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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84화 (84/149)

#84

“뭐 해?”

내가 기가 찬다는 듯 묻자 마티어스가 머쓱하게 뒷덜미를 긁으며 다가왔다.

“그냥, 나도 목욕이나 할까 싶어서.”

“그래, 해.”

나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내가 자리를 비켜 주자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목욕은 핑계고 나한테 볼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할 말이라도 있어?”

최근 시도 때도 없이 입을 맞춰 대는 통에 나는 경계하듯 한 걸음 물러서서 물었다. 마티어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어깨에 힘을 주고 물었다.

“……너, 나랑 안 갈 거야?”

“어딜?”

“수도.”

“……아.”

간밤의 쪽지 때문에 정신이 없어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빠져나가려면 무인도가 나으려나. 아니, 압실론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면 수도가 나을 수도 있는데. 아직 상세한 탈출 방법이 나오지 않아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꼭 지금 대답해야 해?”

내 물음에 마티어스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렇게 둘이나 장기로 수도를 비울 순 없어. 적어도 한 명은 사흘 안에 돌아가야 해.”

“아…….”

“그래서 어제 압실론 놈이랑 얘기를 좀 해 봤는데, 자긴 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여기 있겠다고 해서…….”

아하. 그래서 마티어스가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됐구나.

마티어스가 조심스레 내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시무룩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랑 같이 가면 안 돼? 내가 정말 잘할 테니까…….”

“…….”

이렇게 귀엽게 비굴하다니. 반칙이었다.

아무래도 얘는 내가 뭐에 약한지 알아챈 듯했다. 이런 점이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면서도 영영 멀어질 수는 없었던 이유였지.

“생각 좀 해 볼게.”

지금 결론 낼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나는 닦은 몸 위로 옷을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혹시.”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걔가 마음에 들어?”

“엥? 누구?”

“……압실론 말이야. 그래서 나랑 안 가고 걔랑 있으려고 하는 거 아니야?”

하도 어이가 없어서 뒤돌아보자 마티어스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기가 말을 꺼내 놓고도 쪽팔린지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보자니 참……

이상한 데서 귀엽단 말이야.

예전부터 마티어스는 질투심이 좀 있었다. 독점욕이 강하다고 해야 하나. 자기가 모시고 존경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루드비히한텐 안 그러면서 압실론한텐 유독 질투가 많았다. 체자레야 이래도 흥 저래도 흥이라 질투심을 내보이기엔 좀 그렇다고 생각한 듯했다.

온몸이 흉기인 놈을 귀엽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좀 갑갑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떡하겠어. 귀여운데. 나는 사자를 귀여워하는 양이 된 기분이었다.

이 녀석을 놀릴까 어쩔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띠링 소리와 함께 시스템 창이 떴다.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1. 열기 2. 닫기]

“나 좀 바빠서, 나중에 얘기하자!”

“어? 야!”

뒤에서 마티어스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무시하고 갈 길을 갔다. 오늘이야말로 이 GM을 살살 구슬려 모든 얘기를 듣고야 말겠어. 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빠른 걸음으로 호숫가를 빠져나왔다.

* * *

방해받지 않으려 나무 위로 올라간 나는 가지에 기대어 쪽지함을 열었다. 그러나 쪽지에는 단서가 될 내용은 없고 웬 링크만 달랑 있었다. 척 보기에도 수상쩍기 그지없어 나는 잠시 망설이다 그 링크를 눌렀다. 그러자 쪽지함의 시스템 창에 수 초간 로딩 표시가 뜨더니 세로로 긴 텅 빈 창이 하나 떴다.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가 손 밑에 딸린 키보드로 아무거나 쳐서 엔터를 누르자 창이 올라갔다.

[‘나’ 님이 들어왔습니다.]

[나: ㅁㄷㅈ]

[나: ?]

[나: 채팅 창인가?]

계속해서 새로운 창을 띄워 메시지를 주고받아야 하는 쪽지함과는 다르게 이 창에서는 마치 채팅하듯 실시간으로 바로바로 메시지가 떴다.

[‘GM’ 님이 들어왔습니다.]

[GM: 바로 오셨네요? คʕ•ﻌ•ʔค]

GM의 해맑은 표정에 밤새 눌러 놓았던 살의가 다시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꾹꾹 참고 답장을 했다.

[나: 채팅 창 직접 만드신 거예요?]

[나: 능력 좋으시네요.]

[GM: 하하, 제가 좀 그렇습니다. คʕ•ﻌ•ʔค]

아무래도 GM은 칭찬에 약한 타입인 듯했다. 나는 본론에 들어가기 전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파악했다.

[나: 그래서 제가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이 뭔가요?]

그가 누구인지도 궁금했지만 자잘한 대화로는 유의미한 단서를 얻어 내기 어려웠다. 게다 곰돌이 이모티콘이 보일 때마다 화를 참지 못할 것 같아 나는 결국 직구를 던졌다.

[GM: 아, 그거.]

[GM: 의외로 간단해요. คʕ•ﻌ•ʔค]

[GM: 아직 전쟁 중이죠?]

[나: 네…….]

[GM: 전쟁을 멈추면 돼요. คʕ•ﻌ•ʔค]

“…….”

