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확실히 예전에 황궁 지하에서 대련했을 때보다는 덜 봐주는 느낌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다른 황궁 기사들과 같이 취급해 주는 것도 아니지만. 철저히 외부인과 대련하는 느낌에 다정함을 한 스푼쯤 섞은 느낌이랄까.
집중력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계속 대련하는 건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특히나 계속 공격만 하는 입장에서는 더. 결국 나는 ‘마티어스를 이기자!’에서 ‘한 대라도 때려 보자!’로 계획을 변경했다.
어깨를 공격해 막히면 옆구리를 공격하고, 옆구리를 공격해 막히면 머리를 공격했다. 숨이 찬 척을 하며 행동을 점점 느릿하게 하다가, 마지막에 온 힘을 다해 마티어스의 갈비뼈 부근을 노렸다. 마티어스가 당황한 듯 나뭇가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옅은 분홍색이었던 검기가 순간적으로 붉게 변했고, 목검은 나뭇가지와 접촉하자마자 단박에 두 동강이 났다. 빠악! 운 나쁘게도 부러진 목검 조각은 내 이마를 강타했고, 나는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온몸이 젖어 있고-주로 상체 쪽으로- 뺨이 무지막지하게 아팠다. 기절한 나를 보고 놀란 마티어스가 물을 붓고 뺨을 때린 거였다.
이마엔 정말 만화 같은 혹이 났고, 뺨은 퉁퉁 부었다. 거울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그 얼굴을 보면 마티어스에게 더 화가 났을 것 같으니까.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자그마한 약초 주머니를 들고 시무룩하게 서 있는 마티어스를 보며 나는 한숨을 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리가 좀 어지럽긴 해도 걸을 만했다.
“됐으니까 이제 일어나. 물이나 뜨러 가자.”
“어?”
“네가 나한테 부어서 물 다 떨어졌잖아.”
나는 텅 빈 채 모래사장을 뒹굴고 있는 물통을 집어 들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티어스가 그런 나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어쩌면 넌 진짜 이현이 아닐지도 모르겠네.”
“뭐?”
뜨끔해서 뒤를 돌아보자 그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통을 들고 따라오고 있었다.
“내가 찾고 있다는 사람. 걔 이름이 이현이거든.”
경사 있는 산을 오르면서도 마티어스는 숨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 그래?”
“근데 걘 내가 아는 애 중에 제일 게을러.”
뭐, 임마?
“게다가 엄살도 얼마나 심한지, 상처 하나 나면 삼 일 밤낮은 쉬려고 들지.”
“그것참…….”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네. 아니, 그래도 그건 갇혀 있는 태평성대(?)에만 그랬지, 전쟁 중에는 나름 필사적으로 싸우려고 했다고. 직업이 마법사다 보니 근접전을 안 해서 상처가 안 났던 것뿐이지.
나는 입을 삐죽이며 어느새 앞서서 걷고 있는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내 이야기를 하는 마티어스는 제법 즐거워 보였다. 평소와는 달리 미미하게 떠 있는 웃음기가 그걸 증명했다.
“그리고, 너처럼 검을 잘 쓰지도 않고.”
“나, 나 검 잘 써!?”
의외의 칭찬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웬일로 얘가 칭찬을 다 해 주지.
“물론 아직 나한테 댈 건 아닌데, 잘하더라. 걘 진짜 실력이 쓰레기였거든. 심지어 연습도 대충대충 했지.”
“…….”
나인 걸 알고 일부러 도발하는 건가 싶을 만큼 악평이 이어졌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티어스를 흘겨보며 말했다.
“근데 넌 걔 좋아했던 것 같은데.”
“……뭐?”
“지금 걔 험담하면서도 눈이랑 입이 웃고 있잖아.”
“그런 거 아니야.”
단박에 아니라고 잘라 냈지만, 나는 그의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는 걸 눈치챘다.
흐흥. 콧노래를 부르며 마티어스를 곁눈질하던 나는 지금껏 그에게 내 이름을 알려 준 적이 없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궁금하지도 않나. 왜 안 물어보지?
“그런데 너, 내 이름 안 물어보네?”
“네 이름?”
“그래. 보통 누군가를 찾을 땐 이름부터 물어보기 마련이잖아.”
“걔가 바보도 아니고 진짜 이름을 대겠냐. 그리고 나 네 이름 알아.”
“내가 알려 준 적이 없는데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이안이잖아.”
마티어스의 말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언젠가 내가 얘기해 준 적이 있나?
“어, 어떻게 알았는데?”
“너 잘 때 물어봤어. 네 이름이 뭐냐고. 대답 잘해 주던데.”
“세상에, 너 진짜 비열하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혀를 찼다. 이안 이름 빌려 살길 잘했다. 다행히 이안이라는 이름은 이 세계에서 무척 흔한 편이었다. 시골 마을에 가면 남자 10명 중 3명은 한스, 2명은 페터, 1명은 이안이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마티어스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뿐이야.”
“나 잘 때 또 다른 건 안 했겠지?”
“또 다른 거 뭐?”
“뽀뽀한다거나…….”
“내가 미쳤냐?”
마티어스가 드물게 정색을 했다. 수상하네, 얘 진짜 한 거 아니야?
“그런 거 하고 싶다고 생각한 건 지금까지 한 명밖에 없어.”
“아, 음……. 그렇구나.”
