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비슷비슷한 학창 시절이었다. 고등학생쯤 되자 부쩍 사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여전히 ‘반에서 제일 재미있는 애’로 통했기에 고백은 종종 받았다. 남자에게도 받고 여자에게도 받았다. 모두 거절했다. 누군가와 육체와 감정을 교류하는 게 생소하고 두려웠다.
날것의 감정을 쏟아붓고도 유지될 수 있는 관계를 겪어 본 적이 없기에 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서툴렀다. 피가 끓는 학창 시절에도 나는 누군가와 싸워 본 적이 없었다. 참고 참다가 끊어 내기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나는 이따금 가장 약한 감정에도 무너져 내렸다. 속은 이미 문드러져 건드리기만 해도 풀썩 가라앉을 것 같았다.
나를 위해 돈을 번다는 부모님의 말이 지긋지긋했다. 그들에게서 나를 지워 버리고 싶었다. 중학생 때부터 배운 코딩으로 프로그램을 몇 개 만들었다. 그중 몇 개는 개인에게 판매했고, 몇 개는 기업에 대여했다. 대학에 들어갈 무렵엔 원룸을 얻을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집을 나왔고, 그때부터 부모님의 돈은 받지 않았다.
비싼 가상 현실 게임 기계를 산 것도 그 일환이었다. 일단 구독자를 어느 정도 모으기만 하면 방송으로 성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팬을 다루는 방식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을 대해 왔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하지만 그 속에서 처음으로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 날것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상대가 생겼다. 나는 그 가상 세계에서 마음껏 싸우고 울고 웃었다. 겨우 연애 시뮬레이션-물론 스케일이 크긴 하지만-인 <소년들>을 그렇게 오랫동안 돌린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넷 모두에게 고백받았을 때는 물론 기뻤지만,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AI의 고백에 가슴 설레어하는 내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로봇 산업이 많이 발달해 있고, 로봇과 결혼하거나 함께 사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는 걸 알면서도 나는 내심 사람 간의 관계를 동경했다.
군대에 갔을 때 내 방송을 봤다는 선임이 있었다. 동성혼은 합법화되었지만, 군대는 여전히 폐쇄적이었다. BL 게임을 했던 BJ가 환영받는 자리는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돈을 벌기 위해 그랬다고 항상 변명하고 다녔다. 루드비히 개새끼 해 봐, 하면 생글생글 웃으면서 “루드비히 개새끼!” 하고 다녔다.
그러나 선임이 누군가로부터 나를 옹호하기 위해 얘는 돈 벌려고 했던 거라는 말을 대신해 줬을 땐 심장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처음으로 방송을 괜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대를 하고 나서도 <소년들>엔 들어가지 않았다. 수술 이후 현타가 오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다. 그들이 주는 안락한 애정에 안주하는 순간, 밖으로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가상 현실 게임에 빠져 이 세상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을 비난했다.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들을 이해했다. 어떻게 이해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런 사람이었는데.
사람은 금방 변한다.
지금까지 인간의 삶에서 변치 않는 사랑을 주는 건 강아지 정도였다.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좋아하는 유전자가 있다나. 그러나 개는 사람과는 다르다. 대부분 사람보다 나으나, 사람을 대체할 수는 없다.
사람을 닮았으나, 변하지 않는 애정. 나보다 큰 체구를 가지고 내게 다정하게 건네는 포옹. 같은 것을 보고 더 먼 것을 생각할 수 있는 능력. AI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에게 주어진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아픔이다. 그 애정과 사랑에 흠뻑 빠져 본 적 있는 사람이 그곳에서 과연 헤어 나올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이 생각날수록 애써 그들을 잊고 대학 생활에 열중했다. 표면적으로 살갑게 구는 것 외에도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려 노력했다. 잘되는 듯 보였다. 그렇게 세월을 보냈다. 그 과정에서 정말로 <소년들>을 잊기도 했다.
그사이 부모님은 결국 이혼했다. 마지막 부모의 도리라며 내게 본가를 남겨 주었다. 차익을 생각하면 쭉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거라는 말이 부모의 마지막 말이었다.
차라리 사고가 나서 죽기라도 했다면 마음껏 슬퍼하거나 사랑했다 자위라도 해 볼 수 있을 텐데, 그들은 각자의 인생을 너무도 잘 살아갔다. 평일에는 회사 직원들과 식사하고, 주말에는 거래처 사람들과 골프를 쳤다. 나를 이렇게 방치해 놓고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에 문득문득 화가 났다. 그러나 오래 지속될 만큼의 애정이 없었기에 화는 금방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본가로 들어가기 전날, 나는 다시 <소년들>을 꺼냈다. 감금 엔딩을 맞이해 버렸지만.
이번에야말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분노는 컸다.
가짜들 주제에, 감히 진짜인 나를.
그들을 낮춰 보았던 나는, 나를 동등하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화가 났다. 그들이 아무리 좋아한다고 속삭인들 달콤한 미래를 빼앗은 숙적처럼 여겨졌다.
