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텐트로 돌아가기 전, 압실론이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편에 서서, 충고를 해 주자면…… 돌아가더라도 마티어스와 루드비히에게는,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는 게 좋을 거야.”
“그거…… 들키지 말라는 얘기지?”
“맞아. 이현이 마지막에, 한 얘기 때문에, 다들 아직도 좀 화가 났거든.”
마지막에 내가 뭐라고 했더라. 나는 로그아웃 직전 내가 했던 얘기들을 곱씹어 보았다.
‘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개새끼들아. 한 번만 말해 줄 테니까 귀 똑바로 열고 들어. 너희 정체가 뭔지 알아? 게임 캐릭터야. 그것도 BL 게임!’
“…….”
‘마티어스, 너 내가 가끔 다른 데 바라보면서 ‘후원 감사합니다.’ 했던 거 왜 그러는지 궁금하다고 했지? 그거 내가 너네랑 있던 시간들 남들한테 보여 줘서 그걸로 돈 번 거야!’
“…….”
‘나, 너희 사랑한 적 한 번도 없어. 다 돈 벌려고 한 거지. 미친 새끼들아. 이제 안녕, 영원히 안녕이다!’
사우나에 들어온 것처럼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전부 진심인 건 아니었다. 분하고 악에 받쳐 그렇게 말했던 것뿐.
“……나 그냥 안 돌아갈래.”
“그, 그럼 어떻게 살려고?”
“마티어스 떼어 놓고 다른 섬 가서 살 거야.”
“이현을 독점할 수 있을 테니, 나야 나쁘진 않지만…….”
압실론이 고개를 숙여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그대로 굳고 말았다. 먼저 들어갈게, 압실론이 발랄하게 말하며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어느새 다가온 파도가 내 발목을 적실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네 세계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압실론이 내게 건넨 말이 너무나 충격적이라.
* * *
나는 종일 멍한 상태로 하루를 보냈다. 그 와중에 기본 훈련도 하고, 압실론과 마티어스의 대련을 구경하기도 하고, 마티어스와 대련하다가 정신을 놓고 있는 바람에 머리에 큰 혹이 생기기도 했다.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텐트에 돌아가 일찍 잠자리에 누웠는데,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네 세계에 돌아가고 싶지 않냐니.
그리고 그 말을 꺼낸 게 다름 아닌 압실론이라니. 그사이 대체 압실론에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걸까.
압실론에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려고 했는데, 마티어스가 생각 외로 너무 철저히 우리 둘 사이를 가드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마티어스에겐 이 상황을 숨겨야 했으므로, 우리는 서로 초면인 것처럼 굴고 있었다. 압실론은 나를 이안이라고 불렀으며, 나는 압실론에게 데면데면하게 굴었다. 예전의 압실론이라면 이유를 알아도 서운해했을 것 같은데, 이번엔 딱히 서운해하는 기색 없이 그런 나를 받아들였다. 저녁 무렵이 되자 이 여유로운 태도가 대체 어디서 온 건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반면 마티어스는 막 첫사랑에 불붙은 아이처럼 굴었다.
“읍…….”
마티어스가 다소 갈급한 태도로 내 입술을 덮쳤다. 나는 내 손에서 흩어지는 고운 모래를 움켜쥐었다.
이미 오늘 두어 번의 입맞춤을 했던지라 입술이 퉁퉁 부어 있었는데, 마티어스는 그것이 마음에 드는지 집요하게 입술을 빨아 대었다.
숨, 막혀.
“그만, 그만해!”
부은 입술 안으로 마티어스의 송곳니가 살짝 파고들었다. 나는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파드득 놀라 그를 밀쳤다. 찝찔한 피 맛 나는 입술을 엄지로 훑으며 마티어스를 노려보았다.
“피 나잖아!”
“뭐?”
입맞춤에 피까지 날 줄은 몰랐는지 마티어스가 내 뺨을 쥔 채 난감한 기색으로 입술을 살폈다. 짐짓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성욕으로 멍한 눈깔을 보아하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마티어스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그 와중에 운동 신경은 좋아 다른 사람이었다면 나동그라졌을 자세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걸음을 옮겼다.
“어디 가?”
“산책 간다.”
“나도 같이…….”
“아니, 혼자 갈 거야. 방해하지 마.”
나는 단호하게 답하고는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집을 나가기 전, 뒤를 돌아보니 마티어스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애처로운 표정에 조금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나는 고개를 젓고 모래밭을 빠르게 달려 나갔다.
루드비히처럼 키스해 놓고 사과도 안 하고 뻔뻔스럽게 나오면 마음 놓고 미워할 수라도 있겠는데, 덩치는 제일 큰 주제에 거부하면 상처받은 소동물처럼 구니 화를 내기가 참 뭐했다.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루드비히와 달리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다 충동적으로 하는 행동이라는 걸 알아 거부하기가 좀 그렇기도 했다.
그리고 딱히 나쁘지만도 않았던……. 아니, 이건 취소.
