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더 넣을 사람 없나?”
마지막 사람이 거대한 주머니 속에 몬스터의 심장을 털어 넣자, 옆에 서 있던 마법사가 마법진을 발동시켰다. 그러자 주머니 밑에 있던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솟아올라 주머니를 둘러쌌다. 눈이 멀 것 같은 빛에 휩싸였던 주머니는 이윽고 없었던 것처럼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대로 제국까지 이동한 건가. 양이 상당히 많았는데 마법사가 실력이 좋나 보네. 나는 힐끗 로브 속 마법사의 얼굴을 훑다 우뚝 멈춰 섰다.
“…….”
로브 속에서 수줍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건 분명 압실론이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짐짓 그를 째려보았다. 대체 황궁 마법사가 이런 잡일을 할 이유가 뭐가 있을까. 일부러 지원했겠지, 날 보려고. 나는 나직이 한숨을 쉬고는 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리로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아는 사이세요?”
“어?”
“저기 마법사님이요. 형 계속 보고 있는데요.”
“그러게. 누구인지 모르는데. 아는 사람이랑 내가 닮았나?”
내 말에 리로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의심을 사고 싶지 않았던 나는 그를 이끌고 이동 마법진으로 향했다.
“가자. 돌아가서 허리띠 풀고 먹고 마셔 보자고.”
내가 리로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이동 마법진 쪽으로 다가가자 압실론의 표정이 대번에 험악해졌다.
미친놈아, 표정 풀어.
그러나 압실론은 표정을 풀 생각이 없었고, 결국 내가 먼저 리로와의 어깨동무를 풀어야 했다. 그제야 표정이 좀 나아진 압실론이 기다렸던 말을 해 주었다.
“통과. 이동합니다.”
* * *
3차 시험인 가상 토벌과 4차 시험인 대련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다. 가상 토벌은 단계별로 몬스터 러시가 일어나 그것을 처치해 나가는 거였는데, 몬스터가 일정 선을 넘어가면 가상 토벌이 종료되고 그 이전 단계로 고정되었다.
나는 미믹이 나오는 1단계와 고블린이 나오는 2단계, 하피가 나오는 3단계, 오크가 나오는 4단계를 통과한 뒤 웨어울프가 나오는 5단계까지 갔다가 너무 많이 간 것 같아 포기했다. 6단계에서 가고일이 나오는 바람에 5단계로 마무리된 지원자들이 많아 4단계인 나는 다행히 적당히 묻히는 선에서 통과할 수 있었다.
3차 시험 이후 이 시험에서는 더 이상의 탈락자는 없고 대련 결과에 따라 5인 또는 10인의 장(長) 자리를 준다는 공지가 올라와 나는 한 번의 승리 후 미련 없이 기권했다.
그리고 오늘은 대망의 면접 날이었다. 입 터는 건 자신 있었기에 별다른 준비를 하진 않았다. 나는 맨 마지막이고, 리로는 나의 앞앞 순번이었다. 리로는 근사한 정장 차림에 머리를 단정하게 묶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고등학교 면접을 가는 학생 같아 좀 귀여웠다. 긴장을 풀어 주려 몇 번 장난을 쳤다가 정색하며 자리를 옮기려 하는 바람에 사과하고 나머지 시간은 얌전히 벽에 머리를 기대어 보냈다.
들어갔던 면접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면접자는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비척비척 퇴장했다. 면접장을 나왔을 때의 사람들 표정을 보는 게 꽤 재미있었는데, 반응이 두 종류로 극명하게 나뉘어서 더 그랬다.
들어가기 전에는 잔뜩 긴장해 있다가 나온 뒤에는 풀려 있는 유형이 있었고, 들어가기 전에는 여유롭다가 새파랗게 질려 나오는 유형이 있었다. 이번에는 전자였다.
대체 면접장 안에 뭐가 있기에. 이 시간대의 마지막 순번이라 그걸 맨 마지막에 알 수 있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396, 입장.”
396번이라는 종이를 쥐고 있던 리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하고 와.”
리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면접장 안으로 들어갔다. 살짝 걷힌 커튼 사이로 빛이 새어 나왔다가 금세 차단되었다. 육중한 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혔다.
끝나고 같이 저녁 먹기로 했는데, 뭘 먹을까나. 아무래도 다시 수도에 안 올 수도 있으니 비싸고 맛있는 걸 먹는 게 좋겠지. 강이 보이는 테라스에서 바닷가재 요리를 먹을까. 음료는 질 좋은 포도주가 좋겠어. 디저트도 잊으면 안 되지. 아침부터 사과잼과 생크림을 얹은 크레이프가 먹고 싶었는걸. 그거 진짜 맛있는데 어떻게 보존 마법으로 장기 보관해 둘 순 없나. 이런저런 상념에 잠겨 있는데 리로가 문을 열고 나왔다. 리로의 안색이 아까에 비해 창백해져 있었다. 그는 내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갔다.
뭐야, 무슨 일 있었나?
걱정이 되었던 나는 리로의 뒤를 쫓았다. 다다음 순번이니까 3분 안에 돌아오면 되겠지.
