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쪽지 끝마다 붙어 있는 이 개 같은 이모티콘은 그렇다고 치고,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라는 건 <소년들>의 운영자에게서 온 쪽지라는 소리인데, 이 사람은 나를 알고 있었다.
아니, 그냥 아는 정도가 아니지. 999개가 훌쩍 넘는 쪽지들을 훑어보고 있자니 그가 나에 대해 제법 많은 걸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크게는 나의 가족 관계나 친구 관계부터, 작게는 내 사소한 생활 습관까지. 뒷조사를 한 건가? 그러기엔 너무 작은 것들도 알고 있던데.
누구의 제안을 승낙했다는 거지?
어쩌면 이게 함정은 아닐까. 나는 답장 버튼을 누르기를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때로는 목적을 위해 기꺼이 속아 주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나는 답장 버튼을 누르고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뒤 전송했다.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누구세요?]
쪽지 창을 닫고도 싱숭생숭한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정말 밖에 나갈 수 있는 걸까?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가만히 서서 내 팔에 붙은 근육을 쓸어 보았다. 마티어스의 것보단 덜하지만, 제법 운동한 티가 나는 근육. 근육의 모양대로 살짝 갈라진 배, 곧게 펴진 척추와 살짝 갈라진 허벅지.
이번엔 팔을 들어 손끝으로 나와 두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나뭇잎을 가리켰다. 나직이 주문을 외자 나뭇잎들이 후두두 떨어지며 내 앞에서 짧게 회오리쳤다. 나는 허공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는 나뭇잎들을 가리켰다. 손끝으로 그리는 문양과 같은 문양이 나뭇잎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정교한 작업이 계속되자 등줄기의 우묵하게 파인 부분으로 땀이 고였다. 작업을 끝낸 나는 손을 내밀어 나뭇잎을 받아 냈다. 나뭇잎 안에는 각각 다른 두 개의 그림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었다.
더블 캐스팅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왼손과 오른손으로 각각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과 비슷했다. 집중을 거두면 마법은 금세 취소되었다. 범위 조절과 더블 캐스팅에 유독 약했던 내가 꾸준히 연습해 온 마법이었다. 작은 나뭇잎에 적당한 힘으로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내가 생각한 수련 방법이었다. 그림이 썩 훌륭하진 않았지만, 화가가 목표인 건 아니니까.
목숨 외에 아무것도 협박할 게 없던 시절이 비참해 기르기 시작한 근육, 익히기 시작한 마법. 그건 분명 나의 어두운 시절에 돌파구이자 희망이 되어 주었다. 하지만 원래 살던 세계로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갑자기 주어진 목표에 막막했다.
“하아…….”
나는 한숨을 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띠링!
[쪽지가 도착했습니다. 1. 열기 2. 닫기]
나는 걷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서서 허공에 뜬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여, 열기.”
시스템 창은 잠시 투명해졌다가 쪽지함 안의 글자를 비추었다.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이현 씨! 살아 있었군요! 아, 정말! 믿고 있었다고요! 어디 가셨다가 이제 오신 거예요? 오늘이 제 인생 최고의 날입니다. 정말이지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제 정체는 아직은 알려 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진짜예요. 저는 당신이 그곳에서 빠져나오길 간절하게 원하고 있습니다. คʕ•ﻌ•ʔค]
“왜 안 된다는 건데……?”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왜 안 되는데? 요?]
답장은 금방 왔다.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화낼 것 같아서요. คʕ•ﻌ•ʔค]
솔직히 그의 정체가 우선적으로 알아야 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답장을 받고 ‘아, 그럼 다른 얘기 하죠!’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이 못 됐다.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제가요? 왜요? 화 안 낼 테니까 말해 봐요.]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아뇨, 낼 거예요. 분명히. คʕ•ﻌ•ʔค]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아, 안 낸다니까 그러네.]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정말요? คʕ•ﻌ•ʔค]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그래요. 솔직히 내가 믿을 거 그쪽밖에 없는데 내가 어떻게 화를 내요? 나 을 중의 을이거든요?]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그건 또 그렇네요……? คʕ•ﻌ•ʔค]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그니까 얼른 말해 봐요.]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얘기가 긴데, 뭐부터 말하죠? คʕ•ﻌ•ʔค]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니까 제일 센 것부터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사고를 친 건지 좀 들어 보자.”
