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음……. 제가 책 속 등장인물이 되어서 모든 걸 누군가가 짜 맞춘 대로 행동해야 해요?”
“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럼 저는 상관없을 것 같아요.”
저는 벌떡 일어나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안과 눈을 마주치며 활짝 웃었어요.
“누가 뭐래도 내 마음, 내 생각, 내 자아는 진짜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 세상이 가짜가 될 수가 있겠어요?”
“…….”
“내 삶을 살아가는 건 나잖아요. 저는 제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진짜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들이 모두 그 삶이 가짜라고 말하고 손가락질해도?”
그거야말로 정말로 이해할 수가 없어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남들이 뭐라고 말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제가 이 삶을 진짜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하하, 그러게…….”
“네가 나보다 낫다.”라며 이안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그 후로 이안은 생각하는 시간이 부쩍 늘어났어요. 저는 그런 이안의 고민하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워 몰래몰래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어요. 정말이지 그건, 제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 * *
“이안-. 거기 있어요?”
오늘도 저는 이안의 오두막에 놀러 갔어요. 가정 교사 선생님이 아프대서 수업이 취소되는 바람에 조금 일찍 나왔건만 이안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어요. 이안이 어딜 나다니지 않는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기에 저는 조금 당황했어요. 낚시터와 장작 패는 뒷마당, 버섯 캐는 뒷산을 훑어도 이안은 없었어요. 혹시 사라진 건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이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안을 부르는데, 문득 뒷마당의 작은 공터가 눈에 띄었어요. 듬성듬성 벌목한 듯한 흔적이 남아 있는 공터를 빤히 바라보던 저는 흠칫 놀랐어요. 공터 한쪽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어요. 지금은 아주 더운 여름도 아닌데 말이죠.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던 저는 공터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어요.
“……!”
주위의 풍경이 순식간에 달라졌어요. 순식간에 우리 집의 두세 배는 될 듯한 너른 공터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어요.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 기분이 들었어요. 좁은 뒷마당이 이렇게 큰 공간으로 바뀌다니. 신기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는데 목덜미로 뜨거운 기운이 훅 와 닿았어요.
“아셀-!”
이안의 절박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가 절박한 표정으로 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어요. 저를 향해 덮쳐 오는 불의 해일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요. 저는 당황해 주저앉은 채 저를 덮치는 화마를 망연히 바라보았어요.
“캔슬, 캔슬이라고. 젠장-! 신속의 장화!”
눈을 질끈 감고 다가올 열기를 기다리는데, 순식간에 다가온 이안이 저를 덥석 끌어안았어요.
“실드!”
이안의 손끝에서 색색의 비눗방울 같은 둥근 원 수천 개가 꽃처럼 피어올랐어요. 그것을 양껏 먹어 치운 화마의 부피가 눈에 띄게 줄어들면서, 번지는 속도가 느려졌어요. 계란의 속껍질 같은 아주 얇디얇은 피막 한두 개만 남기고 불길은 겨우 사그라들었어요. 당황스러움에 눈을 끔뻑이고 있는데 이안이 소리를 질렀어요.
“이쪽으로는 오지 말라고 했잖아!”
“나, 나는 그냥…… 이안이 어, 없길래…….”
“내가 말 더듬지 말라고 했지-!”
이안은 화가 머리끝까지 난 표정을 짓고 있었어요. 어젯밤만 해도 다정하게 헤어졌는데, 왜 지금 우리는 이렇게 된 걸까요. 이안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어요.
“젠장,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야.”
“그냥, 걷다 보니까 여기였는데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지, 진짠데…….”
이안이 저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어요. 그 표정엔 귀찮음과 얕은 혐오가 깔려 있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어요.
“너, 오늘은 일단 가라.”
“잘못했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아니, 하……. 내가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래.”
저는 새파랗게 질려 가기 싫다고 졸랐지만 이안은 강경했어요. 저는 결국 쫓겨나듯 숲을 나와야 했어요.
“어머, 아가씨? 벌써 오셨어요?”
집에 돌아온 저를 하일라가 놀란 표정으로 맞이했어요.
“옷은 또 왜 이렇게 구겨지셨대. 넘어지셨어요?”
저는 하일라의 다정한 목소리에 결국 울음을 터트렸어요. 제 눈물에 하일라는 당황하면서도 저를 토닥여 주었어요.
그 후로 저는 일주일을 내리 앓았어요. 원인을 알 수 없는 고열에 음식도 전부 토하고 이따금 헛소리를 하기도 했어요. 사태의 심각성을 전해 들은 아빠가 나름 시골 마을의 내로라하는 의원을 다 데려왔는데도 병명을 알 수가 없었어요.
몸이 으스러지는 것처럼 너무너무 아파 이대로 죽는 걸까 생각하고 있는데, 로브를 입은 할아버지가 들어왔어요. 평소 보던 의사들의 복장과는 달라 아픈 와중에도 의아해하는 제게 할아버지가 인자한 미소를 지어 주었어요.
