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89화 (89/149)

#89

“뭐, 뭐야!”

남자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내 멱살을 잡았던 남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또 너냐.”

“저도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거든요?”

“꺼져. 여긴 이제부터 우리 자리다.”

“아니, 언제부터요?”

“이제부터지.”

남자가 내 얼굴을 밀어 내며 나뭇잎을 헤치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지은 간이 오두막을 봤는지 입가에 기분 좋은 웃음을 띠었다.

“네가 지은 오두막은 우리가 잘 써 주지.”

나는 나를 둘러싼 아홉 명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마법을 쓰면 해치우지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어디에 감시자가 있을지 몰랐다. 나는 마티어스가 슬쩍 흘려 준 말을 떠올렸다.

‘공정성을 위해 감시자가 곳곳에 숨어 있을 거야. 섣부르게 마법을 쓰지 않도록 조심해. 알아서 잘하겠지만.’

이중에도 있으려나. 나는 한숨을 쉬며 다시 가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칼을 내리쳐 반나절 내내 만들었던 간이 오두막을 망설임 없이 부수었다. 패거리들이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재활용도 불가능하게 오두막의 잔해들을 작신작신 밟아 놓았다.

“뭐 하는 짓이냐!”

“내가 만든 거 내가 부쉈는데요, 왜.”

나는 부루퉁하게 대답하고는 미끄러지듯 나무에서 내려왔다.

“이런 건방진……! 너 혹시 이분이 누군지 모르는 것이냐?”

전형적인 간신배처럼 생긴 남자 하나가 내 멱살을 잡았던 남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상태 창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분은 아를레르 자작가의 삼남, 델라 아를레르 님이시다! 예를 갖춰라.”

작위도 못 받는 자작가 삼남한테 굳이 예를 갖출 필요가 있나……? 일반 전형으로 들어온 걸 보면 유명무실한 가문일 것 같은데.

추종자들이 많은 거로 보아 상인 가문인가. 명예는 없고 돈만 있는 그런 가문인 듯했다.

“그렇군요. 이름이 예쁘네요.”

그 말이 콤플렉스였는지 델라가 다시금 내 멱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나는 한 걸음 옆으로 빠지며 그의 목에 검을 들이댔다. 델라의 하얀 목에 날카로운 검 끝이 닿았다. 델라와 추종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거, 멱살 좀 그만 잡읍시다. 비싸요, 내 멱살.”

“뭐 하는 짓인가! 당장 검을 내려라!”

“먼저 공격해 왔는데, 이 정도는 애교 아닌가?”

나는 투덜거리며 검을 내렸다. 하지만 집어넣지는 않고 있었다. 분위기가 단박에 흉흉해졌다. 델라의 시선에 호기심이 어렸다.

“너, 괜찮은 실력을 가졌군. 배짱도 있고.”

“갑자기 웬 칭찬?”

“무례하다!”

“아몬, 잠시만.”

델라가 손을 들어 추종자들을 제지하더니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 밑으로 들어오지 않겠나?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해 주지.”

델라는 진심인 듯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격 떨어져서 싫어요.”

델라와 그 추종자들의 얼굴이 붉은 물감을 칠한 것처럼 시뻘겋게 물들었다.

“이 시건방진……!”

“기고만장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구나!”

심지어 나랑 만났는데 뱉는 문장들도 어째 좀 고전적이고. 발전이 없네, 발전이.

나는 산등성이 너머로 가라앉고 있는 해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저기, 괜히 싸움으로 힘 빼지 말고 빨리 오두막이나 지으세요. 해 지잖아요.”

내 말에 뒤를 돌아본 남자들이 뒤늦게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산맥의 낮이 동물들의 것이라면 밤은 몬스터들의 것이다. 바닥에서 자다가 거대한 몬스터의 발에 밟혀 객사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괜히 내가 나무 위에 간이 오두막부터 지은 게 아니었다. 그제야 남자들이 나무를 줍고 장작을 패며 부산을 떨기 시작했다. 델라만이 가만히 멈추어 서서 나를 노려보았다.

“그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다.”

“어떻게 후회하게 될지 정말 궁금하네요.”

나는 마지막까지 델라를 살살 긁어 놓고 유유히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 * *

“하아, 역시 그 나무가 딱이었는데.”

나는 어스름이 내려앉은 숲에서 나무를 매만지며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나무가 있다 싶으면 이미 전부 주인이 있었다. 쫓아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면 놈들이랑 똑같은 사람이 될 것 같아서 관뒀다. 정처 없이 숲을 걷던 도중 나는 기적같이 적당한 크기의 나무 하나를 발견했다. 위를 올려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하늘이 돕는구나.”

나는 킬킬거리며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나무에 막 손을 뻗는데 거의 동시에 다른 녀석이 나무 옆에 손을 댔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옆을 돌아보았다. 아까 보았던 마지막 통과자가 보였다. 녀석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난감하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산맥에 밤이 찾아온 지 오래였다.

“내가 더 빨……!”

내가 더 빨리 손댔다고 치사하게 나가려는데, 녀석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입 다물라는 거야, 뭐야? 인상을 쓰고 있는데 녀석이 위를 가리켰다. 올라가라는 뜻인 듯했다. ‘왜 저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녀석이 먼저 올라갔다. 거미가 기어가듯 얇고 긴 팔다리로 등반하는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자, 반쯤 올라간 녀석이 나를 보며 다급하게 손짓했다.

