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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93화 (93/149)

#93

“…….”

나는 한동안 답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무슨 뜻으로 물어보는 거지? 왜 갑자기 끼어드는 거야.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나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겨우 대답을 내놓았다.

“평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며 평범하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이만 나가 보게.”

……?

뭐야, 지금 나 쫓아내는 거야?

나는 당황해 마지막으로 준비했던 자기 PR의 P도 꺼내지 못한 채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네. 감사합니다……?”

끝을 살짝 올린 감사 인사에 체자레가 배를 잡고 웃었다.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좋겠네.”

체자레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따뜻하고 다정한 말이었지만, 어쩐지 그 말에 한기가 인 나는 한차례 몸을 떨어야 했다.

면접을 하도 요란하게 본 바람에 합격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생각했는데, 이틀 후 나붙은 벽보에는 합격 번호 398번이 떡하니 적혀 있었다.

합격해서 좋긴 하지만, 어쩐지 좀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적당히 존재감 없는 위치에 있고 싶었는데, 눈에 띄어 버린 것 같단 말이지.

그러나 날은 내 마음과 상관없이 빠르게 지나갔고, 어느덧 출발 당일이 되고 말았다.

* * *

“제가…… 뭐요?”

“체자레 님의 시종을 담당하게 되었다고.”

“시종이요? 전 평민인데요?”

“아는 사이가 아니었나?”

“생판 남인데요.”

안내 역할을 맡은 기사 하나가 이상하다는 듯 턱을 긁적였다.

“그런데 왜 그러셨지……. 뭐, 높으신 분들 마음이야 어떻게 알겠나. 그렇다면 그런가 보다 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고 시중만 들면 되네.”

“싫은데……. 바꿔 주시면 안 돼요? 전 병사 일을 하고 싶단 말이에요.”

“위에서 내려온 명령을 난들 어떻게 바꾸겠나.”

기사가 귀찮은 기색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필이면! 왜!

나는 마른세수를 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체자레를 대체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나는 기사에게 바싹 달라붙어 물었다.

“그런데요…… 체자레라는 분, 어떤 사람이에요?”

“싫다더니, 갑자기 그건 왜 물어?”

“아니, 궁금하니까 그렇죠. 싫으나 좋으나 제가 모실 분이라면서요.”

“흠, 그렇긴 하지. 나도 잘 알지는 못해. 폐하가 어느 날 데려오신 손님이라고만 알고 있네. 이번에 토벌도 참여하시는 걸 보니 뭔가 능력이 있으신가 보지.”

“그런데, 저 체자레 님 면접에서 뵌 적이 있는데요.”

“아, 그 면접 때 네가 마음에 드셨나 보군.”

수수께끼가 풀렸다는 듯 남자가 주먹으로 가볍게 손바닥을 내리쳤다.

“그 말을 하려는 게 아니라요. 그분, 세나르도 제국의 황제랑 똑같이 생기지 않았어요? 이름도 똑같고.”

“그래서?”

“사실 체자레 님은…… 세나르도 제국의 황제가 아닐까요?”

어떻게 반응할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기사의 반응을 살폈다. 기사가 눈을 끔뻑이다가 내 등을 찰싹 소리 나게 쳤다.

“예끼, 이 사람아. 농담도.”

“아, 아프잖아요!”

“아프라고 친 거네. 폐하가 바보인가? 주변 사람들이 바보야? 같이 생활한 게 몇 달인데 그 정도도 못 알아보겠어?”

“아니,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도 있잖아요? 폐하한테 안면 인식 장애가 있을 수도…….”

갑자기 기사가 코끼리 앞발처럼 거대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았다. 땀이 밴 손에서는 찝찝한 짠 내가 났다. 기사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런 반역 발언을 할 거면 다른 데서 해 줬으면 좋겠네. 여기서 해서 내 팔자 꼬지 말고.”

“아니, 아, 알았어요…….”

기사가 흉악하게 노려보는 통에 나는 모든 의지를 상실하고 말았다. 어깨를 축 늘어트린 나를 보며 기사가 혀를 끌끌 찼다.

“일반 병사보다야 시종이 훨씬 편할 텐데, 대체 왜 그 자리를 마다하고 싶어 안달이누?”

“몸이 편한 거지 마음이 편한 건 아니잖아요. 잘못 말했다간 모가지 날아갈 수도 있는 자리 아니냐구요.”

“그걸 알고 있으니 다행이네. 거기에서는 부디 오늘 했던 말 같은 건 하지도 말고 아교로 붙인 것처럼 입 딱 다물고 살아가길 바라겠네.”

“아, 네……. 감사합니다.”

기사가 시무룩해진 나를 위로하듯 어깨를 툭툭 쳤다. 하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기사의 안내를 받아 체자레가 있는 황궁으로 향했다. 여길 빠져나가기 위해 안달했었는데, 다시금 내 발로 황궁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착잡한 걸음걸이로 복도를 걸어 체자레가 머무는 방문 앞에 섰다. 노크하자 안에서 체자레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발랄한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

체자레는 한창 짐을 싸고 있었다. 옷과 갑옷, 검과 방어구, 마도구들이 여기저기 늘어져 있어 나는 그것들을 밟지 않기 위해 징검다리를 건너듯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했다. 무언가를 고르는 데 열중하고 있던 체자레가 힐끗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 토벌에서 체자레 님의 시중을 맡게 된 이안입니다.”

