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꿈이었나.’
깬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꿈속 방문자의 목소리와 손길이 현실인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눈을 감은 채 꿈에서 누군가가 지분거렸던 곳을 하나하나 짚어 가며 확인했다. 이마와 머리카락, 귓바퀴와 턱선, 목덜미까지. 다행히 별 이상이 없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새 눈에 익은 건지 날이 밝고 있는 건지 주변 사물들이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다.
잠자리가 낯설어서인지 잠을 푹 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잠들기엔 이미 잠이 너무 깨 버려 나는 새벽 훈련이라도 할 요량으로 밖으로 나왔다.
기지개를 켜며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새벽 공기가 뺨을 스쳤다. 화산 지대라 내내 더울 줄 알았는데 새벽엔 이렇게 시원해지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어차피 마법 훈련은 할 수 없었기에 나는 가볍게 몸을 풀고 검술 훈련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준비 운동을 마치고 달리고 있는데 뒤에서 갑작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머리털이 쭈뼛 섰다. 누군가 발소리를 죽이고 나를 따라오다가 근처에 와서야 일부러 발소리를 내고 있었다. 상당한 실력자임이 분명했다. 누구지. 나는 눈치채지 못한 척 일정한 달리기 속도를 유지했다.
‘이 정도의 실력자에게 원한을 산 적이 있었던가.’
많았다.
“…….”
나는 끊임없이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들을 저편으로 치우며 달리기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그도 똑같이 속도를 높여 나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불안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피다 숲 하나를 발견했다. 나무에 몸을 숨기고 마법을 써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든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이 차 멈춰 선 척하다 전력을 다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상대는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함께 달리기 속도를 높였다. 나를 몰래 뒤쫓았던 게 무색하게 땅이 울릴 정도로 큰 발걸음 소리가 뒤따랐다. 당황스러운 건 상대가 빠른 속도로 나와의 간격을 좁히고 있다는 거였다. 이대로 가다간 붙잡힐 것 같았다. 아직 첫 번째 나무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판사판이다.’
나는 발뒤축을 이용해 빙글 도는 것과 동시에 검을 뽑아 들었다. 어두운 와중에도 선명한 색을 뿜어내는 적발이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나를 스쳐 간 뒤에도 다섯 걸음 정도를 더 뛰다가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뭐 해? 검은 왜 뽑고?”
“마티어스?”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티어스가 황당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너 설마 뒤따라오는 게 나인 줄 몰랐어?”
“내가 어떻게 알아. 말없이 따라오기만 하는데.”
“괜히 가까운 데서 알은체했다간 곤란해질 것 같아서 말 안 했지. 근데 중간에 발소리 냈잖아.”
“발소리만 듣고 너인 줄 어떻게 알아?”
나를 긴장하게 만든 발소리가 자기인 걸 알아차리라고 냈던 발소리라니. 나는 맥 빠지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왜 몰라? 난 네 발소리 아는데.”
“너나 아는 거지.”
“너라서 아는 거야.”
마티어스의 말에 분위기가 갑작스레 달아올랐다. 나는 붉어진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괜스레 신경질을 냈다.
“그래도 앞으론 작게 부르기라도 해.”
“……알았어.”
마티어스가 살짝 시무룩해진 채로 내게 다가왔다. 뛰어서 그런지 그의 체향이 조금 짙어져 있었다.
“그런데 너, 엄청 관심받고 있더라.”
왜 안 물어보나 했다.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야.”
“체자레 시종까지 되고.”
“그러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라고 했다.”
“알아. 그냥 아쉬워서 그렇지.”
마티어스가 나를 제 품 안에 넣고 껴안았다. 내 주변에서 온통 마티어스의 향이 났다. 시원한 불에 냄새가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가 내 머리카락 위로 입술을 붙이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어차피 누구 시종이 될 거였다면 내 시종으로 삼을걸.”
나는 무심코 고개를 올려 마티어스와 시선을 맞추었다. 하늘이 푸른색으로 밝아 오고 있음에도 마티어스의 눈동자는 타협하지 않는 붉은색을 간직하고 있었다. 적나라한 질투와 정도를 모르고 퍼져 나가는 애정에 내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내가 이현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숨 막힐 정도로 짙은 애정을 받고 있자면 항상 그런 생각이 차츰차츰 차올랐다. 그를 실망하게 만드는 게 두려웠다.
“이전 시간에 면접 봤으면 내가 면접관이었을 텐데.”
마티어스는 그것 외에도 불만스러운 게 많은지 내게 말을 끊임없이 쏟아 냈다.
“눈에 안 띄고 싶어서 일반 병사로 지원한 거면서 첫날부터 엄청 눈에 띄더라?”
“타고났나 봐.”
내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자 마티어스가 헛웃음을 지으며 나를 주먹으로 툭 건드렸다.
“참, 나 궁금한 거 있는데.”
“궁금한 거? 뭔데.”