웬만한 말로는 화를 내지 않을 자신도 있었다. 말마따나 난 갑을병정 중에 정 아닌가.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다. 세월이 지나며 나도 많이 온화해지기도 했고. 명상하며 고요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답장이 왔다.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결론만 말하면, 이현 씨 거기 갇히게 된 거 저 때문이에요. คʕ•ﻌ•ʔค]
“하하.”
이런 거였구나. 난 또 뭐라고.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다. 내가 갇힌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까지 나에게 신경 쓰고 있을 정도면, 내게 개인적 죄책감이 있는 건 아닐까 싶었으니까. 나는 차분히 답장을 적어 내려갔다.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이 ****해서 ***할 ******아. **. ***가. 이게 다 **** 때문이라고? ***해서 ******하고 ****해도 모자랄 ***. ***된 거 알면 재깍 ** 튀어나와서 ****해 줬어야지 지금에서야 ** *****. ** ** *****!!!!!!! 진짜 *****, ****, *****아!!! * ** ****, ******!! 뭘 용량이 부족하대 또 **, ** *** 하네. 몇 글자나 썼다고. **. 넌 다음 답장까지 무릎 꿇고 기다려. 알았어? ** 기분 ** ** 더럽네. **!!]
쪽지에는 자동 욕설 필터링이 되어 있어 다 쓰고 나자 별이 난무했다. 추가로 네 장의 답장을 더 쓰고 있는데 쪽지가 도착했다.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화 안 낸다고 했잖아요……. คʕ•ﻌ•ʔค]
거지 같은 곰돌이 이모티콘에 더 화가 났다. 나는 쪽지를 띄운 시스템 창을 찢어 버리려고 했지만, 반투명한 시스템 창은 터치한 곳만 물결 모양으로 잠깐 일렁일 뿐 찢어지지는 않았다.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양심 없냐? 그 *같은 곰돌이 이모티콘 치워 ****아. 넌 *** 해서 ****하고 ****해도 ******이야.]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너무 흥분하신 것 같네요. 다음에 뵙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시무룩한 쪽지에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그렇다고 가 버리면 어떡해. 나는 다급히 손을 놀렸다.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라고 말할 줄 알았죠? ^^* 화 안 났어요. 그냥 시뮬레이션해 본 거예요. 장난~ ^^*]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정말 장난이었어요?]
“장난이겠냐?”
나는 혀를 차면서도 고운 말씨로 답장을 이어 나갔다.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그럼요~ 제가 사람 만난 지가 너무 오래돼서 그만 이런 장난을 쳤네요. ^^; 이해해 주실 거죠?]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네, 이해해요. 아무래도 오랫동안 거기 계셨으니까요.]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런데 저기 저 탈출은 언제쯤 할 수 있는 건가요? 아직 로그아웃이 안 되는데요.]
[몰입감을 위해 전쟁 중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도시에서의 로그아웃이 불가합니다.]
[몰입감을 위해 전쟁 중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도시에서의 로그아웃이 불가합니다.]
나는 쪽지를 받자마자 로그아웃을 몇 번 시도해 보았지만 전부 실패했다.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로 답장 알림이 왔다.
[8/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그런데 이현 씨의 장난에 저는 그만 정신이 혼미해져서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곧 다시 연락할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คʕ•ﻌ•ʔค]
“뭐, 이 새끼야?”
나는 험한 욕설을 뱉으며 쪽지를 작성했다.
[8/21 Game Master에게 답장
아…… ^^* 언제 오실 건데요?]
“……X발.”
답장은 더 이상 오지 않았다.
* * *
쪽지를 받고 밤을 꼴딱 새운 나는 호숫가에 가서 냉수마찰을 했다. 사실 고전적인 거로는 폭포만 한 게 없는데 안타깝게도 이 섬에는 폭포가 없었다.
마음을 평온하게 가라앉힌 나는 쪽지가 오길 기다렸다. 그러나 점심이 지나고도 쪽지는 오지 않았다. 나는 내가 혹시 나도 모르는 새 시스템 창을 끈 건 아닌가 싶어 시스템 창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중간에 맵도 한번 켜 봤는데 여전히 온 세계가 다 새빨갰다. 전쟁이 지겹지도 않냐. 로그아웃 방법은 알아냈으니 해 보려면 해 볼 순 있겠지만, 왠지 전과 같은 방법으로 탈출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호수 근처의 수풀이 한 차례 들썩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는데, 숨은 보람도 없이 수풀 옆으로 새빨간 머리카락과 우람한 팔뚝이 삐져나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