“아아, 그래. 이안, 잘 부탁해.”

체자레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체자레의 손을 마주 잡았다. 검을 잡느라 생긴 굳은살이 느껴지는 손이었다. 여기 와서도 쭉 훈련하고 있었나 보네.

“그럼 시종으로서의 첫 번째 일을 맡겨 볼까?”

“여기 있는 것들을 챙기면 되는 건가요?”

“아니. 둘 중에 뭐가 좋을지 골라 줘.”

아무리 봐도 똑같아 보이는 옷 두 벌을 들어 올리며 체자레가 말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둘의 차이점을 찾아보았지만, 다른 게 없어 보였다.

“저어, 둘 다 똑같은 옷 아닌가요?”

“아니, 여기의 무늬가 미묘하게 다르잖아. 이 정도도 몰라서 시종 노릇 어떻게 하려고 그래?”

체자레가 소매 부분의 무늬를 가리키며 빙글거렸다. 그의 말대로 소매 부분의 파도 무늬가 세 줄과 네 줄로 달랐다.

이게 무슨 틀린 그림 찾기도 아니고…….

속으로 툴툴거리던 나는 건수를 잡은 사람처럼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사실 저는 무식하게 자라 와서 이런 쪽에는 문외한이거든요. 지원자를 받으면 이런 일에 능숙한 시종을 구하실 수 있을 텐데, 어떠신가요?”

“괜찮아, 나 무식한 사람 좋아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차마 뱉지 못할 욕을 중얼거렸다.

“옷은 내가 고를 테니까, 잘 개서 가방에 넣어 주기만 해.”

“네…….”

한숨 쉬듯 대답하고 아공간 가방을 열고 있는데 체자레가 갑자기 내 턱을 쥐고 내 얼굴 앞에 제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끔뻑였다.

“왜 이렇게 대답이 힘이 없어? 어디 아파?”

네 시종 하기 싫어서.

……라고 말할 수는 없었기에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침을 안 먹어서 그런가 봐요.”

“흐응…….”

“저기, 이젠 씩씩하게 대답할 테니까 놔주시면 안 될까요?”

나는 볼을 짜부라뜨리고 있는 체자레의 손을 불편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체자레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싫은데.”

그래, 넌 그런 놈이었지. 사람 좋은 척 살살 웃고 있지만 사실 제일 악취미를 가진 건 너였어. 마음에 드는 건 집요하게 괴롭히고 울리고…… 그리고 마지막엔 어떻게 했더라?

나는 지금이라도 마티어스에게 연락해 보직을 변경해 달라고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사이 체자레가 설렁줄을 당겨 시종 하나를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간단하게 요기할 만한 것 좀 가져와.”

“예.”

아니, 이젠 내가 시종인데. 가져와도 내가 가져와야 하는 거 아닌가.

“나도 아침 아직이거든. 같이 먹자.”

“저는 괜찮은데…….”

“여기서 먹는 게 좀 그러면 아예 식당 내려가서 먹을까? 애들도 이것저것 처리하느라 밥 아직일 텐데.”

“아뇨, 여기서 먹는 게 좋아요.”

그 애들이 루드비히와 마티어스, 압실론일 것 같았던 나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가 누구랑 먹는 줄 알아서 그러는 거야?”

“아뇨, 제가 낯을 좀 가려서…….”

“흐음……. 그래, 그럼.”

다행히도 타이밍 좋게 시종 하나가 트레이에 샌드위치와 주스를 들고 들어왔다.

“일단 먹자.”

“예…….”

옷이 잔뜩 쌓인 소파에 어찌어찌 앉은 체자레가 샌드위치 하나를 덥석 베어 물었다. 내가 잔에 오렌지주스를 따라 주자 보답이라는 듯 체자레가 반투명한 종이에 싸인 샌드위치 하나를 던져 주었다.

얼떨결에 샌드위치를 받아 낸 나는 포장을 뜯고 그것을 먹기 시작했다. 신선한 양상추와 상큼한 토마토가 잘 어우러졌다. 간단한 샌드위치여도 황실 주방에서 나온 거라 그런지 음식의 질이 달랐다. 괜히 황실에서 나온 요리사들이 잘되는 게 아니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음식을 만난 나는 허겁지겁 샌드위치를 먹어 치웠다. 힐끗 위를 올려다보자 체자레가 먹던 것도 멈추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보고 있을 줄은 몰랐기에 나는 당황해 샌드위치를 베어 문 채로 정지했다.

“왜? 괜찮아. 계속 먹어.”

“네…….”

하지만 아까처럼 자연스럽게 먹을 수는 없었다. 눈치를 보며 좀처럼 먹지 못하고 있는데 체자레가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불시에 서늘한 손가락이 내 뺨에 닿았다. 툭, 샌드위치가 접시와 테이블 위로 떨어지며 엉망으로 흩어졌다.

“뭐, 뭐, 뭐, 뭐 하시는…….”

“입에 소스가 묻어서.”

“마, 말로 해 주시지 않고…….”

검지에 묻은 소스를 핥으며 체자레가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 편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

그래, 넌 이런 새끼였지.

시종 생활이 순탄치 않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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