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내가 이현이라는 걸 알면 끝난다는 얘기구나. 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의 중요성과 왕제 정치의 위험성에 대해 새삼 체감했다.
“전 진짜 무고한 시민인데…….”
“그런데?”
“이거…… 권력 남용 아닌가요?”
“내 권력 내가 남용하겠다는데, 뭐.”
그래, 너 잘났다.
“뭐, 잡아가서 조사하겠다는 거 아니야. 그냥 너 생활하는 모습만 보여 주면 돼. 난 뒤에서 가만히 보고 있을 테니까.”
“……불편해요.”
“감수해.”
“…….”
나는 애써 화를 삭이기 위해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얘 좀 바다에 수장시키고 떠날 순 없나.
……잠깐, 수장?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물론 마티어스를 수장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다. 나의 완벽한 계획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아 나는 입을 앙다물었다. 그 표정이 다소 꿍꿍이가 있어 보였는지 마티어스가 의심 어린 눈길로 나를 훑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까보다 한결 경쾌해진 걸음으로 항구를 향해 떠났다.
* * *
작은 항구였기에 배편이 적었다. 큼직큼직한 도시들로 향하는 배만 있었다. 무인도로 향하는 배를 물어보니, 그런 배는 없다고 했다. 나는 내가 가려고 골라 놓았던 무인도를 가깝게 스쳐 지나가는 배를 예약했다.
“저기일세.”
항구에서 배를 타고 2시간, 선장이 내게 초록색으로 뒤덮인 무인도 하나를 가리켰다. 아주 멀진 않았지만, 헤엄쳐서 가기엔 무리가 있어 보였다.
“그런데 나룻배 한 척 없이 어떻게 가려고?”
“하하…….”
나는 대답을 아끼며 희미하게 웃었다. 무언가 수가 있어 보였는지 선장이 걱정을 거두었다.
“그래, 자네가 알아서 하겠지.”
“예, 감사합니다.”
나는 선장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가방을 멨다.
“내 아들이 자넬 볼까 무섭구만.”
“왜요?”
“일곱 살인데, 모험가가 꿈이거든. 그런데 이런 자네 모습을 보면 아주 환장을 할 거야.”
“하하…….”
“몇 년 뒤에 내 아들이 놀러 갔을 때 해골로 발견되지나 말게.”
“노력할게요.”
무인도에는 왜 가려 하느냐는 선장에 물음에 모험가라 무인도 탐험을 하고 싶다는 답을 하자 그는 그야말로 뭐 씹은 표정을 지었다. 남 일인데 뭘 그렇게까지 반응하나 싶었는데 모험가가 꿈인 아들이 있을 줄이야.
나는 인적 드문 난간 위에 자리를 잡고 섰다. 잠깐 배 안의 매점에서 사과와 물을 사 온 마티어스가 저 멀리서 나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마티어스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넌 내가 배에 있으면 너한테서 못 벗어날 줄 알았지.
“뭐 하는…… 야-!”
나는 마티어스가 말을 잇기도 전에 난간을 박찼다. 마티어스가 뒤에서 소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유 비행.”
발끝이 물에 닿기 직전, 물과 기름이 나누어지듯 바닷물 위에 투명한 막이 생겼다. 바다 위에 서서 뒤를 바라보자, 마티어스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여유롭게 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너 같으면 서겠냐? 나는 밀짚모자를 덮어쓴 채 총총 달리기 시작했다. 바위섬, 돌섬, 쌍둥이 섬 등등, 내가 원하는 섬까지 가는 길에는 다른 섬이 수도 없이 많았다. 마티어스가 다시 돌아와 쥐잡듯이 주변을 뒤진다 해도 들키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동하면 그만이었다. 속 시원하게 떼 놓았다 싶어 웃고 있는데, 뒤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뭐지 싶어 슬쩍 뒤를 돌아보니 겁도 없이 바다에 뛰어든 마티어스가 하얀 포말을 가르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있는 곳까지 헤엄치려는 모양이었다. 너 헤엄치는 동안 나는 노냐? 하여간 객기 부리긴.
나는 느긋하게 걷기를 멈추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마티어스 역시 속도를 높여 헤엄쳤다. 올림픽에 나가도 될 것처럼 완벽한 수영 실력이었다. 머리가 떠오를 때마다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것만 제외하면 감탄이 일 정도였다.
하지만 너만 단련한 건 아니거든.
나는 막힘없이 바닷물 위를 달려 나갔다. 깊은 바다 한가운데인데도 얕은 볼풀에서 달리기하는 느낌과 비슷했다.
“그만 포기하고 배로 돌아가시죠!”
나는 진심으로 녀석을 위한 조언을 해 주었다.
“웃, 기는 소리!”
턱도 없다는 듯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신속의 장화 스킬을 추가했다. 속도가 확연히 빨라진 나를 보며 녀석이 분한 표정을 지었다. 치사하다고? 그럼 너도 마법 배우든가. 나는 광인처럼 웃으며 바다 위를 달렸다.
“하하하하하하!”
“저 미친 새끼…….”
그 욕설마저 내겐 짜릿하고 달콤했다. 그러나 20분 뒤, 나는 그 욕설과 비슷한 말을 뱉게 되었다.
“저 독한 새끼…….”
