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뭐?”
“내가 아까 말했잖아. 널 오해한 데에 충분한 보상을 해 주겠다고.”
그랬었나?
‘충분히 보상할 거야. 그리고 네가 원한다면 신분도 줄게. 검사…… 는 실력이 없으니 못 하겠지만, 마법사는 할 수 있을 거야.’
실력이 없다는 말에 꽂혀서 몰랐는데,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나랑 같이 수도에 가자.”
마티어스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위치에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지한 시선에 숨이 턱 막혀 왔다.
“나, 나는…….”
계속 피하고만 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건 안다. 하지만, 만약 정체가 밝혀지면? 이곳저곳 자유롭게 다니며 숨통이라도 트인 지금과 달리 지하에서 평생을 살다가 죽겠지. 그들과 언젠가 정면으로 대면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막상 때가 다가오자 두렵게 느껴졌다.
“수도 한 번도 안 와 봤다고 했지. 너도 보면 좋아할지도 몰라.”
내가 주저하고 있는 걸 시골 쥐의 걱정이라고 생각했는지 마티어스는 수도의 좋은 점에 대해 열렬히 말하기 시작했다.
“전쟁 중이라고는 하지만 네가 다칠 일은 없어. 넌 안전해.”
“…….”
“대련도 매일 하다 보면 실력이 늘 수는 있겠지. 그러다 몇 년 지나면 기사 시험 볼 수도 있을 거고.”
얌전히 마티어스의 말을 듣고 있자니, 뭔가 이상했다.
얘, 왜 이렇게까지 절박하지?
나는 패닉에 빠지는 대신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티어스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좋은 조건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가 별다른 반응이 없자 수도 코앞 이층집을 내 명의로 해 주겠다고까지 하고 있었다. 부동산으로 사람을 꼬시는 건 아주 바람직한 플러팅이긴 하다만, 원래 얘가 이런 놈이었나?
아니었지. 사사건건 매일 싸우고 화해하고 화해하다 싸우길 반복했었다. 그러다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가 목숨 구해 주고 나서야 좀 나아졌고.
계속 거기에 대해 생각하던 나는 어떠한 가설에 도달했다.
“이층집 전경이 얼마나 좋냐면…….”
“너, 혹시 나 좋아해?”
“……뭐?”
이층집의 전경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마티어스가 내 질문에 얼어붙었다. 그러더니 어둠 속에서도 보일 만큼 온몸이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무슨……!”
“아니야?”
“우리는,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그래서, 아니야?”
집요하게 물어 오자 마티어스는 결국 내 시선을 피해 고개를 떨구었다.
“……맞아.”
“……정말로?”
“……그래.”
마티어스가 내 손등 위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자꾸만 네가 생각나. 네가 옆에 있어도 보고 싶고, 꼬물꼬물 뭐 만들고 있는 모습 보면 귀여워 미칠 것 같아.”
“어…… 언제부터 그랬는데?”
“……처음부터.”
처음부터 그랬어.
마티어스는 한껏 욕심을 부린 듯한 손길로 겨우 내 뺨을 만졌다. 닿기만 해도 뺨이 녹아내릴 것처럼 그의 체온은 뜨거웠다.
“처음엔, 네가 이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
“네가 좋아. 계속해서 함께하고 싶을 정도로.”
가슴 떨리는 고백이었지만, 내 마음은 서늘하게 식어 갔다. 그가 절박하게 나올수록 조금 전 세웠던 가설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마티어스는 한눈에 반한 게 아니었다. 그저 이현의 환영을 쫓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모습을 바꿨다고 해도 본질적으로는 같은 사람이었다. 마티어스가 이현과 이안을 다르게 인식한다 한들, 시스템은 정직했다. 이현에게 가지고 있던 호감도가 이안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데다, 심지어 안 좋은 인연은 전부 걸러졌으니 내가 좋을 수밖에.
이대로는 수도에 간다고 해도 똑같을 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멍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입 맞춰도 돼?”
“……어?”
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사락거리는 모래 소리, 부스러지는 파도 거품, 높이 떠 있는 밤하늘, 무인도라는 배경이 주는 낭만에 마티어스는 잔뜩 취해 있었다. 심지어 나조차도.
이대로 괜찮은 건가. 아직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는데. 내가 망설이는 새 마티어스의 아랫입술이 내 입술에 조심스레 부딪쳐 왔다. 온몸이 단단한 녀석에게 이렇게 부드러운 부분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티어스의 입술에서는 바다 맛이 났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훑은 녀석이 이내 내 뒷머리를 가볍게 쥐고 고개를 틀었다.
“음…….”
잇새를 살짝 벌린 것만으로도 막힘없이 혀가 안쪽으로 침범했다. 마티어스의 셔츠 자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치열과 입천장을 훑는 감촉이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조금 전에 했던 고민들은 이미 강한 입맞춤에 전부 휘발된 후였다.
“응, 읏, 으…….”
