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남자는 자신의 몸만 한 칼을 들고 세 마리의 그리핀들과 대적하고 있었어요. 혹시 제 재능은 소환술이었던 걸까요? 의아해하고 있는데 남자가 거대한 대검을 사선으로 휘둘렀어요. 풍압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그리핀들의 몸과 나무들이 검의 궤적을 따라 무너져 내렸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진 동료들을 바라보던 그리핀들은 그가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 느꼈는지 빠른 속도로 도망치기 시작했어요. 남자는 도망치는 그리핀까지 쫓아낼 생각은 없는 듯 보였어요. 그는 나직이 한숨을 쉬며 칼에 묻은 피를 털어 냈어요.
“괜찮냐고 먼저 물어야 하는 건 아는데, 내가 좀 바빠서.”
남자가 머리를 까딱이며 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어요. 저는 그제야 남자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어요. 저는 숨을 멈추고 남자의 낯을 바라보았어요.
서늘한 불꽃이 사람이 되면 이런 모습일까요. 남자는 제가 지금까지 만난 사람 중 가장 근사한 외형을 띠고 있었어요. 한참 올려다봐야 하는 큰 키와 옷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근육들, 공들여 빚은 듯한 얼굴과 바람에 너울거리는 곱슬머리. 남자는 인간이라기보다는 신에 가까워 보였어요. 남자가 불길을 그대로 간직한 듯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며 말했어요.
“꼬마야, 혹시 이 근처에서 수상한 사람 못 봤니?”
* * *
“아아, 거기 빵 맛있었는데.”
흑설탕이 듬뿍 들어간 시나몬롤, 신선한 자두파이, 사과 잼을 넣은 페이스트리.
“가을엔 햇밤을 넣은 몽블랑을 만들겠다고 했는데.”
생각할수록 아쉬움만 남았다. 아셀은 지금쯤 울음을 그쳤을까. 그렇게 대화가 통하는 상대를 만난 건 도주 이후로 처음이라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낸다는 게 위험에 빠질 뻔했다.
처음부터 사람들과 교류를 하지 않고 지냈던 건 아니었다. 그날 그렇게 로그아웃이 실패로 끝나고 다른 곳으로 워프된 나는 이안을 찾아가 제국에서 가장 흔하고 존재감 없는 외모로 모습을 바꿨다.
자신이 사는 곳에서는 돈이 필요 없다는 이안의 말에 부채감 없이 돈을 받아 챙기고, 적당히 사람 없는 시골 마을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딱 하나밖에 없는 숙박업소에 가서 3주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 지냈다. 그러다 시체로 의혹을 받아 쫓겨나듯 마을을 나왔다.
그다음으로 정착한 마을에서는 매일 아침저녁을 밖에 나와 먹었다. 그러다 술에 맛을 들였고, 매일매일 술독에 빠져 살다가 황궁 이야기를 잘못 꺼내는 바람에 그날부로 그 마을을 떠났다. 맥주와 밀주와 과일주와 진을 섞어 마신 상태로 열일곱 시간 동안 덜컹거리는 짐마차 구석에 처박혀 이동한 이후로 한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
다음 마을은 젊은 연령층이 거의 없는 마을이었다. 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나는 그곳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했다. 어쩌다 내가 글을 읽고 셈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러다 그 근방 지주의 아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아들은 똘똘했고, 대화도 어느 정도 통했다. 이따금 NPC 특유의 한계에 부딪히긴 했지만, 100마디 남짓이 최대인 다른 NPC들보단 훨씬 다양한 대화를 할 수 있어 좋았다. 그러다 그가 마법사로 발현해 버렸다. 아차 싶었다. 마법사가 귀하기에 누군가가 마법사로 발현하면 그 인과 관계를 밝히러 마탑과 황성에서 사람을 파견한다. 나는 지주가 성대한 축제를 여는 틈을 타 그날로 그곳을 떠났다.
그 애가 열넷이라는 나이에 마법사가 된 건 나 때문이었다. 나와 대화한 NPC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고의 수준이 높아진다. 사람이 10까지 사고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소년들>의 평범한 등장인물은 2나 3 정도까지만 사고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를 만나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 사고의 수준이 올라간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되는 건 아니다. 시스템 용량상 모든 NPC의 사고를 높게 책정할 수 없으니 나와 대화하는 NPC들과 일부 중요 NPC들만 그렇게 되게 설정해 놓은 듯했다. 그래서 사용자가 게임에 많이 접속할수록 그 넷의 사고 수준도 높아져, 루드비히의 반역이라는 메인 스토리를 클리어할 확률도 높아졌던 거였다.
웃긴 건 계급이 높을수록 최대치도 높다는 거였다. 평민은 보통 3, 아무리 높아 봤자 4. 귀족은 3에서 9까지. 플레이어가 만나는 이들은 대부분 귀족일 거라는 생각에서 그렇게 설정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소년은 사고의 최대치가 다른 평민들보다 높았던 것 같다. 그래서 늦은 나이에 마법사로 발현해 버렸었고. 내겐 불행한 일이었다.
