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애 건드리지 마.”
내가 긴장한 걸 알아챘는지 마티어스가 우리 둘의 사이를 막아섰다. 압실론이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냥, 본 것뿐인데.”
“넌 시선 자체가 기분이 더러워.”
마티어스의 독설에도 압실론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내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마티어스가 황당하다는 듯 압실론을 내려다보았다.
“뭐 하냐? 안 비켜?”
“여기까지 오느라, 마나를 다 썼어. 자고 갈래.”
“그럼 처나가서 주무세요.”
이번엔 압실론도 고집을 피웠다. 마티어스가 압실론을 들어 옮기려고 시도했지만, 옮기고 나면 순간 이동으로 다시 내 옆에 눕는 통에 포기했다.
막 서른한 번째 시도를 실패로 끝낸 마티어스가 숨을 헐떡이며 압실론을 노려보았다. 압실론은 그러거나 말거나 얌전히 내 옆자리를 사수했다. 다행히 유혈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마티어스가 나를 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안.”
“어?”
“나가서 자자.”
……엥?
압실론한테 이 집 주고 우린 나가서 자자고?
‘왜?’라고 물으려던 나는 보고 말았다. 마티어스의 눈동자에 깊이 각인된 열기를. 방해꾼이 비켜 주지 않을 것 같으니 밖에 나가서 일을 치르자는 뜻인 듯했다. 아직 거기까진 생각이 없었던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싫어.”
“뭐?”
내가 거절할 줄 몰랐는지 마티어스는 적잖이 충격받은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너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라고 말하는 듯해 나는 그 시선을 피해 버렸다.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렸지만, 싫은 것도 아니었지만, 나에겐 아직 감정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진짜?”
“그래. 난 여기가 편해. 여기서 잘 거야.”
“……쟤랑 같이 자겠다고? 날 두고?”
마티어스는 마치 배신당한 강아지처럼 굴었다. 그때 가만히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압실론이 조용히 마티어스를 불렀다.
“마티어스.”
“뭐.”
“추해.”
“……이 새끼가 진짜!”
마티어스가 잔뜩 열이 받아 압실론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나는 마티어스의 억센 손이 압실론의 로브를 잡아채기 전 목소리를 높여 그를 불렀다.
“마티어스, 나 피곤해.”
그러니까 대충 감정 추스르고 얼른 잠이나 자자.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마티어스가 시무룩하게 입꼬리를 늘어트렸다.
“……알았어.”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난 하루였다. 눈을 감자마자 30초 안에 잠들 자신이 있었다. 나는 몸의 긴장을 풀고 몸을 늘어트렸다. 이제 좀 자나 싶었는데, 마티어스가 나를 가볍게 안아 올렸다. 나는 엉겁결에 마티어스의 목을 끌어안고 다리를 버둥거렸다.
“뭐, 하는…….”
“야, 안으로 들어가.”
그리고는 발로 압실론의 팔을 툭툭 쳤다. 압실론도 별말 없이 깔개 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를 중앙에 눕힌 뒤 마티어스가 내 옆에 드러누웠다.
“나도 여기서 잘 거야.”
어린애 같은 행동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옆에서는 자고 싶고, 나를 깔개에는 눕혀야 했던 마티어스의 최종 양보 지점인 듯했다. 이 좁은 집에서 남자 셋이 몸을 눕히고 있으려니 영 불편했다. 특히나 가운데에 끼인 나는 몇 번이고 몸을 뒤척여야 했다. 옆에서 계속 꼼지락대고 있으니 불편할 만도 한데 마티어스는 핀잔 한마디 없이 시종일관 나를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불편하지? 금방 쫓아낼게.”
“아, 아냐…….”
둘의 우정에-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금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나는 짐짓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에 모래밭에 누워 자는 게 불편했는지 마티어스가 모래가 붙어 있는 팔다리를 긁적였다. 차라리 어제 만들어 놓은 해먹에서 자는 게 더 나을 것 같았지만, 거절할 걸 알기에 굳이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이거라도 베고 자.”
나는 베개를 마티어스의 머리맡에 가져다 댔다. 풀을 엮고 지푸라기를 채워 만들어 놓은 베개였다. 하나는 이미 압실론이 야무지게 베고 자고 있었다. 너나 하라고 말할 줄 알았는데 마티어스는 의외로 순순히 베개를 베고 누웠다. 그리고는…… 팔을 내 쪽으로 내밀었다.
“……?”
이거, 아무리 봐도 팔베개하자는 거 맞는 것 같지……?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나도 괜찮아. 이리 와.”
그렇게 말하고 있는 마티어스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 어지간히 나한테 감동받았구나.
“으응…….”
복합적인 이유로 도저히 마티어스를 거부할 수 없었던 나는 얌전히 그의 팔을 베고 누웠다. 근육으로 꽉 차 있는 팔은 목침처럼 단단했다. 마티어스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나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마티어스가 소년처럼 씩 웃었다. 너 진짜 나 좋아하는구나.
생각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여전히 많은 양의 마나가 내 몸을 맹렬한 속도로 돌며 적의와 구속의 낌새를 읽어 내고 있었는데, 그 과정이 꽤 피로했다. 나는 눈두덩을 문지르며 하품을 했다.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는 마티어스가 내 귓가에 잘 자, 하고 달콤하게 속삭였다.
* * *
“으으…….”
