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저는 넋을 놓고 남자가 수련하는 모습을 구경했어요. 남자는 같은 자세로 수십 번이고 검을 휘둘렀어요. 턱 끝에 땀이 고인 게 멀리 떨어져 있는 제 눈에도 보였는데,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어요.
“사백구십팔, 사백구십구, 오백.”
남자는 오백이라고 외친 뒤에야 목검을 내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어요. 땀에 젖은 셔츠를 팔랑이며 남자가 집 안으로 들어왔어요. 그 구멍 쪽으로 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데, 남자가 다시 벌컥 문을 열고 나왔어요. 남자는 손에 바구니와 여벌 옷, 낚싯대를 쥐고 있었어요. 저는 부지런히 남자의 뒤를 쫓았어요.
남자는 숲을 관통해 강가로 걸어갔어요. 몇 번 와 봤는지 앉기 편한 판판한 돌이 강물 앞에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돌 위에서 쉬고 있는 고추잠자리를 휘휘 저어 내쫓은 남자가 낚싯대에 미끼를 꿰어 던지고는 그 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요.
그리고 남자는 명상에 들어갔어요. 그냥 눈을 감고 있는 건가 싶었는데 입술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어요. 무어라 쉴 새 없이 중얼거리는 것 같았는데, 사실 미친 사람 같아서 좀 무서웠어요. 말하는 거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 낚시찌가 움찔거리는데 그것도 모르더라고요. 그러다 한 번씩 낚싯대를 올리면, 그사이 미끼는 물고기들이 죄 물어 가고 없었죠. 남자는 텅 빈 낚싯바늘을 보며 뒤통수를 긁적이다 새 미끼를 끼워 넣었어요. 아무래도 물고기 밥을 주는 게 취미인 것 같았어요.
멀리서 봤을 때 그 모습은 또 제법 평화로워 보여, 큰 나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은 저는 어느새 나무에 기대어 꾸벅 잠이 들었어요. 그사이 꿈을 꿨던 것 같아요. 꿈속에서 저는 그 남자와 함께 낚시를 하고 있었어요. 저는 아주 큰 물고기를 낚았고, 남자는 그런 저를 보며 박수를 쳤어요. 의기양양해하고 있는데, 누군가 그런 저를 흔들었어요.
“뭐야…….”
“일어나야지. 저녁인데.”
“물고기 큰 거 잡았단 말이야…….”
“부럽네. 난 하나도 못 잡았는데.”
낯선 목소리에 저는 눈을 번쩍 떴어요. 남자가 쪼그려 앉아 저와 시선을 맞춘 채 여상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그의 뒤로는 저녁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어요. 저는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한참 동안 얼빠진 낯으로 앉아 있었어요.
관찰 대상을 앞에 두고 그렇게 자 버리다니. 그것도 저녁이 될 때까지 말이에요! 저는 어쩌면 탐정으로서 재능이 없는지도 모르겠어요. 남자가 당황한 저를 보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어요.
“잠 깼으면 이제 나를 감시한 목적 좀 알려 줄래?”
“……네?”
“잘 말해야 할 거야. 웬만하면 어린애는 죽이고 싶지 않거든…….”
“무슨…….”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 차에 배에 무언가 뾰족한 것이 쿡 닿는 게 느껴졌어요. 시선을 내리자 남자의 소매에서 삐죽이 튀어나온 단검이 볼록한 제 배에 닿아 있었죠. 단검은 금방이라도 옷을 찢고 살을 가를 것처럼 날카로웠어요. 저는 그제야 제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을 관찰했는지 알게 되었어요.
“물음에 대답해. 왜 나를 감시했지?”
“가, 감시한 거 아닌데…….”
“그럼?”
“그냥 저, 저는 아저씨가 궁금해서…….”
“미안한데 말 더듬지 말아 줄래? 내가 트라우마가 있어서.”
트라우마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더듬지 말라는 건 알아들었기에 저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어요.
“아, 안 더듬을게요. 아니, 안 더듬을게요.”
“착하네.”