얼떨결에 나도 뒤따라 나무를 올랐다. 뭐 때문에 재촉을 했는지 알 수가 없어 밑을 내려다보려는데, 녀석이 검지로 입술 위를 지그시 누르며 내 머리 위로 초록색 열매를 터트렸다. 열매가 터지며 쓰디쓴 풀 냄새가 나는 끈적한 액체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뭐 하는…….”

녀석은 급기야 열매의 액체가 묻은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그 액체는 냄새만 쓴 게 아니라 맛도 더럽게 썼다. 녀석이 나를 보다가 조용히 밑을 눈짓했다. 내려다보자 웨어울프 성체 수십 마리가 떼를 지어 지나가고 있었다. 3m가 넘는 몸체에 내 중지보다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놈들이었다. 확실히 처음부터 이런 놈들을 상대하려면 힘들긴 했겠네. 어찌어찌 처치한다고 해도 울음소리나 피 냄새를 맡고 더 엄청난 놈들이 몰려올 수도 있었다. 이 끈적한 액체를 부은 이유는 쓴 풀 냄새로 녀석들의 후각을 차단하려는 거였겠고.

그런데…… 왜 날 도와줬지?

나는 녀석을 오랫동안 응시했다. 녀석도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나와 눈을 마주했다. 웨어울프들이 지나가고 녀석이 품속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꺼내 내게 보여 주었다.

“이걸로 돈은 갚은 겁니다.”

나는 녀석이 꺼낸 동화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델라와 동전 내기를 했다가 그가 땅바닥에 동전을 내던졌었는데, 그걸 주운 모양이었다.

그냥 입 닦고 모른 척할 수도 있었는데 안 그러는 걸 보니 착한 녀석인 듯했다.

“하하. 네, 그럼요. 제 이름은 이안입니다. 그쪽은……?”

“리로입니다.”

“리로 씨, 이름 예…….”

이름이 예쁘다고 말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조금 전 델라의 이름을 칭찬했다가 오히려 비호감을 샀던 게 생각이 나서였다.

“예, 예스럽고 좋네요.”

“그런가요.”

“하하, 네.”

리로는 그다지 말이 많은 편이 아니었다. 주변의 공기가 금세 숙연해졌다.

“그나저나 이제 잘 나무를 좀 찾아봐야 할 텐데, 어디가 좋을까…….”

“밤도 늦었는데 오늘은 여기서 보내시죠.”

“그래도 되나요?”

“네, 나무도 넓으니까요.”

그렇게 넓진 않은 것 같은데……. 나무를 둘러보던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그럼 오늘만 좀 신세 질게요.”

낮이었다면 오두막을 지었겠지만, 한밤중에 큰 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나는 가방에서 해먹 두 개를 꺼내 리로에게 하나를 건네주었다.

“저 주시는 건가요?”

“네, 전 하나 있거든요.”

나는 손쉽게 가지와 가지 사이에 해먹을 설치했다. 해먹에 누워 상태를 점검하는 나를 리로가 빤히 바라보았다.

“능숙하시네요.”

“몇 번 해 본 적 있거든요.”

나를 칭찬하는 리로 역시 해먹을 설치하는 게 서투른 기색은 아니었다. 각자 해먹을 건 가지가 꽤 떨어져 있어 대화를 나누기엔 부적절했다. 나는 해먹에 누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숲 어디선가 불빛이 이따금 어른거리며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저러면 안 될 텐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불빛이 나는 쪽에서 사람들의 비명과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점차 사그라드는 비명을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게, 안 된다니까.

* * *

사람들의 비명과 잠자리의 불편함으로 몸을 뒤척이다 새벽녘에야 잠이 든 나는 정오 직전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리로가 있던 자리로 시선을 옮겨 보았지만, 해먹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떠난 건가? 그렇다면 해먹을 가져갔을 텐데.

해먹은 마티어스가 준비해 준 것으로 꽤 고급이었다. 나는 리로의 단출한 차림새를 떠올리며 그가 이걸 두고 가진 않았을 거라 확신했다. 나무에서 내려간 나는 어제 봐 두었던 샘터로 향했다. 사슴 한 마리가 물을 마시고 있다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바로 도망쳤다. 나는 고개를 숙여 목을 축인 뒤 얼굴과 목을 깨끗이 씻었다. 끈적한 열매의 즙이 그새 수액처럼 굳어 있어 씻는 데 꽤 오랜 시간이 들었다. 클린 기능을 쓸 수도 있겠지만, 어디선가 보는 눈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셔츠를 끌어 올려 얼굴을 닦고 주변을 탐색했다. 간밤의 잔해들이 눈에 띄었다. 피에 젖은 둥치와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찢긴 셔츠. 타다 만 장작이 있는 거로 보아 급하게 불을 끄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겠지. 그들을 잡아간 건 짐승이었을까, 몬스터였을까. 아무튼 어둠 속에서 빛을 쫓는 자들이었을 터였다. 햇살이 쏟아지는 숲이 아름다워 그 광경이 더 잔혹해 보였다. 나는 무심히 그 풍경을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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