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안 그래도 이번 가을에서 겨울 즈음 토벌 준비를 해 볼 생각이야.”
“지, 진짜?”
“그래. 계속 수도에 던전을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그렇구나…….”
얼떨결에 엄청난 정보를 얻게 된 나는 돌아와서도 한동안 멍하니 자리보전했다. 저녁을 먹으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나를 보며 마티어스가 낮게 혀를 찼다. 내심 내게 그 이야기를 한 걸 후회하는 눈치였다.
“……할 거야?”
“어?”
“나 저녁 수련 할 건데, 같이 하겠냐고.”
“아, 그래. 그러자.”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고 해 놓고 걸음을 옮기지 않아 올려다보니, 마티어스가 낯선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뭘 봐?”
“이럴 땐 진짜 아닌 것 같아서.”
“……아니라니까. 난 선량하게 살아온 소시민이라고.”
변명하듯 말하면서도 우울했다. 이대로 점점 오해하게 두는 게 맞는 걸까. 이제 이들이 어디에 있든,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이들을 잊지 못할 텐데.
우리는 저녁 훈련을 마치고 가볍게 뛰며 섬을 돌았다. 내일부터는 마법 훈련도 함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나를 불렀다.
“이쪽으로 와.”
“응? 왜?”
“일단 따라와 봐.”
마티어스는 말없이 캄캄한 숲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부엉이 우는 소리가 어째 음산하게 들려 불안했다. 이대로 날 쓱싹하고 숲에 묻어 버릴 셈은…… 아니겠지.
어차피 여긴 우리 이외엔 아무도 없는 무인도였고, 누구 하나 죽인다고 해서 처벌받을 마티어스가 아니었다. 귀찮게 숲속으로 들어가서 날 처리할 이유가 없었다…… 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조금 겁에 질린 상태로 그의 뒤를 따랐다.
“어?”
섬 뒤편으로 돌아 10분 정도 올라갔을 때 반짝거리는 무언가를 본 나는 탄성을 뱉어 냈다. 작은 샘터였다.
앙증맞은 샘은 사람 두셋이 들어가기 딱 알맞아 보였다. 손바닥 크기만 한 요정들이 물가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어쩐지 구름이 껴 하늘이 어두운 편이었는데 가는 길이 잘 보인다 싶더니, 곳곳에 요정의 가루가 떨어져 길을 밝히고 있던 거였다.
“요정의 샘이구나.”
“그래, 여기라면 물뱀도 없겠지.”
사실이었다. 귀엽고 작은 외모에 비해 요정들의 성격은 몹시 포악한 편이었다. ‘선’ 계열에 속한 요정은 특히 ‘악’ 계열인 몬스터들에게 강했고, 자비가 없었다. 어찌나 포악을 떨어 대는지 지능이 떨어지는 오크나 고블린도 요정을 보면 설설 기며 피해 갈 정도였다. 그래서 요정들의 주위엔 몬스터가 없었다.
그러나 요정들은 인간만은 공격하지 않았다. 인간을 좋아하거나 사랑해서는 아니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한다는 속담과 딱 맞았다. 인간에게선 요정들이 견딜 수 없는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때가 타지 않은 어린아이는 괜찮다는 말도 있는데, 정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었다.
나는 신나서 겉옷을 벗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딱 알맞게 따뜻한 물이 고단한 피로를 씻어 주었다. 마음 놓고 수영할 만큼 넓진 않았지만, 오붓하게 앉아 있을 만큼은 되었다. 내가 들어왔을 때 조금 동요하던 요정들은 마티어스가 들어오자 샘에서 다섯 발자국 떨어진 나무 위로 줄행랑을 쳤다. 불청객이 불만스러운지 나뭇가지에 옹기종기 모여 우릴 째려보는 시선이 따가웠다.
여기저기 요정의 불빛이 널려 있어 밤인데도 조명을 켜 둔 것처럼 환했다. 마티어스가 들어오자 샘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하여간 덩치 하나는 제일 크다니까. 어떻게 저 몸에서 저 속도가 나오는지.
“……거야?”
“응? 뭐라고 했어?”
세수를 하고 있는데 등을 맞대고 씻고 있던 마티어스가 물어 왔다.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마티어스가 말했다.
“내일도 대련할 거냐고.”
“응. 너만 괜찮다면 쭉 하고 싶은데…… 왜?”
“내일부턴 안 봐줄 건데 정말 괜찮겠어?”
오늘도 봐줬다는 생각은 안 들었는데…… 얼마나 무자비하게 잡아 패려고 이런 말을 하는지.
“응……. 괜찮아.”
나는 경계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훈련하는 것보다 녀석과 한 번 대련할 때 실력이 더 많이 느는 걸 확실히 느꼈다. 나는 씩 웃으며 마티어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마티어스가 묘한 표정으로 내 손을 내려다보며 침묵했다. 민망해지기 직전, 마티어스가 내 손을 맞잡았다.
“그래.”
굳은살이 잔뜩 박인 마티어스의 손바닥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악수를 한 다음에도 마티어스는 손을 놓지 않았다. 미간에 주름이 질 정도로 대놓고 관찰하는 태도를 지적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이제 좀 놔줬…….”
……으면 좋겠다고 말하려 하는데 마티어스가 내 쪽으로 갑자기 손을 뻗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지금 뭐야, 키스하려고 하는 거야?