왜 AI 주제에 잠을 자는 걸까. 왜 꿈을 꾸고, 과거를 생각하며 울게 만들어 놓았을까. 하필이면 왜 이렇게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어 놓은 걸까. 왜 화를 내고, 울고, 짜증을 내면서도 나를 사랑할까. 어째서 나를 포기하지 않을까. 왜 계속해서 나를 생각하며 괴로워할까. 이런 걸 해 주는 게, 어째서 너희들일까.
너희는 어째서, 온 집 안의 불을 켜 놓고 홀로 부모님을 기다리는 어린 시절의 나를 닮았나.
여기서 빠져나가기만 하면 가상 현실 게임엔 평생 접속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들 생각도 하지 않을 거라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그러지 못할 걸 알았다. 나에게 이렇게 해 주는 이들이 바깥엔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오랫동안 너희를 생각하고, 죽을 때까지 너희를 그리워하겠지.
나는 새카만 밤바다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 어둑한 밤이 지나가고, 희끄무레한 새벽이 올 때까지.
* * *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새벽을 맞이했다. 나는 눈물 자국을 간직한 채 곤히 잠들어 있는 마티어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마티어스가 내 손길에 슬며시 눈을 떴다.
“더 자.”
“……다 잤어.”
마티어스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매일같이 수련을 해서 그런지 마티어스의 기상 시간은 빠른 편이었다. 우리는 함께 섬을 한 바퀴 뛰고, 산 정상에 올라 맑은 물을 떠 왔다.
아침을 간단히 먹은 뒤 마티어스는 집의 벽을 세우고, 나는 마법 훈련을 할 가상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녀석이 자꾸 집적거려 쫓아내는 것도 일이었다. 섬에는 할 일이 널려 있었다. 해 뜨기 전에 일어났건만, 기초 작업을 끝내기 무섭게 점심시간이 돌아왔다. 통발에 들어 있던 물고기로 점심을 먹은 뒤 나는 마티어스에게 조심스레 제안했다.
“오늘부터 나랑 대련하지 않을래?”
기초 훈련을 며칠째 빼먹고 있었다. 이러느니 차라리 마티어스와 대련하는 형식으로라도 훈련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련?”
마티어스가 놀랍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을 쭉 내밀고 새침하게 물었다.
“그렇게 놀랄 일이야?”
“그냥, 좀 의외라서. 나야 좋지. 지금 할까?”
“그래, 그러자.”
식사가 끝난 뒤 밖으로 나오자 마티어스가 예쁘게 깎아 놓은 목검을 건네주었다. 내가 뒷정리를 하는 사이 만든 물건인 듯했다. 나는 목검의 매끄러운 표면을 만지며 감탄했다.
“아직 사포질 안 해서 좀 거칠 거야.”
“잠깐 사이에 이 정도면 괜찮지, 뭐. 그런데 네 건 아직 안 만들었어?”
“난 이거면 돼.”
마티어스가 흙바닥에 적당히 꽂혀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
무시에도 아주 정도가 있지. 나는 마티어스와의 마지막 대련을 생각해 보았다. 그땐 나뭇가지조차 안 들었으니 이만하면 장족의 발전이라고 해야 하나.
“그 나뭇가지, 내가 툭 건들면 똑 부러질 것 같은데.”
“걱정 마. 쉽게 부러지진 않을 테니까.”
마티어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나뭇가지를 들고 대련 자세를 취했다. 나뭇가지에서 불그스레한 기운이 피어올랐다.
설마 나뭇가지에 검기 실은 거야?
내가 황당하다는 듯 마티어스를 바라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씩 웃었다. 그래도 완전 장난으로 상대할 마음은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목검을 단단히 그러쥔 채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완전히 변한 나의 실력을 똑똑히 보여 줄 때였다.
“간다-!”
* * *
“아, 아야야야야야. 아파……!”
내가 꽥 비명을 지르자 마티어스가 움찔하며 약초 주머니를 내 이마에서 떼어 냈다.
“조금만 참아 봐.”
“으으, 알았……. 아, 안 되겠어. 너무 아파. 그냥 만지지 마.”
나는 이마에 난 혹에 약초 주머니를 다시 갖다 대려는 마티어스를 손을 휘저어 말렸다.
“여기 말고 다른 아픈 덴 없고?”
“네가 온몸을 두드려 팼으니 온몸이 다 아프지 않을까?”
뼈 있는 말에 마티어스가 뜨끔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조금 전 있었던 대련을 회상해 보았다.
초반의 몇 합은 내가 생각해도 꼴사나웠다. 1년 가까이 홀로 수련해 온 탓에 검을 어떻게 휘둘러야 하는지는 알아도 그 검법으로 사람과 대련하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초반, 마티어스는 내 실력을 가늠하려는지 공격하기보다는 시험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냥 장군이 된 건 아닌지 그는 아주 약간의 움직임만으로도 슥슥 내 공격을 피해 갔다.
몇 합 만에 실력을 파악한 마티어스는 방어에 치중하다가도 때때로 불시에 공격을 해 왔다. 나는 내 목을 꿰뚫을 듯 다가오는 나뭇가지에 기겁하며 뒷걸음질 쳐야 했다.
그냥 나뭇가지라면 좀 찔리고 말겠지만, 이 나뭇가지는 다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