그리고 그건 높은 확률로 나겠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마티어스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널 이름으로 안 부르는 건 내가 찾고 있는 사람과 네가 헷갈려서 그래. 아니라는 확신이 들면, 그때부턴 이안이라고 부를게.”
“그, 그래. 그럼 나도 그때부턴 마티어스라고 부를게.”
“넌 형이라고 불러, 임마.”
마티어스가 나를 툭 치며 씩 웃었다. 나도 따라 웃어 주려다 퉁퉁 부은 뺨이 아파 그만두었다.
“만약에 걔를 찾게 되면,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약간의 기대감을 안고 물음을 던졌다. 얘는 아직 날 좋아하긴 하니까. 꿈에도 내가 나오고, 내 이름을 부르면서 울 정도로. 1년이 훌쩍 지났으니 지금은 화도 좀 풀리고, 그리움만 남지 않았을까.
“죽여 버릴 거야.”
한 치의 고민도 없는 즉답이었다. 허공을 노려보는 마티어스의 옆모습이 적과 합을 겨룰 때처럼 날카로웠다. 나는 쥐고 있던 물통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써야 했다.
“입만 열면 거짓말에, 믿어 달라 해 믿으면 뒤통수치고 도망칠 줄만 아니…… 차라리 죽여서 얌전히 옆에 둘 수밖에.”
“…….”
정체를 밝힐까 잠시 고민했던 마음을 싹 사라지게 만드는 살벌한 표정과 말투였다. 마티어스가 불시에 뒤를 돌아 나를 바라보더니 팔꿈치로 나를 툭 쳤다.
“네 얘기 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쫄아 있어?”
“네 표정 지금 엄청 무섭거든? 옆에 누가 있든 잡히기만 하면 족칠 것 같은 말투라고.”
“걱정 마. 난 네가 마음에 들거든. 조금 거슬린다 해서 함부로 죽이고 그러진 않을 거야.”
“…….”
마티어스는 잔뜩 얼어붙은 나를 달랬지만, 사실 전혀 도움이 되진 않았다. 우리는 정상에 올라 물을 뜨고 하산할 때까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산 중턱에 다다르자 한낮의 햇살을 받은 호수가 보였다. 나는 느릿하게 걸으며 호수 위의 빛 부스러기를 감상했다.
“목욕할래?”
“어?”
“하고 싶어서 본 거 아니야?”
“아니야, 뱀 소굴에서 목욕은 무슨.”
물뱀이 물속에서 우글거리던 장면을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다 죽이고 하면 되지.”
“으윽, 그건 더 싫어. 뱀 핏물로 목욕하는 셈이잖아.”
“이상한 데서 결벽증이 있네.”
“이건 결벽증이 아니라 평화주의라는 거야.”
내 말에 마티어스가 나를 홱 돌아보았다. 무언가에 놀란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표정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뭐 잘못 말했나.
“왜, 왜 그러는데.”
“아니, 방금 네 말투가 내가 아는 애랑 너무 똑같아서.”
‘내가 아는 애’는 분명 나겠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화제를 뭘로 돌릴까 고민하다 섬 주변을 날아다니는 비행형 몬스터를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몬스터가 정말 많아졌네.”
“이 정도는 수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지긋지긋하다는 듯 마티어스가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대화의 물꼬가 다른 쪽으로 트였다. 나는 잘됐다 싶어 수도의 이야기를 물었다.
“맞아, 수도는 아예 던전이 생겼다며. 거긴 상황이 좀 어때?”
“뭐야, 너 모험가라면서 수도 한 번도 안 가 봤어?”
“시골 애들은 원래 시골에서 평생 살아. 내가 여기까지 나온 것도 기적이거든?”
사실 가 봤어. 수도의 중심인 황궁에서 살아 보기도 했단다. 몬스터가 창궐하기 직전에 빠져나갔지만.
“이거 완전 촌놈이었네. 나중에 놀러 와. 수도 구경시켜 줄 테니까.”
“가면 몬스터한테 잡아먹히는 거 아니야?”
“수도 전체에 방어 결계를 쳐 놔서, 바깥에서 몬스터가 쳐들어올 걱정은 안 해도 돼. 던전 근처는 안전하다고 하긴 어렵지만.”
“많이 심각한가 보네.”
“계속해서 나오면 확실히 좀 지치지.”
“던전을 아예 토벌하는 건 안 되는 거야?”
던전은 종종 생성되는 이벤트 같은 거였다. 몬스터의 수준도 그렇게 높지 않아서 다섯이 모여 하룻밤 만에 토벌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좀 곤란해졌어.”
“왜?”
“드래곤이 있거든.”
“……?”
나는 이해하지 못해 의아해하다 뒤늦게 펄쩍 뛰어올랐다.
“드, 드래곤이 있다고?”
“그래.”
귀찮다는 듯 마티어스가 한숨을 후, 내쉬었다. 전쟁터와 던전을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몬스터를 해치워 봤지만, 드래곤이 나타난 건 처음이었다. 드래곤 아종을 처리하다가 죽을 뻔한 경험이 있던 나로서는 드래곤 자체가 나타났다는 말에 겁에 질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얼어붙어 있자 나를 본 마티어스가 나를 툭 치며 씩 웃었다.
“뭘 그렇게 얼어붙어 있냐? 여기까진 올 일 없으니까 괜찮아.”
“그,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