무인도에 도착해 주위를 탐색하고 있는데, 저 멀리 꼭짓점에 불과했던 마티어스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상어는 뭐 하나, 저런 놈 안 잡아먹고.
나는 푹 한숨을 내쉬며 옥색의 맑은 바닷물을 내려다보았다. 하얀 모래와 돌 사이로 작은 물고기들이 옹기종기 모였다 퍼지길 반복했다.
나는 혀를 차며 섬 안으로 들어섰다. 갈매기가 나의 섬 입성을 환영하듯 끼룩끼룩 울었다. 적당히 시원한 바람이 젖은 종아리를 말려 주었다. 나는 종아리에 말라붙은 모래를 다른 쪽 발로 털어 내고 바람에 날아갈 뻔한 밀짚모자를 눌러썼다. 거대한 나무 사이사이로 레몬색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파도 소리 사이로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있다.”
바닷물과 통하는 물길을 찾은 나는 작게 환호했다. 나는 물길을 천천히 따라 올라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람쥐며 새 같은 것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에 대한 면역이 없는 걸 보니 무인도는 무인도인 모양이었다. 내게 선한 호기심을 가진 녀석들을 굳이 저녁밥으로 만들고 싶진 않아 나는 걸음을 옮기는 데 열중했다.
“여기구나.”
산 중턱에 있는 호수를 지나쳐 정상까지 올라가자 퐁퐁 물이 솟는 샘이 있었다. 나는 그곳에 쪼그려 앉아 땀이 흐른 얼굴과 목 뒤를 닦아 냈다. 소금기가 어려 버석해진 목덜미가 금방 깨끗하게 씻겨 나갔다. 나는 가방 안에서 거대한 물통을 꺼내 졸졸 흐르는 물 앞에 가져다 댔다. 투두두둑, 마른 땅에 장대비 내리듯 빈 통이 경쾌하게 차오르는 소리가 났다.
물을 채운 나는 양손에 물통을 하나씩 들고 하산했다. 물통을 가방 안에 넣으면 훨씬 가볍겠지만, 이것도 수련의 일종이라 생각하고 그냥 들고 뛰기로 했다.
집을 짓기에 적당하다고 생각했던 장소에 다다른 나는 오만상을 썼다. 그 장소에 이미 마티어스가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티어스는 바닷물에 젖은 옷을 탈의하고 속옷만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제법 볼만해서 더 짜증이 났다. 기척을 눈치챈 마티어스가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내게 다가왔다.
“너, 왜 도망쳤지?”
“……당연히 도망치고 싶지 않을까요?”
“……왜?”
마티어스가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수상하다면서 계속 쫓아오는 사람이랑 누가 엮이고 싶겠어요? 솔직히 저보다는 그쪽이 더 수상하거든요?”
“형이라고 불러야지.”
“후……. 형이랑 저 중에 누가 더 수상하다고 생각해요?”
“신분도 증명했잖아.”
“저도 신분은 증명했는데요.”
“물론 네가 생각하기엔 내가 좀 어이없을 것 같긴 해. 넌 가끔 보이는 느낌 말고는 걔랑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거든.”
“인정하는 자세는 보기 좋은데요. 그대로 헤엄쳐서 다른 섬에 가 주면 안 될까요?”
“그건 싫은데. 여기까지 힘들게 왔는데, 내가 왜?”
나는 현실이었다면 관자놀이에 푸른 정맥이 돋아났을 거라 확신했다. 정말 이 녀석은 압실론 다음으로 사람을 돌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거 마실 수 있는 물이지? 나 좀 줘.”
마티어스가 팔락팔락 손부채질을 하며 물통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물통을 샥 치우며 새침하게 쏘아붙였다.
“제가 왜요? 드시고 싶으시면 알아서 떠다 드세요.”
“쪼잔하긴.”
마티어스가 쯧, 혀를 찼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녀석과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가방과 물통을 내려놓았다. 마티어스가 내게 졸졸 따라와 질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 마법사냐?”
“…….”
“바다 위를 달리는 걸 보면 마법사겠지, 뭐.”
“그냥 간단한 잡기일 뿐이에요.”
사실 녀석에게 마법사라는 사실 자체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마티어스를 떼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방법이 그거 하나였을 뿐. 그조차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지만.
“달리기도 꽤 자세가 좋던데.”
1년여 동안 훈련한 성과가 아주 없진 않은 모양이었다. 마티어스는 지금 좀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1년 전의 나는 마티어스 앞에서 멀쩡히 오래 달린 적이 없었으니까.
“그냥 모험가라니까요…….”
“그래. 앞으로 알아 가면 되겠지.”
내게 다가온 마티어스가 갑자기 나를 번쩍 안아 제 어깨에 걸쳐 놓았다. 한순간에 짐짝 취급을 받게 된 나는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뭐, 뭐예요. 이거 안 놔요?”
“물 떠 올 거니까 얌전히 있어.”
“물 뜨러 가는데 저는 왜 데려가시는 건가요……?”
“그동안 딴 섬으로 튈 거잖아.”
예리하긴. 나는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쳤지만, 마티어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훈련하는데 말이지.
나는 분한 마음에 녀석의 등짝을 퍽 쳤다. 어찌나 등 근육이 단단한지 내 손이 더 아팠다. 나는 결국 마티어스에게 열쇠고리처럼 달랑달랑 들려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야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