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더워…….”
나는 팔랑팔랑 손부채질을 하며 가볍게 투덜거렸다. 뒤에 사람들이 많아 걸음을 늦출 수도 없었다. 발바닥은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리고 무릎은 아파 왔다. 이런 것까지는 구현하지 않는 게 좋았을 텐데. 나는 피로 해소 효과가 있는 물약을 쪽쪽 빨며 마저 걸음을 옮겼다.
던전 안으로 들어가자 제일 먼저 보였던 건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사막이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와 모래바람이 바로 사기를 꺾었다. 시간과 공간이 왜곡된 던전에서는 순간 이동 마법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차근차근 걸어 나가야 했다.
말을 타는 체자레와는 달리 나는 뒤편에서 다른 시종들과 함께 걸었는데, 모래에 발이 푹푹 빠지는 통에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말 뒤에 태워 준다는 거 거절하지 말걸……!
나는 햇볕에 익어 버린 목덜미에 서늘한 손등을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 묵묵히 걷고 있었다. 다들 별로 힘들어 보이지도 않았다.
혹시 내 체력이 제일 약한 거 아니야?
나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차라리 옆에 리로라도 있어서 이야기라도 하면서 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리로는 일반 병사 줄에 있고 나는 시종 줄에 있어서 만날 수도 없었다. 옆에 있는 시종에게 말을 슬쩍 걸어 보았지만…….
“할 말 없으면 말 걸지 마.”
“…….”
까칠해서 대화가 쉽지 않았다. 쉬는 시간만 기다리고 있는데, 불현듯 아주 작고 가는 침을 꽂은 듯한 서늘한 감각이 목덜미에 다가왔다.
“뭐지……?”
나는 걸음을 멈추는 것과 동시에 재빠르게 옆으로 비켜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뭔가 온다, 피해!”
내 말에도 사람들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저 이 더위에 애가 돌아 버렸구나 하는 애잔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외친 이후에도 사막엔 그저 고요한 바람만이 불 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 때문에 지체되고 있잖아. 당장 이리 안 와?”
조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시종 하나가 내게 짜증을 부리며 말했다.
하지만 진짠데. 내 감이 알려 주고 있다고. 이 모래밭은 안전하지 않아.
그때였다. 내 앞의 앞에 있던 시종 하나가 시야에서 훅 사라진 건.
“아악!”
모래 안에서 무언가가 발목을 쥐고 잡아당기는지, 시종은 일어나려고 애썼지만 그의 몸은 점차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았다. 스스스스. 고운 모래가 하강하는 소리가 섬찟하게 들려왔다. 살려 달라는 듯 뻗었던 손마저 오렌지색의 모래 속에 뒤덮이더니 이윽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정말이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고작 3초쯤 지났을까. 옆에 있던 시종들조차 이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었다.
사막의 더위가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온몸이 오싹했다. 만약 내가 이 서늘한 감각을 느끼지 못했더라면,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 내가 되었을 터였다. 내게 핀잔을 주었던 시종조차 얼어붙어 모래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시종들이 우왕좌왕하며 시종이 사라진 곳을 피해 뒷걸음질 치고, 앞에 있던 기사들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이대로 끝인가? 하지만 여전히 목 뒤에 핀을 꽂아 놓은 듯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팔을 교차시키며 기사들에게 뛰지 말라는 걸 알렸다.
내 표시를 알아들었는지 기사들이 멈추어 섰다. 아까처럼 아무도 말을 안 듣는 건 아닐까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도 검지를 대어 보였다. 모두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나는 입 모양으로 말하며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조용히……. 천천히 걸으세요.’
나는 이 몬스터의 정체를 모른다. 하지만 모래 속에 사는 사막 몬스터들의 특징은 대개 거기서 거기다.
시각이 차단된 대신 청각이 뛰어나지.
이 몬스터 역시 발걸음 소리를 듣고 올라온 게 분명했다. 먼저 지나간 사람들도 있는데 왜 이제야 시종이 희생되었냐 하면, 기사와 귀족들로 구성된 앞 팀은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인 듯했다. 말의 발굽 소리가 모래 속의 몬스터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올라왔을 때 말을 탄 이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가고, 우리 팀이 그 자리를 걷고 있었겠지.
나는 고양이가 걷듯 살금살금 사막을 걸었다. 그러자 그 뒤의 사람들도, 그 뒤의 사람들도 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예 신발을 벗고 걷는 이들도 있었다. 부드러운 사막 모래일 뿐인데, 가시밭길을 걷는 듯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팔뚝에 소름이 일었다. 아까와 같은 몬스터들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아. 서넛 정도도 아니고, 분명 두 자릿수였다.
다행히 멀지 않은 거리에 단단한 암석으로 뒤덮인 화산 지대가 보였다. 얄밉게도 귀족들과 기사들은 이미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어렵지 않게 그 네 명을 찾을 수 있었다. 당황한 듯 보이는 마티어스와 웃는 듯 입꼬리가 올라가 있는 체자레, 로브를 뒤집어쓴 채 가야 할 곳을 찾고 있는 듯한 압실론과 무심히 제일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루드비히. 그들이 여유로워 보여 더 열 받았다.