“일반 병사 지원할 때 첫 번째 단계에 무슨 검사대 같은 데를 지나갔었는데, 그거 기준이 뭐였어? 알아?”
“아, 그거. 압실론이 개발한 건데, 그날 올 때 주의 사항에 마법 장신구 착용 금지, 능력 상승 물약 섭취 금지, 신체 주술 금지라고 적혀 있었잖아. 사전 합의된 사람들 외에 그것 중에 하나라도 해당하면 전부 탈락이야.”
어라?
나는 내게 건 주술과 장신구를 떠올렸다. 주의 사항을 듣긴 했지만, 도저히 그것들을 풀 자신이 없었다. 탈락되고도 남았는데 왜 합격했지.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압실론을 떠올렸다. 나는 사전 합의된 사람으로 인식되게 처리해 줬나 보다. 완벽주의 기질이 이럴 땐 좋구나. 아니었으면 꼼짝없이 1단계부터 탈락할 뻔했다.
이제야 수수께끼 하나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합격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탈락하기도 하고, 불합격할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합격하기도 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단순하네.”
“아무래도 황족부터 귀족까지 함께하는 토벌이니까 그런 쪽에서 더 조심스러웠겠지. 명령에 잘 따르는지, 거짓말은 하지 않는지.”
“그런 것치고는 상당히 소모품처럼 사용하던데.”
나는 사막에서 영원한 잠을 자고 있을 그들을 떠올렸다. 내 말에 마티어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건…… 지금은 말해 줄 수 없지만…….”
마티어스가 드물게 말꼬리를 늘리며 곤란해했다.
“아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소모품처럼 사용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솔직히 난 네가 시종이 된 게 싫지만, 일반 병사 무리에 안 껴 있어서 다행이라고는 생각해.”
리젠되는 걸 얘기할 수 없다는 건가. 하지만 병사들이 던전에 들어가는 건 일종의 자동 퀘스트일 텐데……. 어떻게 살아나는 거지? 살아나긴 하나? 아니면 너무 많이 죽였다 살렸다 해서 누군가를 소모품으로 쓰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사라진 건가.
어쩌면 내가 사라졌던 사이 그 대처법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압실론은 플레이어인 나도 못 보는 걸 보는 녀석이었으니까.
“어쨌든 네 성격에 비위 맞추기 힘들겠지만, 체자레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 그럼 적어도 휩쓸려 죽진 않을 테니까.”
별로 안 힘든데. 간신배 짓이야 내 특기라. 하지만 나는 적당히 긍정하기로 했다.
“알았어.”
“날 밝는다. 이제 돌아가자. 내일도 아침 훈련 나올 거야?”
“그래야지.”
“열심이네. 기특하게.”
마티어스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까치집으로 만들었다. 이미 익숙한 일이라 나는 자연스레 머리를 정돈하며 걷기 시작했다.
* * *
아침밥을 가지고 천막에 들어서자, 체자레가 막 씻고 왔는지 목에 건 수건으로 턱에 맺힌 물기를 닦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좋은 아침.”
테이블 위에 그의 밥을 놓은 뒤 맞은편에 내 밥을 놓으려던 때였다.
“아, 오늘은 나가서 먹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네? 나가서 드신다고요?”
“아니, 너만.”
아니, 어제만 해도 같이 먹자며? 나는 황당하다는 듯 체자레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막 씻어 잘난 낯짝으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그래, 윗분들 마음을 내가 어찌 알리.
“네.”
“구석진 데 말고 사람 많은 데서 먹는 게 좋을 거야.”
이건 또 무슨 희한한 명령이래.
나는 아리송한 얼굴로 식사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다른 애들은 다 일반식이고 나만 귀족식이라 부담되는데. 나는 망설이다가 이번만 체자레가 하는 말을 따르기로 했다.
안 따르면 어쩌겠어. 지금은 걔가 상관인데.
괜히 미운털 박혀서 좋을 건 없었다. 밥을 먹는 공터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자 옆에 앉은 사람들이 힐끗힐끗 내 식판을 바라보았다. 볼 형태가 아닌 각 잡힌 식판은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존재감을 뽐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일반식 가져올걸.
나는 민망함에 콧잔등을 긁적였다. 포크로 채소절임을 쿡 찍는데, 내 앞에 그림자가 졌다.
“……?”
앉은 상태로 위를 올려다보니 델라를 포함한 그 패거리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이번엔 또 무슨 시비를 걸려고.
나는 대번에 경각심을 높이며 포크를 꽉 쥐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린다던데, 이 치사한 자식들. 이번에 건드린다면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고 그들의 등에 포크를 찍어 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바로 시비를 걸었던 어제와 달리 그 패거리는 한동안 우물쭈물 말이 없었다.
“무슨 볼일이라도…….”
기다림에 지친 내가 먼저 말을 꺼내자마자 그들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다 하나둘씩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간간이 말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던 공터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죄송합니다!”
……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