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신이었다가, 마법사였다가, 도망자에, 지명 수배자? 내 위치가 너무 훅훅 내려가는 거 아니냐?”
“그럼 마법사면서 왜 이런 데 살아요? 마법사들은 다 마탑이나 귀족들 저택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잖아요.”
“이런 데가 뭐 어때서, 아늑하고 좋기만 한데.”
“외지고 낡았잖아요. 그리고 나무 썩은 내가 나요.”
“너 진짜 맹랑하다.”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저는 안 매운탕 국물을 싹싹 들이켠 뒤 탕 소리 나게 그릇을 내려놓았어요.
“혹시 집이 필요한 거면 같이 가요. 우리 집에 남는 방이 하나 있거든요.”
“벼룩의 간을 빼먹지. 됐다.”
“진짜예요. 우리 집 잘살아요.”
물론 다른 평민들이나 빈민들과 비교할 때 한해서긴 했지만요.
“왜 잘사는데? 너 뭐 돼?”
“제가 뭐 되진 않지만 저희 아빠는 뭐 돼요.”
“뭐 되는데.”
“저희 아빠는 영주…….”
“영주라고?”
“님의 비서예요.”
“……아.”
살짝 긴장했던 이안이 맥이 빠진다는 듯 한숨을 푹 쉬었어요.
“됐어. 난 여기가 편해.”
이안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천장의 나무 하나가 삐걱 부서지며 우수수 먼지가 쏟아져 내렸어요. 이안이 민망한 듯 나를 바라보며 목덜미를 긁적였어요.
“진짜야.”
저는 이쯤에서 넘어가 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대신 진짜 궁금한 걸 묻기로 했죠.
“그럼, 저한테만 알려 줘요. 진짜 정체가 뭐예요?”
“뭐 같은데.”
“알려 줄 거예요?”
“맞추면.”
이안은 추리가 제 전문 분야라는 걸 모르고 있는 게 분명했어요. 저는 신이 나서 추리를 시작했어요.
“일단…… 신은 아닌 것 같아요. 신이 이런 데 산다는 말은 들어 본 적 없거든요.”
“자꾸 너 우리 집 무시하는데, 여기도 알고 보면 꽤 아늑하거든?”
이안이 그렇게 말하는 새 구멍 난 지붕에서 지푸라기 한 움큼이 풀썩 떨어져 내렸어요. 이안이 민망한 듯 얼굴을 감싸 쥐었어요.
“그리고 범죄자나 지명 수배자도 아닌 것 같아요.”
“왜?”
“저는 아무 힘도 없는 어린애잖아요. 진짜 범죄자면 저를 죽이고 도망치면 되지, 굳이 귀찮게 맹세를 시키진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럴듯하네.”
“그렇죠? 그리고 지명 수배자면 굳이 위험을 감수하고 저를 오두막 안에 들일 이유가 없기도 하고요.”
“그래서 너는 내 정체가 뭐라고 생각하는데.”
“제 생각에는요, 이안은…… 영주의 딸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하다가 가슴 아파 속세와 떨어져 사는 마법사예요.”
저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이안을 바라보았어요. 이안이 미묘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았어요. 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이안을 들여다보았어요.
“아닌가요?”
이안의 볼에 공기가 한가득 들어차나 싶더니, 이내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어요. 저는 어리벙벙하게 이안이 배를 잡고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어요.
“와, 너 상상력 끝내준다.”
“…….”
아니었나 봐요. 이안은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았어요. 저는 민망함에 뺨을 붉히고 부루퉁하게 입을 내밀었어요.
“그만 웃어요…….”
“미, 미안. 내가 이런 웃긴 일을 아주 오랜만에 겪어서.”
“……뭐가 그렇게 웃겨요? 전 하나도 안 웃긴데요.”
추리에 무참히 실패한 데다 비웃음을 산 저는 더 이상 여기 있고 싶지 않아졌어요.
“잘 먹었습니다.”
집에 갈 채비를 하는 저를 이안이 눈물을 닦으며 잡았어요. 여전히 웃음기가 사라지지 않은 모습에 가야겠다는 생각만 더 강해졌지만요.
“미안, 미안.”
“됐어요. 저 갈게요.”
“답 궁금하지 않아? 알려 줄게.”
문을 열고 나가려던 저는 멈칫했어요. 궁금하긴 했거든요. 저는 고개를 돌려 샐쭉하게 이안을 바라보았어요.
“……뭔데요.”
“네가 맞아.”
“……실연의 상처를 입고 오두막에 틀어박힌 마법사요?”
“……그거 빼고 전부 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서 저는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그러니까, 신이자 마법사이자 도망자이자 지명 수배자라고요?”
“그래.”
여전히 저를 놀리고 있는 게 분명했어요. 그사이 화가 반쯤 풀려 집에 갈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데 이안이 디저트로 꿀케이크를 내주었어요. 아, 꿀케이크. 이거 정말 맛있는 거거든요. 저는 못 이기는 척 다시 자리에 앉았어요. 분하지만 꿀케이크는 정말 맛있었어요.