그래도 이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었다.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더워 죽겠는데 왜 천천히 가야 하냐고! 아무도 이유를 몰라?”
꽤 뒤쪽에서 들려왔지만, 내 귀에 꽂힐 정도로 선명하고 큰 목소리였다. 시종들은 아니고, 기사나 일반 병사가 낸 소리인 듯했다. 그는 심지어 몇 번 발을 구르기도 했다. 조용한 사막에 발 구르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이유도 듣지 못한 채 땡볕에서 한없이 느릿느릿 걷고 있으려니 화가 났나 본데, 그는 그래서는 안 됐다.
“아무도 모르냐니……! 뭐, 뭐야?”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바닷물이 지나간 해변에 구멍이 뚫리듯 사막에 동시다발적으로 사람 하나 크기의 구멍 수십 개가 뚫리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그리고 그것들은 곧 사람들을 모래 속으로 데리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우왕좌왕 도망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달리는 대신 빠르게 걷기를 택했다. 눈치 빠른 시종들은 나를 따라 숨죽이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 내 방법은 옳았다. 어느새 나를 앞서 달리고 있던 남자가 사막에서 솟아오른 갈퀴 같은 손에 잡혀 고꾸라졌다. 그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모래에 파묻혀 사라졌다. 나는 그 끔찍한 장면을 보지 않으려 시선을 피하며 오직 앞만 보고 걸어갔다. 긴장감에 토할 것만 같았다. 마법으로 날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통에 그럴 수도 없었다.
5분여를 더 걸어 모래 대신 단단한 대지를 밟은 순간,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참아 왔던 한숨을 내쉬었다. 체자레가 그런 내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제법인걸.”
“하하…….”
남은 이들이 지친 표정으로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었다. 나는 바위에 걸터앉아 단숨에 수통 안의 물을 비워 냈다. 물이 미지근해서 그런지 더 달게 느껴졌다. 나는 마지막 남은 물까지 탈탈 털어 마시고 아쉽다는 듯 쩝, 입맛을 다셨다.
“내 물도 줄까?”
체자레가 제 수통을 흔들며 말했다. 나는 슬쩍 체자레의 상태를 훑었다. 모래가 옷 곳곳에 좀 묻어 있을 뿐, 체자레의 상태는 멀끔했다. 하긴, 말 타고 좀 갔을 뿐인데 뭐가 그렇게 힘들었겠어.
“네, 감사합니다.”
판단을 마친 나는 냉큼 그의 수통을 받아 뚜껑을 땄다. 시종들 몇몇이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말을 꺼내진 않았다. 그리고 날 어이없어하는 사람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마티어스였다. 마티어스는 어색한 걸음으로 다가와 나를 보며 물었다.
“아는…… 애야?”
“말 안 했나요? 재미있어 보이는 애가 있어서 시종으로 들였다고 했잖아요.”
체자레가 텅 빈 수통을 받아들며 재밌다는 듯 빙긋 웃었다.
“아, 그랬었나.”
“네. 보다시피 첫날부터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네요. 장하게도.”
할 말이 없었는지 마티어스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렇게 눈에 띄었는지 나를 책망하는 것도 같았다. 나는 조금 억울해졌다. 사막 몬스터 앞에서는 두 방법밖에 없었다고. 피하거나, 마법으로 싸우거나. 눈에 띄는 건 단연 후자였다. 그래서 전자의 방식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데. 나만 튈 순 없었으니 좀 알렸던 거고.
“대응이 빠르던데, 사막에 살았던 적이 있나?”
지금까지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루드비히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예, 어렸을 때 잠깐 살았었습니다.”
“어느 사막이었지?”
“아티카 사막입니다.”
“아티카의 어디?”
“남쪽의 헤일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세 달 정도 거주했었습니다.”
“이유는?”
“너무 어렸을 때라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막 몬스터의 특징은 어떻게 기억하지?”
아, 이 새끼 진짜 집요하네.
나는 윗분의 물음에 긴장했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남몰래 루드비히를 째려보았다.
“당시 친구들과 어른들 몰래 사막 탐험을 나갔다가 비슷한 몬스터를 맞닥뜨린 적이 있습니다. 그때 나이가 좀 많았던 형이 알려 줘서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는 듯합니다.”
진실을 섞은 거짓말은 다행히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나는 그들과 헤어지고 나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때의 나를 몹시 칭찬해 주고 싶었다.
내 대답이 거침없이 이어지자 루드비히는 더 묻는 대신 나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만 봐라. 닳는다, 닳아.
그때, 연륜이 좀 있어 보이는 기사 하나가 루드비히에게 다가와 말했다.
“일반 병사 중 서른 명이 실종, 4명이 경상에 가까운 부상을 입었습니다.”
루드비히는 그제야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 기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진 루드비히가 망토를 펄럭이며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