나는 잔뜩 얼어붙은 채로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의 진지한 낯이 점차 가까워져 갔다. 눈을 감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크고 두툼한 손가락이 뒤통수를 슬며시 짚었다. 혼란의 도가니를 눈 뜨고 볼 수가 없어 눈을 질끈 감는데, 놀랍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그저 우직하게 뒤통수를 어루만지는 손길만 있을 뿐.
나는 눈을 뜨고 황당한 시선으로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뭐 해?”
“……찾는 게 있어서.”
“뭘 찾는데?”
“음, 머리를 쨌다가 꿰맨 흔적?”
마티어스의 말에 나는 단박에 얼어붙고 말았다. 예전, 과다한 게임 이용으로 녹아내린 구형 칩을 제거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흉터를 찾고 있던 모양이었다. 루드비히가 이런 것까지 다 얘기했나 보네.
하지만 그런 흔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이안의 주술에 의해 완전히 다른 몸을 얻게 되었으니까. 종족을 바꾸는 것도 가능한데, 그 정도 흉터가 사라지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쯤에서 한마디 하긴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마티어스의 손을 치며 차갑게 대꾸했다.
“솔직히 계속 이렇게 의심하고 확인하려고 드는 거 나 좀 불편해.”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마티어스가 다급히 손을 떼었다.
“……그렇겠지. 미안해.”
“어?”
나는 당황해 화내려고 했던 것도 잊고 마티어스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팔짱을 낀 채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아닌데 계속 의심받으면 기분 더러운 거 알거든. 정말 미안하다.”
“어……. 그래.”
이렇게 순순히 사과를 할 줄은 몰랐는데.
멋쩍어진 나는 괜스레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쩐지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요정들이 우리의 그런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마티어스가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마티어스의 몸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수면 위로 튕기며 맑은 소리를 냈다.
“여기, 둘이 목욕하기엔 좀 좁네. 먼저 해. 내가 나중에 할게.”
“그, 그래. 알았어.”
마티어스가 물 밖으로 나가자 나는 한결 편하게 목욕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클린 주문으로 한 번에 깨끗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샘에서 하는 목욕은 그냥 몸을 씻는다는 행위보다 어쩐지 조금 더 각별한 느낌을 줬다. 가방만 있었어도 비누를 사용해서 더 뽀득뽀득하게 씻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좀 아쉬웠다.
나는 마티어스가 뒤돌아 검을 손질하고 있는 걸 보고 속옷까지 마저 탈의했다. 조선 시대도 아니고, 속옷 입고 목욕하는 건 사실 좀 불편했다. 태초의 상태로 돌아간 나는 몸 구석구석을 박박 닦아 냈다. 그런 내 모습을 요정들이 빤히 보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아까보다 좀 가까워진 것 같다……?
아까는 저 뒤의 나무에 있지 않았나?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요정 하나가 뽀르르 날아 내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뭐, 뭐야?”
“왜 그래?”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는데 그 말을 들었는지 마티어스가 작업을 멈추고 뒤를 돌려고 했다. 나는 다급하게 외쳤다.
“뒤돌아보지 마!”
당황한 나는 다소 고전 공포 영화 대사 같은 말을 뱉었다. 속옷도 안 입고 있단 말이야! 마티어스가 당황한 와중에도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내게 물었다.
“뭐야, 뭔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큰 목소리에도 요정은 겁먹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분홍빛이 도는 살결에 연한 연둣빛 날개를 팔랑거리는 요정은 확실히 아름다웠다. 상태 창을 꺼 놔 아무런 알림이 안 뜨긴 했지만, 켜 놨다면 [불가사의한 경험을 했습니다. 화술이 5 오릅니다.] 뭐 이런 창이 뜨지 않았을까.
내가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다른 요정들이 하나둘씩 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얘네 고블린 해치우는 거 보니까 진짜 난폭하던데…….
나는 요정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살며시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을 물어 버리는 건 아닌가 싶으면서도, 모두에게 새침하고 난폭한 고양이에게 간택 받은 기분에 손 뻗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손을 뻗자 요정들은 옹기종기 모여 무어라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대화를 했다. 그러다 개중 몸집이 아주 조금 더 큰 요정 하나가 내게 다가와 내 손끝 위에 섰다. 무당벌레보다는 조금 더 무겁고 참새보다는 조금 더 가벼운 어떤 것이 내 손가락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진짜 귀엽다…….”
나는 입을 헤 벌리고 요정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나한테 왜 온 걸까. 마티어스는 싫어하는 것 같던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하던 나는 일전에 이안이 내 모습을 바꾸어 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인간보다는 엘프에 가깝습니다. 주술에 걸린 당신은 인간도 엘프도 아닌 어중간한 존재가 될 거예요. 뭐, 나쁠 건 없죠. 동물과 요정에 대한 친화력이 높아질 테니까요. 대신 육식을 좀 꺼리게 될 수도 있긴 하겠군요. 괜찮겠어요?’
그땐 그냥 대수롭지 않게 듣고 넘겼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래서 얘네들이 나한테 온 거구나 싶었다.
상당히 귀한 장면이었기에 나는 내 손 위에서 노닐고 있는 요정들을 눈에 잘 담아 놨다.
“하하, 귀여워…….”
요정들도 내가 마음에 드는지 내 주위를 빙빙 돌면서 빛을 흩뿌렸다. 헤벌쭉하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안! 이리 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