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날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곳에서 휴식한다.”
이 암석 지대는 아주 잠깐뿐, 앞은 또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 지대였다. 여기서 휴식하기로 한 건 최적의 선택이었다.
석양이 모래를 오렌지빛으로 물들였던 게 조금 전인데, 바로 새카만 밤이 찾아들었다. 나는 부지런히 천막을 치고 그 안에 침대와 갖가지 용품들을 설치했다. 물론 나를 위한 천막은 당연히 아니었고, 전부 체자레 거였다. 중앙에 작게 모닥불을 피우자 살풍경했던 공간이 조금 따스해 보였다. 회의를 끝내고 들어온 체자레가 안을 둘러보더니 작게 휘파람 소리를 냈다.
“깔끔하네. 고마워.”
“별말씀을요. 그럼 밥 가져올게요.”
고위 인사들의 밥을 배식받기 위해서는 그들의 간이 신분 패가 필요했다. 나는 체자레의 것을 집어 들어 빙빙 돌리며 천막을 나왔다. 밖은 천막을 설치하는 사람들, 정비하는 사람들, 요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어린아이 키만 한 솥 안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빨간 스튜를 보자니 절로 군침이 돌았다.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리로가 보였다. 혹시나 했는데 잘 살아 있었구나.
“리로…… 윽.”
“뭐 해? 앞이 비었잖아. 앞으로 가.”
리로를 부르며 손을 휘젓고 있는데 뒷사람이 내 뒤통수를 때리며 말했다. 나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앞을 보았지만 앞사람은 고작 반걸음 정도 앞서 있을 뿐이었다. 도끼눈을 뜨고 뒷사람을 노려보는데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 눈에 띄었다.
흉악한 얼굴에 비해 고운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뭐였지…….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꼬리를 늘였다.
“으으음…… 이름이…… 릴리 오롤롤로?”
“델라 아를레르다!”
아, 그렇구나. 나는 속이 시원해 손뼉을 쳤다가 다시 기분이 나빠져 퉁명스레 말했다.
“뭐 이 정도 거리로 사람 머리를 때려요?”
“방해가 되잖아.”
“입은 뒀다 뭐에 쓰는데. 장식이냐?”
결국 참지 못한 내가 반말을 하며 성질을 내자 뒤에 있던 델라의 따까리가 나와 소리쳤다.
“무엄하다. 예를 갖춰라!”
“다 같은 병사끼리 예는 무슨 예야. 그리고 얘가 먼저 반말했잖아.”
“병사라고 다 같은 병사인 줄 아느냐. 아를레르 님으로 말하자면…….”
“조제, 그만해.”
의외로 델라가 조제라고 불린 남자의 말을 제지했다. ‘왜지?’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델라가 주변 눈치를 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저녁밥을 먹는 시간대라 우리 주위에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기사를 비롯한 귀족과 왕족도 있었다. 아마 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들어가는 게 싫었던 모양이었다. 조제도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헛기침을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사이 내가 밥을 받을 차례가 됐다. 다음에 두고 보자 생각하며 나는 그들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델라를 포함한 일행들의 얼굴이 모욕감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 저……!”
나는 잽싸게 앞으로 가 종이를 들고 있는 취사병에게 체자레와 나의 신분 패를 내밀었다. 취사병은 내 신분 패만 뒤집어 확인하고는 종이에 체크했다. 그리고는 다른 편에 있는 막사를 가리켰다.
“윗분들 식사는 여기가 아니야. 저기서 받으면 된다.”
“엇, 네.”
식기를 들고 옆으로 가니 다른 취사병이 나무로 만든 볼에 스튜를 담더니 큼직한 검은 보리빵 하나를 퐁당 담가 주었다. 나는 볼을 들고 다시 맞은편 막사의 안부터 밖까지 이어진 줄의 맨 뒤에 섰다. 일반 병사 배식을 받으며 오래 기다려서인지 기다리는 이들은 예닐곱 명에 불과했고 그 줄조차 빠르게 줄었다. 시종도 간혹가다 보였지만, 귀족으로 보이는 듯한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시종을 데려온 귀족들은 거의 없는 듯했다.
체자레 이 자식도 예전엔 시종 없이 잘만 다녔었는데. 마음에 들어서 꼬시려고 잠깐 시종을 고용한 적은 있어도.
“……어라?”
나는 알 수 없는, 아니, 알고 싶지 않은 불안감이 돋아나는 걸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순식간에 소름이 돋은 팔뚝을 문지르며 나는 취사병의 앞에 섰다.
확실히 고위 인사들의 식사는 일반 병사용 식사보다 때깔이 훨씬 좋았다. 볼에 주는 우리 것과는 달리 식기도 식판 형태였고, 반찬도 가짓수가 훨씬 더 많았다. 꿀을 지그재그로 뿌린 흰 빵과 옥수수수프, 뿌리채소찜, 새콤한 드레싱을 뿌린 과일샐러드. 군침을 삼키던 나는 체자레가 부탁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맞다. 두 명분 달라고 하셨어요.”