질척한 입맞춤에 저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마티어스는 때때로 흥분감을 조절하지 못하고 내게 달려들었다. 우리가 앉아 있던 깔개가 모랫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열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몸을 자꾸만 뒤로 빼는 내가 불만스러웠는지 마티어스가 내 허리를 잡고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중심을 잃은 나는 그대로 깔개 위에 풀썩 쓰러졌다.
“읏, 자, 잠깐……. 흐…….”
너무 빠른 진도에 당황해 마티어스를 슬쩍 밀어 보았지만, 어찌나 힘이 센지 도무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억지로 무언가를 하려는 건 아니었다. 입맞춤 한 번에 이성이 날아가 버린 것뿐.
“허, 헉…….”
내 다리 사이로 마티어스의 다리가 깊게 파고들었다. 나는 당황해 더운 숨을 토해 냈다. 그의 셔츠를 붙잡고 몸을 빼려고 했지만 묵직한 녀석의 몸을 떨쳐 내긴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리고…….
“하아, 너무 좋아…….”
내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티어스의 모습을 관람하는 게…… 꽤 즐겁기도 했다. 뒤통수를 전부 덮은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이 점차 아래로 내려갔다. 바지 자락 속으로 파고드는 손가락에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그, 그만……!”
아직 여기까지는 준비가 안 됐다고!
속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는데 마티어스의 몸이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마티어스?”
마티어스가 눈을 뜬 채 얼어붙어 있었다. 꼭 마티어스의 주변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의 마법적 재능이 너무 뛰어나 이렇게 발현한 건가 생각하고 있는데,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그만, 하라잖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눌러쓴, 섬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 서늘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
“으윽……!”
그때 마티어스가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다가 수면 위로 올라온 것처럼 거친 숨을 내뱉었다. 마티어스는 마치 나를 보호하듯 끌어안으며 로브를 쓴 남자를 노려보았다. 걸려 있던 마법을 무리해서 풀었는지 마티어스의 온몸이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너, 돌았어?”
“그렇게까지 안, 해도 금방 풀어 줬을 텐데.”
잔뜩 흥분해서 화를 내고 있는 마티어스와 달리 남자는 시종일관 건조한 태도를 유지했다. 어둠 속에서도 서늘하게 빛을 내는 눈동자가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로브를 뒤로 당기며 우리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검은 머리카락이 물결치듯 어깨 밑으로 흘러내렸다. 마티어스가 탄식하듯 그의 이름을 읊었다.
“압실론.”
나 역시 그의 정체를 진작 깨닫고 있었다. 아는 척할 수 없으니 말하지 않았을 뿐. 나는 마티어스를 향해 조용히 물었다.
“네 친구야?”
“이젠 아니야.”
마티어스가 살벌하게 답했다. 진짜 화났나 보네.
오랜만에 보는 압실론의 모습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나와 헤어진 뒤 한 번도 자르지 않았는지 머리가 어깨를 넘어 가슴께까지 와 있었고, 뺨은 조금 더 홀쭉해져 있었다.
뭔가…… 어른스러워진 것 같네.
우리 중 가장 늦게까지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남아 있던 압실론은 이제 완연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압실론을 관찰하듯 압실론 역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모습을 바꾼 뒤에도 제일 마주치지 않고 싶었던 상대는 단연 압실론이었다. 이 게임 시스템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어디까지 모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사이 상태 창이라도 볼 수 있게 되어 버린 건 아닌지, 나인 걸 눈치채 버리는 건 아닐지 두려웠다.
나는 조용히 몸 안의 마나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마나가 돌며 본인 외에는 볼 수 없는 푸른 전류가 온몸을 감쌌다. 9클래스에 진입하지 못했으니 압실론을 이길 수는 없겠지만, 허투루 수련해 온 건 아니었다. 적어도 한 차례 허점을 만들 수는 있겠지. 마티어스를 만난 뒤, 나는 내게 몇 가지 금제와 주술을 걸어 놓았다. 내 몸에 주술을 걸거나 강제로 장신구를 착용시키려면 적어도 손 하나는 내줄 각오를 해야 할 터였다.
넘치기 직전의 댐 위로 천천히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을 응시하고 있는 듯한 감각이 이어졌다.
“오랫동안 안, 돌아와서 이번엔 찾은 줄 알았더니.”
다행히 압실론은 나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덩달아 긴장하고 있었는지 마티어스가 짧은 숨을 들이켰다.
“곧 돌아갈 생각이었어.”
“평생 살 것, 같던데.”
“……아니야. 이미 같이 돌아가자고 말했어.”
“같이 돌아가자고, 말했다고?”
압실론이 나를 향해 다가오더니, 내 앞에 쪼그려 앉았다.
“너는, 이름이 뭐야?”
“……이안.”
뭐든 꿰뚫어 볼 것 같은 눈동자가 나를 계속해서 응시했다. 마티어스와 루드비히의 시선이 맹수 같고, 체자레의 시선이 여유로운 포식자 같다면, 압실론은 마치 곤충 같았다.
“평범하게 생겼는데…… 이현이랑 닮았네.”
사마귓과의 거대한 육식 곤충이 앞발을 쳐들고 사냥감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 등줄기에 소름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