압실론을 경계하느라 밤을 거의 새우고 새벽녘이 되어서야 얕게 잠들었다. 거대한 고목이 내 몸에 뿌리내리는 악몽을 꾸다 일어났더니 마티어스가 나를 꽉 끌어안고 잠들어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서 빠져나오려 애를 썼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좀처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고생 끝에 겨우 녀석을 떨쳐 내고 밖으로 나오니 수평선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항상 새벽같이 일어나 훈련을 했다 보니 일어나자마자 보는 일출이 낯설었다.
일어선 채로 몸을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데, 발등 위로 내 것이 아닌 그림자가 졌다. 나는 고개를 숙인 상태에서 위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젖어 모래가 달라붙은 로브. 새벽 산책을 다녀온 듯한 압실론이 나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라?”
바람이 잦아들었다. 종아리를 간지럽히던 모래도 춤추기를 멈추었다. 코끝에 진동하던 바다 내음도 사라졌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당황스레 주변을 돌아보았다. 끊임없이 치고 있던 파도가 멎어 있었다. 정지 화면처럼 물방울이 튄 장면 그대로 멈추어 있었다. 누군가가 이 주위의 시간을 멈춘 거였다. 그리고 이런 일이 가능한 건, 내가 알기로 하나밖에 없었다.
“……압실론.”
나는 경계심 어린 시선으로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압실론이 나를 보며 흐릿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이야, 이현.”
의심하거나 떠보는 게 아니라 확신에 찬 말투였다. 사락, 로브 자락이 휘날린다 싶더니 압실론이 순식간에 내 앞에 다가와 있었다. 나는 뒷걸음질 치며 압실론을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제 이름은 이안인데요.”
“굳이 숨길 필요, 없어. 다 알고 있으니까.”
압실론이 엄지와 중지를 마찰해 딱 소리를 냈다. 그와 동시에 하늘이 검게 바뀌었다. 놀라서 뒷걸음질 치려는데, 압실론이 나를 끌어안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하늘만 까매진 게 아니었다.
“……그리드?”
내 주변을 구성하는 온갖 것들에 초록색 그리드 선이 촘촘하게 깔려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이 진짜가 아니라 가짜라는 걸 알려 주는 것처럼.
“겁내지, 마. 그냥 환상 마법이야.”
“…….”
“음, 내가 볼 수 있는 걸, 그대로 구현한 거긴 하지만.”
압실론이 속삭인 말에 나는 아연해졌다.
“네가…… 볼 수 있는 거?”
“응. 내가, 볼 수 있는 것.”
다시 한번 압실론이 손가락을 마찰해 소리를 냈다. 이번엔 아예 주위의 풍경이 사라지고, 압실론과 나 사이엔 오로지 검은색 공간과 숫자만이 남게 되었다. 0과 1의 폭풍. 압실론이 사랑스럽다는 듯 내게서 떨어지는 숫자 부스러기를 매만졌다. 0과 1은 압실론에게서도 나오고 있었지만, 내 주위에 압도적으로 많았다. 나는 멍하니 내게서 피어오르고 부스러지는 숫자들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아름다운데, 어떻게 이현이 아닐 수가, 있겠어.”
압실론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쩐지 압실론이 아득한 곳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온몸에 소름이 일었다. 이런 녀석에게서 과연 내가 도망칠 수 있을까.
나는 한껏 마나를 끌어 올렸다. 시간을 다루는 압실론의 앞에서는 소용없을 짓이긴 했지만, 적어도 저번처럼 무력하게 끌려들어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는 걸 선택한다면 그건 누구의 압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수한 나의 의지에 의해서여야 했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거대한 마나가 실시간으로 빠져나갔다. 0과 1의 부스러기가 내 주변을 맹렬한 속도로 휘몰아쳤다. 압실론은 그걸 보고도 별로 긴장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현, 훈련 열심히 했나 봐.”
그저 순수하게 감탄할 뿐. 압실론은 황홀하다는 듯 그 폭풍을 바라보다 천천히 양손을 들었다.
“이현을, 어떻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그걸 어떻게 믿어.”
눈가를 찌푸리며 고민하던 압실론이 말했다.
“말로는 안 믿을 것 같으니…… 맹세라도 할까?”
모든 마법사들이 가장 꺼리는 행위를 입에 올리면서도 압실론은 여전히 여유로워 보였다. 뭔가를 더 가지고 있는 걸까. 압실론의 능력이 이 정도까지 온 이상 아무 소용 없을지도 모르지만, 맹세라도 하는 편이 더 안심이 될 것 같았다.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압실론이 손끝에서 양피지 한 장이 피어올랐다. 은은한 미색에 주위가 금박으로 장식된 양피지는 내가 일전에 아셀과 계약할 때 썼던 양피지보다 예닐곱 배는 더 값이 나가 보였다. 그는 공중에 양피지를 띄워 놓고 거침없이 글을 써 내려갔다.
[나 압실론 디트크리프는 나의 삶이 이어지는 한 언제나 이안의 편에 설 것을 약속합니다.]
“이제는, 믿을 수 있지?”
“아니, 부족해.”
“뭘, 더 해야 하는데……?”
“일단, 먹을 것에 독이나 약을 타지 않는다. 특히, 꿀케이크에.”
“……적었어.”
압실론이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었다. 나는 줄줄이 압실론의 만행을 읊었다. 압실론의 표정이 점점 우울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