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아셀과 했을 때에는 심플하고 간단했던 양피지가 점점 빽빽해졌다. 심지어 끝낼 무렵에는 한 장이 더 늘어나 있었다.
“일단은 이 정도로 할까.”
“그, 그래…….”
나는 완성한 계약서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러다 어느 한 글자에 멈추어 섰다.
“이안? 이현이 아니고?”
“아, 잘못 썼네.”
압실론이 대수롭지 않게 계약서의 ‘안’ 부분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마법처럼 ‘안’이 사라지고 ‘현’이라는 글자가 적혔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대놓고 아쉽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압실론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더니……. 하나가 있다 해도 압실론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계약서를 샅샅이 둘러보다 몇 가지 조항을 더 추가하고 압실론에게 돌려주었다.
“이제 된 거야?”
“일단은. 나중에 더 추가해도 되지?”
“으응…….”
아까보다 조금 지친 듯한 압실론이 손가락을 물어 피를 내었다. 나 역시 단검으로 손가락을 긋고 피로 지장을 찍었다.
확답을 받아 낸 나는 그제야 안도하며 마나의 회전을 느릿하게 조절했다. 긴장을 아예 풀어서 그런 건 아니고, 마나가 바닥을 보이고 있어서였다. 그제야 주변을 좀 볼 수가 있었다. 미세하게 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게서 0과 1이 세상 밖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신기하네. 다른 NPC와 접촉하면 이 숫자들이 일부 전이되는 걸까. 그래서 그들의 사고 수준이 높아지는 거고.
“이런 걸…… 계속 보는 거야?”
“아니. 이현에 대해 분석하다, 언뜻 보게 된 풍경이야. 계속 파고들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네.”
한낱 게임 AI 캐릭터가 시스템을 분석해 통제할 수 있게 되는 데에는 얼마나 지고한 노력이 필요했을까.
대학원은 이런 애가 가고, 연구자는 이런 애가 되는 건가 보다. 나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그의 노력에 고개를 내저었다.
“마티어스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은 건, 잘한 일이야.”
“그, 그래?”
“걔, 이현 죽일 거라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거든.”
이미 들었던 얘기라 새삼 놀랍지도 않았다.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여파를 생각하니 두통이 일긴 했지만.
“정말, 돌아올 거야?”
“……아니.”
“그래, 그럴 거라 생각했어.”
그렇게 답하면서도 내심 기대를 했었는지, 압실론의 눈썹이 축 늘어졌다.
“이현이 이 세상에, 계속 있는 건 알고 있었어.”
“어, 어떻게?”
압실론이 내게서 떨어지는 숫자 부스러기를 매만지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현과 닿았던 것들에, 숫자가 잔뜩 묻어났었거든. 질투 날 만큼. 정확히 어디 있는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 계속 살고 있을 이현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어.”
그렇게 말하는 압실론은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그러냐.”
“응. 다시 만나게 돼서, 정말 기뻐.”
압실론이 마티어스가 있는 텐트 쪽을 보며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사실은 내가 제일 먼저, 이현을 만나고 싶었는데.”
“……싶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두 곳에서, 마법사 발현 현상이 나타나서 이쪽엔 마티어스를 보낼 수밖에, 없었어.”
“아…… 그래?”
“다른 한쪽은 그냥 우연이었지만……. 참, 이현이 먼젓번에 보내 준 애는, 잘 데리고 있어. 나쁘지 않더라.”
아셀 전에 내가 각성시킨 녀석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일 년 동안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압실론은 내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우리는 그 후로도 소소한 화제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황궁 앞에 맛있는 제과점이 생겼다든지, 가르치고 있는 아이가 2클래스를 마스터했다는 이야기 같은 것들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가 이어져 기분이 이상할 정도였다.
정말로 미워하고 원망했었는데, 왜 이제는 예전만큼 증오스럽지가 않지?
너무 오래 홀로 외로워했어서 그런가. 힘든 타향살이 중에는 원수를 만나도 잠깐 반가운 그런 거.
아니면 마티어스의 악몽을 옆에서 봤던 것 때문인가?
혹은 전에 아셀과 나누었던 대화 때문일까.
‘누가 뭐래도 내 마음, 내 생각, 내 자아는 진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 세상이 가짜가 될 수가 있겠어요?’
‘…….’
‘내 삶을 살아가는 건 나잖아요. 저는 제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진짜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삶을 가짜라고 말하고 손가락질해도?’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제가 이 삶을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는 양쪽 뺨을 제법 세게 내리쳤다. 압실론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신 차리자, 이현.
만약 네가 정말 여기서 평생 살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얘네는 위험하다. 사실은 평생 피하면서 살아도 모자랄 놈들이야.
“…….”
별로 피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진 않지만.
나는 내게 팔짱을 끼고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압실론을 보며 흐린 눈을 했다.
별개로 압실론은 날 별로 원망하진 않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꼬리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 생각이 제법 타당하게 느껴졌다.
“난 네가 날 계속 원망하고 있을 줄 알았어.”
“내가……? 왜?”
“야시장 다녀온 날 잠깐 사라진 거로도 엄청 화냈었잖아.”
그때 압실론의 모습은 되도록 다신 보고 싶지 않았다. 압실론이 고민 없이 해맑게 말했다.
“글쎄, 이현은 항상, 떠나고 싶어 했잖아. 우리는 붙잡고, 싶어 했던 거고.”