* * *
그날 이후로 저는 매일같이 이안의 집에 놀러 갔어요. 하일라가 제게 큰 관심이 없어 다행이었죠. 우리는 많은 것들을 했어요. 함께 나물이나 버섯을 캐기도 했고, 물고기를 잡기도 했어요. 이안은 낚시를 정말 못해서 대부분 제가 잡은 걸로 안 매운탕을 만들어 먹었어요. 한번은 은어를 잡아 생으로 먹어 보기도 했는데, 희미한 수박 향이 나는 게 정말 맛있었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목말랐던 사람처럼 끊임없이 대화했어요. 이안은 화제가 풍부한 데다 신기한 이야기들도 많이 알고 있어서 대화가 끊길 일이 거의 없었어요. 드물게 말이 없어지는 때에도 별로 어색하지 않았구요. 우리는 저녁이면 모닥불을 피워 놓고 생선을 구워 먹었어요. 입이 까맣게 되도록 생선을 먹고 있는 서로를 바라보다 웃음을 터트리기도 했어요. 이안과 함께 있는 시간은 즐거웠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 몇 배는 더 밀도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느 날처럼 우리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별을 셌어요. 이건 카시오페아, 저건 북극성……. 쌍둥이자리와 황소자리, 처녀자리와 물병자리. 별 쪼가리 몇 개 연결해 놓고 쌍둥이자리니 물병자리니 하는 건 좀 어이없었지만, 거기에 얽힌 이야기는 재미있었어요. 사자자리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저는 꾸벅꾸벅 졸다가 이안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어요.
이안이 허벅지를 내주고는 겉옷을 벗어 제 위에 덮어 주었어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 주는 손길에 꼬박꼬박 졸고 있는데 무어라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어요.
‘너는 조금 깨어 있는 아이지만, 사실 그건 좋지 않아. 특히나 이런 곳에서는. 나갈 수 없는 곳에서 때때로 홀로 영리하다는 건, 모두가 모르는 것을 혼자만 알고 있다는 건…… 평생을 지독한 외로움 속에 살게 하거든.’
왜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그것도 졸고 있는 저한테요. 저는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어요.
‘…….’
잠이 전부 달아나는 기분이었어요. 이안이 공허한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지독하게도 외로워 보이는 낯이었어요. 어떤 거로도 그 외로움과 우울함은 충족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 저를 아득하게 만들었어요. 그의 고독과 괴로움을 잠깐 맛본 것만으로도 질식할 것 같았어요. 의식하기도 전 눈물이 새어 나왔어요. 제가 울고 있다는 걸 안 이안이 당황하며 제 등을 토닥였어요. 저는 따뜻한 이안의 품속에서 한참을 목 놓아 울었어요. 몸을 떼어 냈을 때에는 이안의 눈시울도 붉어져 있었어요.
‘이안은 왜 저한테 이런 걸 말해 줘요?’
‘……외로워서.’
이안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어요. 이안은 아주 다정하고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저는 어쩐지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도 슬프게 느껴졌어요.
* * *
“이 세상이 모두 가짜라고 느껴 본 적 있어?”
이안은 가끔 예상외의 질문을 내놓았어요.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질문들이요.
“아뇨? 세상이 왜 가짜예요?”
“……됐다.”
이안이 괜한 걸 물었다는 듯 손사래를 쳤어요. 저는 이안의 무릎을 베고 누워 고민하다가 그의 턱을 쓰다듬었어요.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보송보송한 턱이 기분이 좋아 괜히 웃음이 났어요.
“가짜라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기분은 느껴 본 적 있어요.”
“벌써? 조숙하네. 언제 그런 기분이 드는데?”
“……웃을 때요.”
“웃을 때?”
“네. 며칠 전에 하일라한테 뭘 좀 물어봤거든요. 우리가 삶에서 나아가야 할 길은 무엇인지, 사람이 살기에 가장 좋은 사상은 무엇일지.”
“…….”
“하일라는 제 질문을 받으면 잠깐 얼어 있다가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라고 하면서 웃어요. 다른 질문을 던졌을 때도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하고요.”
“…….”
“그런 웃음을 볼 때, 저는 조금 외로워져요.”
“나도.”
“네?”
“나도 그래.”
이안이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어요. 그 슬픔이 전염되어 저도 같이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요. 하지만 눈물 자국을 보면 하일라가 의심할 것 같아 꾹 참았어요. 매운 겨자를 먹은 것처럼 코끝이 찡해져 왔어요.
“그런데요, 그걸 누가 판단하는 거예요?”
“어?”
“세상이 가짜인 거요. 그걸 누가 판단해요?”
“어……? 글쎄,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저는 그런 웃음들 사이에서 살았지만, 제 삶이 가짜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저는 이안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어요. 이안의 뺨은 서늘한 듯하면서도 약한 온기를 간직하고 있었어요.
“책이 비록 가상의 이야기긴 하지만, 책을 읽는 시간이 가짜를 읽는 시간은 아니잖아요. 분명 그 책 안에도 기쁨과 슬픔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을 보는 제 ‘마음’이 존재해요.”
“…….”
“이안은 그걸 정말 가짜라고 생각해요?”
이안은 내 질문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고민했어요. 이안은 내내 아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건 하일라나 에이미, 저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과 결이 다른 고민하는 표정이라 저는 이안의 그런 얼굴이 정말로, 정말로 좋았어요.
“만약, 네가 지금 살던 세상이 아니라 책 속 세상에 들어가게 되었다면……? 그래도 그걸 진짜처럼 느낄 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