤 나는 손목을 주물렀다.
“앗, 어제 더럽혀진 옷을 빠느라 손목이 너무 아프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패거리가 흠칫해 나를 올려다보았다. 개중에 눈치 빠른 병사 하나가 나섰다.
“다 드셨다면 제가 씻어 오겠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여기.”
나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식판을 건넸다. 병사가 식판을 받아들고 일어났다. 피가 통하지 않아 다리를 절뚝거리면서도 이 굴욕에서 벗어난 게 못내 기쁜 듯 그는 빛과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무릎을 꿇고 있던 몇몇이 부럽다는 듯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뭐가 미안하다는 건데요?”
나는 다리를 꼰 채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말했다. 병사 하나가 입을 열려고 하자 나는 다리를 들어 제지했다.
“아니, 그쪽 말고. 귀한 델라 아를레르 님이 대답해 보세요.”
나는 아를레르 쪽으로 발짓하며 말했다. 델라의 얼굴이 굴욕감에 터진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제가…… 이안 님에게 괜스레 시비를 걸고 못나게 굴었습니다.”
그는 더듬더듬 자신의 잘못을 늘어놓았다.
“그래서요?”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요?”
“용서해 주세요…….”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변하나. 간밤에 체자레가 뭘 했는지 나는 정말 궁금해졌다. 나는 그 후에도 시간을 끌며 델라를 놀려 먹다가 집합 시간이 다 되어서야 풀어 주었다. 절뚝거리며 집합 장소로 향하는 그들의 초라한 뒷모습이 그렇게 고소할 수가 없었다.
역시 권력이란 좋은 거야.
나는 새삼 권력의 장점을 체감하며 반질반질하게 닦인 식판을 매만져 보았다. 나 같으면 식판에 침이라도 한 번 뱉었겠지만, 아무래도 사고력이 좀 떨어지는 NPC라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겐 다행인 일이었다.
짐을 정돈하고 집합 장소로 가고 있는데 저 앞에 낯설지 않은 머리통이 보였다. 동글동글한 두상에 남들보다 작은 체구. 리로였다. 드디어 만나는구나 싶어 나는 빠른 걸음으로 리로를 향해 다가갔다.
“리로!”
내 부름에 리로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리로의 낯에 꽃이 피어나듯 반가움이 퍼졌다.
“형.”
“드디어 보네. 잘 있었어?”
“네, 안 그래도 아까 형 봤어요.”
“그래? 말 걸지 그랬어.”
“즐거워 보이셔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리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내가 델라 패거리를 놀려 먹던 걸 본 모양이었다. 리로가 목소리를 낮추며 내게 속삭였다.
“워낙 젠체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돼서, 다들 고소해하고 있어요.”
“그래? 걔네 나한테만 그랬던 게 아니었구나.”
조금 심했나 싶었는데 리로의 말을 들으니 더 해 줄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으로 사람을 찍어 누르는 건 ……지만, 이번엔 그들이 먼저 시작했으니까요.”
리로가 들릴 듯 말 듯 한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뭐라고?”
“아니에요. 그런데 형이랑 저랑 줄 다르지 않아요? 계속 여기 있어도 돼요?”
“괜찮아. 시종은 집합 순서가 거의 마지막이라서.”
귀족들의 짐을 정리하고 치워야 했기 때문에 시종의 집합 순서는 거의 제일 마지막이었다. 다행히 오늘은 정리가 빨리 끝나 여유가 좀 있었다.
“참, 이 얘기 하려고 했는데.”
“뭘요?”
“혹시 시종으로 들어올 생각 있어? 자리가 하나 났는데 네가 들어오면 좋을 것 같아서.”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던 나는 돌려 말했다. 뜻밖의 말이었는지 리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요하는 건 아니고, 네가 좀 덜 위험해지면 좋겠어서. 시종이 되면…….”
“할게요.”
“어?”
“하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돼요?”
리로는 면접 직후 토했던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내 팔을 쥐고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무의식중에 잡아서 그런지 손에 힘이 들어가 있어서 팔이 저렸다.
“아파, 임마.”