“우욱.”
밖에 나가자마자 정원 바닥에 엎어지듯 쓰러진 리로는 바로 구역질을 했다. 한 끼도 먹지 않았는지 멀건 액체만 나왔다. 나는 그런 리로의 등을 두들겨 주려 손을 뻗었다. 내 손끝이 등에 닿자마자 리로가 질색을 하며 내 손을 매섭게 쳐 냈다. 당황한 나는 금세 빨갛게 부어오른 손등을 매만졌다.
“어……. 미안, 괜찮아?”
그제야 리로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형?”
“그래, 나야.”
리로는 그제야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냥 좀 긴장했더니.”
그냥 좀 긴장한 게 아닌 것 같던데. 보통 캐릭터들은 그냥 좀 긴장한 거로 이렇게 토하지 않거든. 나는 더 캐물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얘도 뭐 숨기고 싶은 게 있겠지.
“곧 형 차례죠? 들어가 보세요.”
“으응. 그래, 알았어.”
리로가 무언가를 말하려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가려다가 멈춰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할 말 있어?”
“아뇨, 잘 다녀오시라고요.”
“싱겁긴. 알았어. 참, 끝나고 같이 저녁 먹을 수 있겠어?”
“아니요, 죄송해요. 속이 좋지 않아서 저녁은 같이 못 먹을 거 같아요.”
“괜찮아. 밥이야 다음에 먹으면 되지. 몸 잘 추스르고. 조만간 보자.”
“네, 형. 얼른 들어가 보세요.”
영 안심이 되지 않아 나는 몇 번이고 리로를 뒤돌아보았다. 나무 그늘에서 눈을 감고 쉬는 리로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하여간 신경 쓰이게 한다니까.
다행히 내가 대기실에 도착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앞사람의 면접이 끝났다. 리로의 반응과는 달리 내 앞사람은 한결 긴장이 풀린 기색으로 대기실을 떠나갔다.
“398번, 입장.”
나는 크게 호흡하며 대기실 안으로 들어갔다.
“398번입니다. 일반 병사로 지원했습니다. 특기는…….”
면접자 전용 의자에 앉으며 사전에 일러둔 대로 이야기하던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내 앞에는 다섯 명의 면접관이 있었는데, 그중 두 명은 내가 아주 잘 아는 이들이었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은 루드비히와 체자레였으니까.
아니, 너희가 왜 거기서 나와? 루드비히야 이 나라 황제니 백번 양보해서 일반 병사 면접이 궁금할 수 있어도 체자레 너는 다른 나라 황제잖아. 그것도 전쟁 중인 나라.
기가 찼던 나는 눈치 보는 것도 잊고 체자레를 얼빠진 낯으로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눈치챈 체자레가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했다.
“398번이 내가 마음에 드나 본데.”
“죄, 죄송합니다.”
“면접에 집중하게.”
기사단에서 한자리 차지하고 있을 듯한 사람이 내게 핀잔을 주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히 긴 면접에 지쳤는지 루드비히는 내게 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다음 말이 듣고 싶은데.”
“네?”
“그래서 특기는 뭐지?”
체자레가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했다는 듯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나는 입술을 핥으며 달달 외웠던 준비 문구를 떠올리려 애썼다.
“특, 특기는 검술입니다.”
“그래? 병사로 지원한 사람들 대부분이 검술에 자신 있을 텐데, 그중에서도 실력이 출중하다는 건가?”
“아,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미안하다, 아셀! 그때 네가 말 더듬는다고 소리 질러서…….
사람은 긴장하면 식은땀을 흘리고 말을 더듬게 되어 있구나.
“그럼 집안에서 내려오는 검술을 익혔나?”
“아뇨……. 그냥 평범한 집안인데요.”
“그럼 특별한 사람 밑에서 수학했을까?”
“아뇨, 아닙니다. 그냥 평범하게 배웠습니다.”
“그럼 비범한 장소에서…….”
“뒷마당에서 수련했습니다.”
“솔직해서 좋네.”
체자레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솔직한 것 외에는 아무런 장점이 없다는 거였다.
나를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 잘도 웃는구나.
잘난 체자레의 낯짝을 후려치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눈에 띄고 싶지 않았던 나는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 끝을 올리고만 있었다.
애초에 남의 나라 황제가 왜 여기 와서 면접을 보고 있는 거야.
“확실히 아주 뛰어난 한 명의 기사를 뽑는 자리라면, 그 자리와 저는 잘 맞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집안에서 내려오는 검술을 익힌 적도 없고, 유명한 사람에게 검술을 배운 적도 없으니까요.”
나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내 장점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평범하기에 할 수 있는 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범하기에 조직에서 튀지 않고 잘 적응할 수 있고, 따라잡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평범하기에 오히려 조직에 더 잘 적응할 것이다?”
“예. 여기는 명령을 잘 따를 일반 병사를 모집하는 자리니까요. 그 일이야말로 저의 천직이라 생각합니다.”
“그대는.”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고 있던 루드비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루드비히의 말에 나는 물론 주위의 사람들까지 전부 놀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