취사병은 군말 없이 한 명분의 식사를 더 내주었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가져가느냐였다. 손은 두 개인데 식판은 세 개니 이게 문제가 됐다. 볼 위에 식판을 얹기엔 보리빵이 지나치게 컸고, 식판 위에 볼을 얹자니 체자레의 음식이 찌그러질 게 걱정이 됐다. 체자레가 쪼잔하게 뭐라고 할 것 같진 않지만, 과거의 일을 떠올려 보니 왠지 책잡힐 일은 하나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결국 나는 볼을 머리에 얹고 식판을 양손에 든 채 걷기 시작했다. 그런 내가 불안해 보였는지 취사병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안심하라는 의미로 한 번 웃어 보이곤 막사를 나섰다.
수련을 꾸준히 해 와서 그런지 다행히 걷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체자레의 막사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누군가 뒤에서 내 오금을 찼다.
“어어……!”
무릎이 꺾이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 와중에도 식판은 엎지 않으려 힘을 줘 막았지만, 머리에 있는 볼이 기울어지는 것만은 막을 수가 없었다. 한 김 식긴 했어도 여전히 뜨끈하고 끈적거리는 스튜가 셔츠와 바지를 엉망으로 물들였다. 뒤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웃은 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일어나 그들을 노려보았다. 델라 패거리. 사막에서 잠들어야 할 놈들은 이런 놈들이었는데.
“버릇없이 군 대가다. 다음에는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델라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떠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재미있어하는 사람도 있고, 쯧쯧 혀를 차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뺨에 묻은 스튜를 어깨를 들어 올려 닦아 냈다. 온몸에서 시큼한 냄새가 진동했다. 클린 기능을 사용하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다행히 체자레에게 줄 식판 안의 음식들은 말짱했다. 나는 그 상태 그대로 걷기 시작했다.
막사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상의를 탈의한 채 내게 등을 보이고 있는 체자레가 눈에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간이 식탁에 식판을 내려놓았다.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은 체자레가 나를 뒤돌아보았다.
“저런, 가엾은 꼴이 됐네.”
체자레가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안타까운 듯 말했지만, 체자레는 내가 이런 꼴이 된 게 꽤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제대로 당했나 본데. 어떻게 된 거야?”
“듣고 혼내 주시기라도 하시게요?”
내 작은 불행이 그저 재미있기만 한 것 같아 나는 조금 부루퉁해졌다. 나는 입술을 쭉 빼물고 쏘아붙이듯 물었다. 체자레가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다가왔다.
“못 해 줄 것도 없지. 내 시종이 이렇게 되었다는데.”
체자레의 그림자가 내게 내려앉았다. 딱히 위협한 것도 아닌데 키가 큰 녀석이 다가오자 괜스레 긴장하게 되었다.
“그래서, 누가 그랬지?”
호감도를 올리고 싶은 예전의 나라면 처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제가 넘어진 거예요.’ 이랬겠지만, 지금은 호감도를 여기서 더 올려야 할 이유도 없고, 착하게 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델라 오롤롤로? 뭐 그런 이름이었는데……. 아, 델라 아를레르였던 것 같아요. 걔랑 그 패거리들 전부 다요. 전부터 제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계속 시비를 걸더라고요.”
나는 하나도 빠짐없이 일러 주었다.
“사실 이것도 안 엎을 수 있었는데, 그러려면 식판 하나를 떨어트려야 했거든요. 하지만 저는 체자레 님이 시키신 일을 완벽하게 하고 싶은 마음에…….”
“마음에?”
“그냥 맞았죠, 뭐. 제가 희생한 덕분에 이렇게 스튜 한 방울 묻지 않은 깔끔하고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신 거랍니다. 굳이 이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지만, 체자레 님은 솔직한 걸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 함께 말해 봤어요.”
청산유수처럼 쏟아지는 말을 들으며 체자레는 아주 재밌어 죽으려고 했다. 나는 그런 체자레를 흐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참, 재밌을 것도 없다. 나 없는 황궁이 진짜 심심했나 보다.
“그래, 이렇게 본분을 잘 지킨 시종을 위해 무슨 상을 내려야 할까?”
“걔네들 혼내 주시는 거 아니었어요?”
“그건 이미 내가 해 주겠다고 한 일이고, 하나 더 얘기해 봐.”
뜻밖의 제안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일이지.
사실 내가 체자레에게 부탁하고 싶은 건 하나밖에 없었다.
시종에서 벗어나는 것.
하지만 그 소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의심이나 사겠지. 나는 다른 소원을 말하기로 했다.
“혹시 시종을 한 명 더 들이실 생각이 있으세요?”
“음?”
“일반 병사 시험을 치르면서 친해진 친구가 있는데, 같이 시종으로 있으면 의지도 되고 좋을 것 같아서요.”
오늘 하루를 지내본 결과 일반 병사로 있는 것보다 시종으로 있는 게 훨씬 나았다. 기사나 마법사들은 사막 밑으로 가라앉는 일반 병사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자력으로 생존해야만 했다. 일반 병사를 뽑는 기준이 생각보다는 아주 빡빡하지 않다 싶더니, 탄광 속의 카나리아라 그랬던 모양이었다.
시종도 뭐 별 다를 바가 없었지만, 그나마 나은 건 위치였다. 우리는 던전을 ‘황족(루드비히)-마법사-귀족-기마병-시종-기사-일반 병사’ 순으로 무리 지어 갔는데, 시종이 그나마 기마병과 기사들 사이에 있어서 안전했다.
“나 말고 다른 이들의 시종이라도 괜찮아?”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