“……덥네.”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볼을 손등으로 식히며 해변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람이 없는 날씨라 파도도 고요했다. 달빛에 비친 수면을 바라보고 있던 나는 시스템 창에 생각이 미쳤다.
“시스템 창…… 켜야겠지.”
안 그래도 조만간 켜야겠다 생각하고는 있었는데, 압실론이 먼저 언급하니 뭔가 좀 찝찝했다.
‘네 세계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그래, 그래도 켜 봐야겠지. 나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소년들은 어른이 된다> 시스템 창 켜 줘.”
눈앞에 아주 오랜만에 보는 로딩 창이 뜨더니, 이내 시스템 창 하나가 띄워졌다.
[시스템 창이 켜졌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위로 뜬 안내 문구 하나.
[읽지 않은 쪽지가 있습니다.]
이건 과연 누구에게서 온 메시지일까.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쪽지함 열어 줘.”
[쪽지함이 열립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으앗!”
기다렸다는 듯 밀물처럼 쏟아지는 쪽지 창에 나는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런 내 시선에 맞추어 쪽지들이 미친 듯이 밀려들었다.
[3/5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이현 씨, 잘 계십니까? 계시면 말씀 좀 해 주세요. 제가 드디어 이현 씨를 구하러 왔습니다. คʕ•ﻌ•ʔค]
[3/7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몬스터에게 습격받으신 건 아니죠? 지금 어디 계세요? คʕ•ﻌ•ʔค]
[3/1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대답 좀 해 주세요……. คʕ•ﻌ•ʔค]
[3/15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설마 손가락 움직이기도 힘든 상황에 처하신 건 아니겠죠?! 안 되는데 คʕ•ﻌ•ʔค]
[3/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새로운 생활이 만족스러우실지도 모르겠지만, 이쪽은 이현 씨 구하려고 돈 엄청 쓰고 머리도 빠개질 것 같거든요. 제발 대답 좀 해 주세요. คʕ•ﻌ•ʔค]
[4/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사용자가 본인의 세계에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구조를 종료합니다.]
[4/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는 거짓말! 오늘은 만우절이니까요. 저는 이현 씨를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คʕ•ﻌ•ʔค]
[4/26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거기서 쭉 살고 싶으시면 그렇다고 말 한 번만 해 주시면 안 돼요? 저 이현 씨 병원비 대느라 등골이 휘고 있거든요? คʕ•ﻌ•ʔค]
[6/2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진짜 영원히 거기 계실 생각은 아니시죠? คʕ•ﻌ•ʔค]
[7/3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혹시 시스템 창 무시하고 계신 건 아니죠? 아니면 아예 꺼 버리셨다거나. 제발 그것만은 아니길. คʕ•ﻌ•ʔค]
[8/3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저 진짜 힘들게 여기 접속한 거거든요? 제발 대답 좀 해 주세요. คʕ•ﻌ•ʔค]
[8/27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이현 씨, 대답.]
[9/17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방금은 죄송해요. 그냥 장난쳐 봤어요. 쪽지 보내기엔 취소 기능이 없네요. 다음 업데이트 때 건의해 봐야겠어요. คʕ•ﻌ•ʔค]
[10/2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새로운 생활이 얼마나 마음에 드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세상이 그립지 않으신가요? 나오셔야죠. 저 정말 힘들게 업데이트한 거란 말입니다. คʕ•ﻌ•ʔค]
[10/24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진짜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이현 씨 죽으면 저 잘려요. คʕ•ﻌ•ʔค]
[11/9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진짜 도와드릴 거예요. 그러니 제발 한 번만 연락해 주세요. 저 정말 이현 씨 걱정에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있어요. 속상해 죽을 지경이란 말입니다.]
[11/9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나는 오늘 오징어덮밥. 곱빼기로.]
[11/9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คʕ•ﻌ•ʔค …….]
[11/9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방금은 잘못 전송된 거예요. 회사 메신저랑 착각했어요.]
[12/12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보고 싶어요, 이현 씨. คʕ•ﻌ•ʔค]
[2/14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이현 씨 무사 귀환 기도 1일 차 คʕ•ﻌ•ʔค]
[2/15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이현 씨 무사 귀환 기도 2일 차 คʕ•ﻌ•ʔค]
[2/19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이현 씨 무사 귀환 기도 3일 차 (날짜에 갭이 있는 것 같은 건 기분 탓이에요!) คʕ•ﻌ•ʔค]
.
.
.
[3/7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이러시면 제안을 승낙할 수밖에 없어요. คʕ•ﻌ•ʔค]
[5/21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대략적인 상황을 들었어요, 이현 씨. 저는 지금부터 이현 씨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겁니다. คʕ•ﻌ•ʔค]
[5/28 Game Master에게서 온 쪽지입니다.
훗날 저를 다. คʕ•ﻌ•ʔค]
수많은 쪽지를 정독하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이거였다.
뭐 하는 새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