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90화 (90/149)

#90

“아직 계셨네요?”

자리로 돌아오자 리로가 해먹을 철거하고 있었다. 하루 같이 잤다고 반가운 마음이 들어 나는 나무를 오르며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리로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낡은 천 주머니에 담긴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나무 열매요. 맛있어요.”

천의 입구를 열자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등, 다양한 색과 향을 띤 열매들이 반짝이며 나를 반겼다. 그 안에는 평소에 즐겨 먹던 열매들도 다수 있었다. 나는 체리색을 띤 동그란 열매를 입 안에 쏙 집어넣었다. 즙이 풍부한 열매가 입 안에서 터지며 향긋한 망고 향을 풍겼다.

“고마워요. 새벽부터 이거 따러 다닌 거예요?”

“네, 해먹도 주셨으니까.”

아무래도 리로는 보답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인 듯했다. 이런 고지식함이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껍다면 모를까. 나는 그런 리로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충동적으로 물었다.

“우리 같이 다닐래요?”

내가 그런 말을 꺼낼 줄은 몰랐는지 리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둘이 다니는 게 더 의지 되고 좋잖아요.”

내 말에 리로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제가…… 의지가 될까요?”

물론 별로 안 돼 보이긴 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을 객관화할 줄 아는 리로의 태도도 마음에 들었다.

“그럼요.”

* * *

오후 내내 숲을 돌아다닌 끝에 우리는 오후 무렵 아무도 쓰지 않는 적당한 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간이 오두막을 짓고 천을 깔고 눕자 어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안락감이 몰려왔다. 함께 다니며 알게 된 건데, 리로는 자신 없어 하던 게 거짓말처럼 할 줄 아는 게 많았다. 먹을 수 있는 열매와 버섯을 찾아내는 것부터 발자국을 보고 그 주인을 파악하는 능력과 추적하는 방법, 그리고 그 몬스터를 찾아내 숨통을 끊는 능력까지. 그 외에도 뚝딱뚝딱 집도 잘 만들고 센스도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일행 하나는 잘 구한 것 같단 말이지.

어제 그 델라 같은 녀석을 열 트럭 갖다줘도 리로 하나에 댈 게 아니었다. 게다가 리로는 꽤 공정하기까지 해 나는 우리가 힘을 합쳐 잡은 고블린의 심장 반쪽을 가질 수 있었다.

반쪽도 쳐 주려나.

나는 심장이 담긴 주머니를 달랑거리며 생각했다. 뭐,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합격하는 게 목표니까. 이런 식으로 몰아가며 하루에 한두 마리씩 잡아 최종적으로 열 마리 분의 심장만 가져가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나의 소박한 꿈은 저녁 무렵, 리로가 꺼낸 말로 인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오크 왕의 심장을 가져가 볼까 싶어요.”

넌 무슨 그런 말을 시장에서 사탕 사듯 말하니…….

“진심이야?”

그사이 말을 놓게 된 나는 기가 찬다는 듯 물었다.

“네.”

“그 오크 왕을 죽이려면 이 산맥의 모든 오크들을 상대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건 알지?”

오늘 우리는 숲을 탐색하다가 오크 세 마리를 발견했다. 멧돼지처럼 생긴 얼굴에 이족 보행을 하는 오크들은 조악한 갑옷을 착용하고 메이스를 든, 아주 전형적인 모습을 띠고 있었다. 내 실력이면 해치우지 못할 건 없었지만, 문제는 오크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는 거였다.

오크는 지능이 고블린보다 조금 높은 정도지만, 여성체인 왕을 중심으로 집단으로 활동하며 생존력을 비약적으로 높여 왔다.

우리는 그들을 처리하는 대신 뒤를 밟아 오크들의 마을을 찾아냈다. 그 마을에는 적어도 200마리가 넘는 오크들이 살고 있었다.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산맥에서 오순도순 잘 살아가면 모르겠지만, 머리가 나빠 농사를 짓는 법이나 도구를 만드는 법을 모르다 보니 오크들은 인간들이 사는 마을로 내려가 약탈하기 일쑤였다. 지능이 아니라 힘 스탯에 전부 투자한 종족의 생존법이었다.

토벌해야 함이 옳았지만, 우리 둘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하지만 리로는 진심인 듯했다.

“저는 그 토벌단에 들어가야만 해요. 그러려면 확실한 성과를 내야겠죠.”

“이유를 물어봐도 돼? 왜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거야?”

물론 평민이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긴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지.

우리는 서로를 탐색하듯 눈을 마주했다. 이윽고 리로가 무겁게 입을 뗐다.

“죽이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드래곤인가. 아니면 그 하수인에게 가족이라도 잃었나.

더 무거운 주제로 가고 싶진 않았던 나는 이쯤 하기로 했다.

“곤란하시다면 저는 이대로 헤어져도 괜찮아요.”

리로는 단호했다. 혈혈단신으로라도 쳐들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골치가 아팠다. 나는 난처함에 이마를 감싸 쥐었다. 차라리 오늘 오크 마을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니, 그냥 오크 세 마리만 처리하고 말았더라면. 하지만 일은 이미 일어났고, 과거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나는 리로가 제법 마음에 들었고, 그가 여기서 죽게 두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이건 내가 어느 정도 생존할 자신이 있어서기도 했다.