“…….”
“우리의 욕망이 충돌한 셈이지. 자꾸 도망가려는 이현에게, 화가 나긴 했지만…… 원망스럽지는 않아.”
“그렇구나.”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크지.”
얘 왜 이렇게 갑자기 어른스러워졌지? 나는 내 옆에 서서 해변을 걷고 있는 압실론이 몹시도 낯설어졌다. AI는 원래 이렇게까지 성장할 수 있는 건가.
“그렇다고 정말 완전히 놓아줄, 생각은 없지만.”
압실론이 내 손에 깍지를 끼고 씩 웃었다. 나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 보니 얘 약 먹었었는데. 다행히 백치는 안 되고 돌아왔나 보네.
“너 말 많이 좋아졌네.”
“연습, 했으니까. 시간도 많이 지났고.”
압실론의 말투는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말을 더듬는다는 걸 모를 정도로 좋아져 있었다. 그사이 압실론도 제법 많은 성장을 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나를 두고 어른이 된 압실론이 낯설었다. 어색한 공기에 뺨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압실론이 내 손에 제 손을 포개었다.
“그래도 감정은, 변하지 않았어.”
“어?”
“나는 여전히 이현이 좋아.”
압실론이 내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뛰는 심장 고동이 손바닥 너머에서 느껴졌다.
“너는, 이 심장 뛰는 소리가 진짜라고 생각해?”
압실론은 내 말에 자신의 심장에 손을 대어 보았다. 자신의 심장 소리를 느껴 보려는 것처럼.
“아니면 어때. 내가 이현을 좋아하는 건, 변하지 않는걸.”
손을 떼어낸 압실론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심코 묻고 싶어졌다.
“사실 내가 별거 아닌 존재라면 어떨 것 같아?”
“이현이 어, 어떻게 별게 아니야?”
“네가 만약 내 세계에 왔다고 쳤을 때, 나 같은 존재는 발에 차일 만큼 흔하고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면…….”
그래도 너희는 날 좋아할까.
“내가 이현을 좋아하는데, 어떻게 별게 아닐 수 있지?”
압실론이 고민 끝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나는 이 자기중심적인 놈에게 어떻게 하면 녀석에게 더 적절한 비유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러니까…… 그래, 내가 만약에 백 명 있다면? 나랑 똑같은 사람이 백 명 있어.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이현이, 백 명…….”
생각만 해도 황홀하다는 듯 압실론이 허공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그럼 정말…… 좋겠다. 매일매일 이현들이랑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잖아.”
아니, 그거 아니야.
“너는 그중에 딱 한 명만 고를 수 있어.”
“열 명도 안 돼?”
“안 돼. 딱 한 명이어야 해.”
“그럼…… 이현이랑만 있을래.”
“네가 고른 애가 진짜 내가 아닐 수도 있는데?”
압실론이 나를 본 후 처음으로 인상을 썼다. 내 질문 세례가 짜증이 나선 아니고, 그냥 고민하는 것 같았다. 멍하니 버퍼링이 걸리는 게 아니라 사람처럼 고민하는 모습을 보자 묘하게 안심이 됐다.
“그럼 날…… 아흔아홉 명 만들래.”
“뭐?”
“그래서 아흔아홉 명의 이현이랑…… 붙여 줄래.”
“아흔아홉 명의 이현의 의사는……? 아니다, 됐다.”
압실론이 ‘굳이 그런 게 필요해?’라는 듯한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뭔가 맥이 빠지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내가 생각해 온 정답과 맥락이 닿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래라.”
“응.”
“그런데 여기 시간은 언제 풀 거야?”
“이제, 풀어야지.”
압실론이 다시 손가락을 마주쳐 소리를 내었다. 그와 동시에 섬 전체에 걸려 있던 마법이 풀렸다. 파도는 다시 본래의 속도를 되찾았다. 저 멀리서 갈매기가 울고, 바람에 나뭇잎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며, 돌처럼 딱딱했던 금빛 모래는 다시 풀어져 복숭아뼈 주위를 간질였다.
“참, 이현.”
“응?”
“메시지 함, 한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거야.”
“……뭐?”
“시스템 창, 닫고 산 지 오래되었잖아?”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시스템 창이라니? 메시지 창이라니. 얘는 뭐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야.
“메시지 함에…… 반가운 소식이 있을 거거든.”
압실론은 묘한 말을 남기며 씩 웃었다.
“그리고 난…… 네 편이야.”
“내 편이라니?”
“그 셋이 아니라…… 오로지 네 편이라는 소리야.”
“왜?”
“……좋아하니까.”
“그전에도 너 나 좋아했잖아.”
“맞아. 다른 이유도 생겼지만…… 어쨌든, 나는 네 편이야.”
도대체 무슨 꿍꿍이지? 나는 수상하다는 듯 압실론을 응시했다. 하지만 압실론은 더 얘기해 주지는 않았다.
“마티어스가 곧 깰 거야. 가자.”
“어, 으응…….”
졸지에 압실론을 얻게 된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압실론을 따라 걸었다. 그냥 해 본 무료 뽑기에서 SSS급 캐릭터를 얻은 기분이었다. 얘가 도대체 왜 이러지 싶긴 한데, 굳이 넝쿨째 들어온 호박을 차 버릴 이유는 없었기에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