나는 끓어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애꿎은 나뭇가지에 주먹을 날렸다. 나뭇가지가 우지끈 부러지며 놀란 새들이 하늘로 포르르 날아올랐다. 가슴과 뺨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는 걸 보니 화병인 듯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화를 내리누르며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나: 전쟁 중이 아닌 구역에서 로그아웃하면 된다는 건가요?]

“말이 왜 이렇게 느려.”

나는 조급한 마음에 다리를 덜덜 떨다가 마저 채팅을 쳤다.

[나: 죄송한데 좀 더 빨리 답장해 주실 수 있나요?]

[GM: 아, 제가 곰돌이 이모티콘을 하나하나 만들고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려요. คʕ•ﻌ•ʔค]

“진짜 미친 새끼 아니야?”

[나: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그건 생략하는 게 어떨까요?]

[GM: 중요한 게 아니라뇨. 이건 제 정체성인데……. คʕ•ﻌ•ʔค]

[GM: 하지만 이현 씨의 말도 일리가 있으니 생략해 보도록 할까요.]

“…….”

[나: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워요.]

[GM: 별말씀을요! 참, 아까 물어보셨죠? 전쟁 중이 아닌 구역에서 로그아웃하면 되는 거냐고.]

[GM: 예전엔 그랬는데 이젠 아니에요.]

[나: 그게 무슨 소리예요?]

[GM: 압실론이 말해 줬어요. 로그아웃을 시도했었던 날 이후로 공들이 재정비를 했다고.]

[나: 무슨 재정비요?]

[GM: 그들이 설계한 장치나 도구, 마법을 변경 및 해지하려면 넷 모두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ㅇㅅㅇ;; 이현 씨가 사라졌던 기간 동안 그들은 모든 구역에 어떤 마법 도구를 설치했다고 해요. 그래서 압실론이 우리 편이 되긴 했지만, 넷 모두의 동의 없이는 자신이 설치한 도구라 해도 제거할 수 없어요.]

“이런 X발…….”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나지막이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압실론이 내 브레이슬릿을 임의대로 해제한 일 때문인 듯했다. 그래, 황위를 찬탈할 수 있었던 이유도 한 번 한 실수를 두 번은 안 했기 때문이었지.

[나: 다른 방법은 없어요?]

[GM: 다행히 있어요.]

[나: 뭔데요?]

나는 깍지를 끼고 희망에 차 채팅 창을 바라보았다. ‘상대방이 메시지를 입력 중입니다’라는 글자가 채팅 창 아랫부분에 떠 있었다.

[GM: 그 마법 도구는 압실론이 설치한 거예요. 그러니 압실론의 마법 도구를 파훼하면 돼요.]

[나: 파훼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깨트려야 한다는 소리예요?]

[GM: 아뇨, 압실론보다 높은 클래스를 가지기만 하면 돼요!]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나는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금방이라도 손바닥을 파고들 것 같았다.

[나: 압실론이 지금 몇 클래스인 줄은 알아요?]

[GM: 7클래스 정도 아닌가요?]

[나: 9클래스예요.]

[GM: 어, 좀 높긴 하네요.]

GM도 말문이 막혔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내 머리를 쥐어뜯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욕설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채팅 창이 두어 번 반짝였다.

[GM: 그래도 방법이 아주 없진 않아요.]

나는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처럼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번에도 헛소리라면 욕을 한바탕 쏟을 각오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채팅 창이 연속해서 올라왔다.

[GM: 제가 이런 때를 대비해 설치해 둔 게 있죠.]

[GM: 바로 던전이에요!]

“던전을 이 인간이 설치했다고……?”

의외의 말에 의심이 먼저 차올랐다.

[GM: 원래는 공들의 눈을 돌려서 그사이에 이현 씨를 빼내기 위해 만든 거지만, 이럴 때 쓸모가 있네요.]

[나: 그걸 혼자 만들었어요?]

[GM: 그럴 리가요. 이현 씨가 게임 밖으로 나오는 걸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고대하고 있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래.

[나: 그래서, 그 던전을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GM: 클리어하시면 돼요. 드래곤이 딱 10클래스거든요. 던전을 클리어하시고 드래곤 하트를 취하면 10클래스가 돼서 거기서 빠져나오실 수 있어요. 이 세계가 복잡해 보여도 시스템은 철저하게 힘의 우위를 따르고 있거든요. 오히려 심플하죠.]

“…….”

바깥세상에 나가면 일단 이 인간부터 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걔네 넷도 클리어 못 하는 걸 저보고 깨라고요?]

[GM: 아, 물론 다 방법이 있죠.]

설마 치트키라도 업데이트해 주려나?

[GM: 힘을 합쳐서 같이 가시면 돼요!]

[나: ……누구랑요?]

[GM: 당연히 공 네 명이랑이죠!]

사실 방법 같은 건 없고 그냥 놀릴 의도로 채팅하는 건 아닐까?

[나: 그냥 치트키 같은 거 업데이트해 주면 안 될까요?]

GM이 한동안 채팅 치기를 주저했다. 뭐가 힘든가 보네.

[GM: 그것도 생각 안 해 본 건 아닌데, 지금 이현 씨 상태가 좀 안 좋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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