이런 이들이 왕왕 일어나다 보니, 새 도시에서는 최대한 말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며칠간 아예 말을 하지 않았더니 다행히 몇몇 사람들은 내가 아예 말을 못 하는 줄 알았다. 덕분에 편하긴 했는데, 징하게 외로웠다. 사람이 왜 사회적인 동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러다 아셀을 만났다. 꼬마 주제에 시스템의 구조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었다. 죽여야 하나 생각했지만, 죽이지 못했다. 아이가 처음 입을 뗐을 때부터 죽일 생각 같은 건 하지 못했다.
사무치게 외로운 나날들이었다. 그 넷이 그리워질 만큼. 살려 두었더니 자연스레 정이 들었다. 떠난다고 해도 이만한 애를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래도 떠나야 할 때는 있는 법이었다.
나는 짐마차 안에 잔뜩 쌓여 있는 짚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았다. 바람이 거세 구름이 흘러가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마차는 항구로 향한다고 했다.
“이번엔 어디로 갈까…….”
좀 멀리 떠나 볼 생각이었다. 이 외형으로 너무 오랜 시간 제국에 있었다. 차라리 무인도로 갈까. 군중 속의 고독보다 무인도에서의 고독이 차라리 더 낭만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짐마차가 멈춰 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빼꼼히 밖을 내다보니, 로브를 쓴 남자와 마부가 이야기하고 있었다. 맘씨 좋은 마부 아저씨가 또 누군가를 태울 셈인 모양이었다.
남자가 짐마차 뒤로 와 윗부분의 봉을 잡았다. 자리를 만들어 주려 엉덩이를 슬슬 움직이는데, 남자가 훌쩍 뛰어올랐다. 큰 덩치에 비해 날렵한 움직임이었지만…… 내가 여기 있는 줄은 몰랐던 모양이었다.
“꽥.”
나는 오리의 단말마 같은 비명을 질렀다. 남자가 나를 덮치듯 위에 올라탔다. 배와 가슴이 남자의 육중한 몸에 짓눌려 숨쉬기가 버거웠다. 나는 콜록거리며 남자를 밀쳤다.
“미안하네.”
“……거, 조심 좀 하세요.”
나는 남자를 흘겨보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남자가 내 위로 엎어지며 짚 속으로 파고들었기에 우리는 지푸라기를 잔뜩 뒤집어쓴 꼴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떨어져 몸에 달라붙은 지푸라기를 정돈했다.
“에퉤퉤, 입에도 들어갔잖아.”
나는 퉤퉤 지푸라기를 뱉으며 남자를 다시 노려보았다. 제가 먼저 잘못해 놓고 사과조차 반말이라니,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드는 놈이었다. 남자의 목덜미 안에도 지푸라기가 들어갔는지 그가 로브를 벗었다. 남자의 붉은 머리칼이 출렁거리듯 밖으로 빠져나왔다.
“…….”
“……후.”
마지막 지푸라기를 빼낸 남자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가 완전히 고개를 들기 전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마티어스.
너 왜 거기 있니.
나는 얼굴을 감싸 마른세수를 하는 척하며 손 틈새로 다시 녀석의 얼굴을 봤다. 화난 듯 치켜 올라간 눈썹, 열기를 간직하고 있으나 어딘가 건조하고 메말라 보이는 붉은 눈, 성격 있어 보이는 단단한 턱. 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마티어스가 맞았다.
식은땀이 등 뒤로 흘러내렸다. 깔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놈이 왜 이 지푸라기로 가득 찬 짐마차에 올라탄 걸까. 설마 들킨 걸까. 그런 것치고 마티어스에겐 아직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이대로 넘어갈 수 있는 걸까.
조마조마한 마음을 티 내지 않으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고개를 휙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눈매를 가늘게 뜬 마티어스가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나한테 어디 맞았습니까?”
“…….”
흠칫, 나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떨지…….”
“…….”
수상하다는 듯 마티어스가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제발 그냥 넘어가라. 하여간 이런 상황에서 제일 만나기 싫은 녀석이었다. 논리고 뭐고 없으면서 감 하나만은 더럽게 좋아선.
“혹시 어디 아픕니까?”
도리도리.
“아니면 말을 못 하나? 흐음, 그런 것치고는 아까는 잘 떽떽거렸던 것 같은데.”
“…….”
“근데 왜 내가 계속 말 거는데 예의 없이 고갯짓만 하지…….”
……X발.
어디 할 말 있으면 해 보라는 태도였다.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시뮬레이션도 제법 돌렸던 것 같은데, 도무지 대응책이 생각나지 않는다.
“코, 콜록, 감기에 걸려서…….”
“아깐 안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닙니다만, 목이 잠겨서요…….”
긁는 듯한 소리를 내며 로브를 덮어쓰고 있는데, 순식간에 마티어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너무 놀라 고개를 숙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이며 내 앞의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마티어스가 내 턱을 잡아채 위로 올렸다. 붕어 입이 되어 뻐끔거리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건조한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무, 무 흐는…….”
“지독하게 평범한 얼굴이군.”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마티어스가 망발을 내뱉으며 나를 놔주었다. 이제 좀 관심이 사그라드나 싶더니, 바로 질문이 이어졌다.
“나이가 어떻게 되지?”
“스, 스물입니다.”
“삭았군.”
“…….”
다른 사람한테도 이러고 다닌 걸까? 얘는 진짜 힘없었으면 어디 가서 맞아 죽기 딱 좋은 성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