“아…… 죄송해요.”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리로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그 짧은 사이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걸 리로도 봤는지 미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죄송해요. 아프셨죠.”
그렇게 절박했나. 일반 병사 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보네.
“이젠 괜찮아. 그럼 하고 싶은 걸로 말해 둘게.”
“네, 형. 감사해요…….”
내 눈치를 보며 미안해하는 모습이 꼭 사고 친 강아지 같았다. 나는 리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씩 웃었다.
“나 진짜 괜찮으니까 미안해하지 마. 알았지? 그럼 좀 이따 보자. 간다.”
“네, 들어가세요.”
엎드려 절 받기이긴 했어도 확실하게 델라 패거리의 사과를 받은 데다 리로의 수락까지. 전부 원하는 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집합 장소로 향했다.
* * *
사막 지대와 암석 지대를 지난 우리는 밀림에 들어섰다. 2m는 훌쩍 넘는 길고 날카로운 풀이 빽빽하게 자라 있어 베고 지나가는 데에만 상당한 시간이 들었다.
오후가 되어 뒤를 돌아보자 거대한 뱀이 풀을 밟고 지나간 듯한 형상이 되어 있었다. 저녁 늦게서야 노숙을 할 수 있을 듯한 평원이 나와, 우리는 어제보다 조금 늦은 시간에 짐을 풀었다.
“어? 아무도 없네.”
식사를 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온 나는 혼잣말을 내뱉었다. 테이블 위에 식사를 올려놓고 주위를 살폈다. 깔끔하게 정리된 천막은 텅 비어 있었다. 공기 중에 진한 풀 냄새가 배어 있었다.
오늘도 밖에서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타이밍 좋게 체자레가 천막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온 체자레가 나를 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뭐 해, 거기서?”
“나가서 먹을까 해서요.”
“이젠 그럴 필요 없지 않아?”
체자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침에 있었던 일을 그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자기가 시킨 거니까 당연히 알고 있겠지.
“뭐…… 그렇긴 하죠.”
나도 마주 웃으며 체자레의 맞은편에 앉았다. 포크를 든 체자레가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만족스러웠어?”
만족스럽다마다. 아침의 그 일 이후 다른 병사들은 물론 시종들까지 슬슬 내 눈치를 봤다.
“엄청나게요. 권력이 좋다는 걸 새삼 실감했죠.”
내 말의 뭐가 그렇게 웃기는지 체자레가 킥킥 웃었다. 촛불에 어른어른 비치는 그의 뺨에 약간의 피곤함이 어려 있었다.
“다행이네.”
그 이후 체자레는 이따금 내 얼굴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피곤했나 싶어 나는 더 말을 걸지 않고 식사를 마쳤다.
체자레가 씻고 오는 사이 나는 식기를 세척하고 잠자리를 만들었다. 나는 시트를 씌운 베개를 팡팡 소리 나게 두들겼다. 참 푹신한 것도 베고 자네. 대충 옷을 말아 베개 대용으로 쓰는 나로서는 부러운 물건이었다.
조금만 베고 있을까.
체자레가 오기 전에 원래대로 해 놓으면 되겠지. 나는 고민 끝에 시트에 주름이 지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누였다.
“와, 확실히 편하긴 하다…….”
널찍한 간이침대와 푹신한 베개를 베고 있자니 절로 탄성이 나왔다. 흙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거적때기 비슷한 침낭을 깔고 잤던 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편했다. 확실히 권력이 좋긴 좋아.
누적된 피로가 푹신한 시트에 녹아 사르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시스템 창의 특별 모드를 켜면 HP가 차오르고 있는 모습이 실시간으로 보일 것 같았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한다는 마음과는 다르게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나는 푹신한 베개가 주는 안식에 까무룩 잠들어 버리고 말았다.
* * *
짧은 시간에 깊은 잠을 잔 기분이 들었다.
“우우…….”
일어나자마자 눈도 안 뜨고 기지개를 켠 나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몸이 아주 가뿐했다. 눈꺼풀을 올린 나는 빠른 속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각에 잠겼다.
왜 체자레가 내 옆에서 벗고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