요는 그 무리에게 들키지 않게 왕의 심장을 취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 과정에서 나를 공격하는 오크들의 심장만 채취해도 통과일 테고. 고민을 거듭하다 보니 리로의 생각이 퍽 괜찮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나는 짝, 손뼉을 치고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내 말에 리로가 차분히 내게 귀를 기울였다. 새로운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 * *

7일 차 새벽, 우리는 오크 마을 근처의 큰 나무 위에서 그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의 계획은 간단했다.

호위의 빈틈을 노려 오크 왕을 처치한다. 그리고 왕을 잃은 오크들이 날뛰기 전 산맥을 빠져나온다.

안타까운 건 인간들이 이 산맥을 들쑤시고 다녀서인지 오크들이 다들 긴장하고 있다는 거였다. 사흘째부터는 호위가 늘어나기까지 했다. 그래도 완전하지는 않았다. 오후 다섯 시와 오전 다섯 시 무렵 호위들의 교체가 이루어지며 일시적으로 호위가 느슨해지는 때가 있었다. 우리는 날이 희미하게 밝아 와 방심하기 쉬워지는 오전 다섯 시에 오크 왕을 암살하기로 했다.

다섯 시 십 분 무렵이 되자 호위들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 눈짓을 한 뒤 재빠르게 나무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무 밑에는 며칠 전부터 파 둔 개구멍이 있었다. 우리는 주위를 살피며 재빨리 개구멍 속으로 몸을 들였다. 구멍을 통과해 마을 안쪽으로 들어온 우리는 흙을 털 새도 없이 오크 왕의 집으로 달려갔다.

“……!”

내구도가 다해 있었는지 손을 짚자마자 낡은 벽이 파스스 부서져 떨어져 내렸다. 벽돌 부스러기가 바닥의 철제 무기와 부딪혀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우리는 숨을 멈추고 한껏 경계를 높였다. 다행히도 아무도 듣지 못한 듯했다. 우리는 옆에 있는 상자를 차곡차곡 쌓아 그것을 밟고 위로 올라갔다. 지붕의 철골을 디디며 앞으로 나아가던 리로가 굴뚝을 잡고 멈추어 섰다.

그는 재빠르게 굴뚝에 넝쿨을 감은 뒤 그걸 자신의 몸에 묶었다. 굴뚝을 타고 내려가는 리로의 손에는 날카롭게 간 검이 들려 있었다. 나는 넝쿨을 쥔 채 리로가 신호를 보내기를 기다렸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신호를 안 주지.”

나는 걱정스레 혼잣말했다. 들어간 지 꽤 된 것 같은데 안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사이 저 멀리서 동이 터 오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닌가. 나도 내려가 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누군가의 날카로운 외침이 고요한 마을에 울려 퍼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려 보니 오크 전사 하나가 나를 발견해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취이익, 인간! 습격이다!”

젠장.

나는 낮게 혀를 찼다. 오크 전사의 외침에 나머지 오크들이 웅성거리며 문을 열고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잡고 있던 넝쿨을 마구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쪽에서 넝쿨을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넝쿨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내 힘에만 의지해 올라오는 것은 아니었기에 올라오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 왜 그래?”

조금 전만 해도 멀쩡했던 리로의 온몸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나는 당황해 물었다.

“도망칠 수 있겠어?”

“네, 이거 제 피 아니에요.”

“그럼 뛰자!”

우리는 오크들의 추적을 피해 지붕과 지붕 사이를 달렸다. 뭉툭했지만 녹슬어 있어 맞으면 바로 파상풍일 듯한 철제 화살들이 우리를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는 않았다 보니 계속해서 움직이는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맞추긴 힘든 모양이었다.

펑!

때마침 여기 오기 전 설치해 둔 폭탄 달팽이 껍데기들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굉음을 냈다. 우리를 쫓던 일부 오크들이 우왕좌왕하며 소리가 난 쪽으로 반절 정도 흩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주로의 반대 방향뿐만 아니라 나머지 서, 북 방향에도 하나씩 설치해 놓는 건데. 나는 뒤늦게 아쉬워했다.

쐐애액!

지붕이 깨지며 다리 한쪽이 집 안으로 푹 파고들었다. 그사이 머리 위로 화살 하나가 위협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지붕이 깨지지 않았다면 뒤통수에 그대로 화살이 박힐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사실 실드를 걸어 놓고 있어 그런 암담한 상황까지는 안 갔겠지만, 솔직히 쫄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저거 뛰어넘자.”

나는 침입을 막기 위해 사금파리를 잔뜩 박아 놓은 담벼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그럼, 간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지붕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위태로운 자세로 착지하는 것과 동시에 챙, 사금파리가 발밑에서 깨지는 소리가 났다. 우여곡절 끝에 2m 정도 되는 담에서 뛰어내린 우리는 몇 번 풀숲을 구르다가 바로 다시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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