“안녕, 꼬마 아가씨. 잠깐 상태 좀 봐도 될까?”
할아버지가 제 손목에 손가락을 얹었을 때였어요. 푸른 기운이 제 몸을 타고 지나가는 듯한 기분에 저는 흠칫 놀랐어요. 제가 놀라자 할아버지가 다시 눈을 휘며 웃었어요.
푸른 기운은 그 후에도 제 몸을 마구잡이로 휘젓고 다녔어요. 내 몸인데요. 신경질이 난 저는 푸른 기운을 쫓아내기로 했어요. 기운을 끌어내 푸른 기운을 밖으로 내보내려고 하는데 내 기운을 알아채자마자 푸른 기운이 기세를 키워 버티기 시작했어요. 약이 오른 저 역시 기운을 끌어올려 그것을 몰아내려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어요.
서로 기운을 끌어올리며 치고받을 때였어요. 언뜻 할아버지를 본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할아버지가 마치 소년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지 뭐예요. 노인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 담길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할아버지의 미소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저는 기운을 끌어올리는 걸 잊어버렸고, 푸른 기운은 그대로 제 몸을 덮쳤어요.
“쿨럭……!”
푸른 기운이 제 몸의 모든 혈관을 쥐어짜 내는 듯한 감각이 들었고, 저는 침대에 핏덩이를 울컥 토해 냈어요. 문가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하일라와 아빠가 깜짝 놀라 저를 부르며 다가왔어요.
“아셀!”
“아가씨!”
아빠의 눈에 불이 이는 걸 처음 봤어요. 아빠는 할아버지를 거의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말했어요.
“이게 무슨 짓입니까!”
“자네 딸 고쳐 주려고 한 걸세.”
“집 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제 딸까지 죽이려고 한 건 아니고요?”
주위를 둘러보던 할아버지가 헛기침을 했어요.
“이런 재능은 오랜만이라 좀 과했던 건 인정하지. 하지만 자네 딸은 나아졌을 걸세.”
그렇지? 할아버지가 인자한 표정으로 물었어요. 저는 아까보다 숨쉬기가 훨씬 편해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열이 난 이후로 저를 괴롭혔던 두통도 사라졌고요.
“이제 안 아파요.”
“저, 정말이니, 아셀?”
“네. 할아버지가 고쳐 줬나 봐요.”
“아아, 다행이야.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내가 고쳐 줬는데 신은 왜 찾아?”
아빠가 저를 와락 끌어안은 채 눈물을 흘렸어요. 할아버지가 부루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어요. 저는 아빠에게 안겨 주위를 둘러보았어요. 방이 아주 엉망진창이었어요. 물건들이 두서없이 놓여 있는 데다 유리창은 깨지고 벽지조차 찢겨 있었어요. 가장 흉물스러웠던 건 물론 하얀 침구 위에 튄 핏덩이였지만요. 제가 묘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자 할아버지가 침대맡에 앉아 주름진 얼굴로 빙그레 웃었어요.
“이건 지금까지 너를 괴롭히고 있던 거란다. 혈관 속에서 뭉쳐 마나와 혈류의 이동을 막았던 거지.”
“……마나요?”
“그래, 너는 마법사거든.”
에엑.
저는 할아버지가 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마법사라니요.
“제가 마법사라고요?”
“그래. 그것도 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
이어진 말에 저는 물론 아빠와 하일라마저 놀라 말을 잇지 못했어요.
“하, 하지만 우리 집안엔 마법사가 없는데요.”
“드물지만 이렇게 발현되는 경우도 있단다.”
“세상에…….”
“하지만 이 정도 재능이면 더 일찍 발현되어야 했는데, 그 점은 의아하구나. 혹시 최근에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니?”
내내 친근하던 할아버지의 눈동자가 마치 뱀처럼 가늘어졌어요.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답하면 안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어요. 저는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어요.
“그래, 그건 조사해 보면 알 일이겠지.”
“조사요?”
“아, 마법사로 발현한 사람들이 받는 기본적인 조사란다. 걱정할 필요 없어.”
조사라는 말에 잔뜩 긴장했던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어요. 할아버지가 다정하게 말했어요.
“이제 곧 아카데미에 갈 테니 준비해야겠구나.”
“아카데미요? 전 열세 살이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아니, 마법사들만 가는 아카데미 말이다. 마법사로 발현한 아이들은 모두 아카데미에서 일정 기간 동안 교육받게 되어 있거든.”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안을 떠올렸어요. 내가 떠나면, 그 사람은 또 얼마나 외로울까요.
“아, 안 갈 수는 없나요?”
“아셀, 그게 무슨 말이니. 시니아 아카데미에 가는 건 가문의 영광이란다.”
아빠가 깜짝 놀라 제게 말했어요. 하지만 전 정말로 가고 싶지 않은걸요. 그것보단 이안과 노는 게 훨씬 재밌을 것 같았어요.
“무언가 맘에 걸리는 거라도 있는 걸까?”
하지만 그걸 이 할아버지에게 말할 수는 없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