남자가 그런 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어요. 남자의 웃음은 선해 보였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언제든지 저를 찌를 수 있는 사람 같았어요.
“내가 왜 궁금했는데?”
“아저씨랑 만, 난 사람들이 달라져서……. 히끅.”
하마터면 말을 더듬을 뻔한 저는 중간에 말을 한 번 끊고 답했어요. 남자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아저씨……?” 하고 짧게 중얼거렸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예, 히끅, 요. 에이미가 달라졌단, 말이에요. 히끅.”
“에이미는 또 누군데?”
“아저씨가 어제 물건 산 데요. 히끅, 버섯이랑, 감자…….”
“식료품 가게 주인 말하는 건가.”
“맞, 아요. 히끅.”
한번 시작된 딸꾹질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딸꾹질을 할 때마다 단검이 배로 파고들어 올 것 같아 너무 무서웠어요.
“뭐가 달라졌는데?”
“……말하는, 히끅, 능력?”
처음 들어 보는 말이라는 듯 남자가 의아한 얼굴을 했어요. 저는 다급히 부연 설명을 했어요.
“그러니까, 히끅, 원래는 에이미가 100가지 말만 할 수 있었다면, 아저씨를 만나고 나서는, 히끅, 150가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
“무, 물론 그냥 예예요. 히끅, 에이미는 100가지보다는 더 말, 히끅, 할 수 있어요.”
남자의 눈이 크게 뜨였어요. 저는 불안한 표정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어요.
“그거 누구한테 말한 적 있어?”
“아, 아니요.”
“그래, 다행이네.”
어쩌면 남자가 곧 저를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눈을 질끈 감고 다가올 아픔을 기다렸어요. 그게 뭐가 되었든 짧게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슬퍼할 에이미와 아빠와 하일라의 얼굴이 떠올랐어요. 저의 죽음에 슬퍼할 사람들의 수가 좀 빈약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럴 거면 아빠 말 어기고 친구라도 사귀어 볼걸! 뒤늦게 후회하고 있는데, 남자가 물었어요.
“살고 싶어?”
“네…….”
“왜?”
“네?”
“왜 살고 싶은데?”
“제, 제가 죽으면 슬퍼할 사람들도 있고…….”
“그런 거 말고, 다른 걸 이유로 대 봐.”
“그리고…… 아직 하고 싶은 게 많아서요.”
“뭘 하고 싶은데?”
살려 주려는 걸까? 저는 열정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했어요.
“저는 승마도 배우고 싶고요, 마을 밖을 나가 여행도 해 보고 싶고요, 아카데미에도 가고 싶어요. 사실은, 탐정이 되고 싶어요.”
“……탐정?”
“네. 탐정이요.”
“너 이름이 혹시……?”
남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어떤 이름을 말했어요. 저는 어리둥절해 고개를 저었어요.
“아뇨, 제 이름은 아셀인데요…….”
“흠, 그래.”
남자가 멋쩍은 듯 턱을 긁적였어요. 혹시 저도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걸까요? 저는 없는 용기를 박박 긁어모으고 쥐어짜 내 물었어요.
“아, 아저씨는 혹시 신이세요?”
“……엉? 무슨 소리야?”
“지혜의 신, 아테나 아니세요……?”
“도대체 어떤 연유로 그런 추리가 나오는 건데?”
남자는 진심으로 황당해 보였어요. 저는 우물쭈물하다가 그가 인내심을 잃기 전에 재빨리 답했어요.
“아저씨를 만나는 사람들은 다 똑똑해지잖아요……. 그래서 저는 아저씨가 만나는 사람마다 지혜의 축복을 내려 주는 게 아닌가 생각했었어요.”
“그럴 리가 없잖아.”
“……네.”
“그래도 뭐, 그럴듯한 생각이긴 했어.”
“감사합니다…….”
칭찬받았다는 생각에 괜스레 몸이 배배 꼬였어요. 어쩐지 뺨이 뜨거워지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런 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물었어요.
“너 혹시 귀족이냐?”
“아뇨?”
“그래? 그것 참 이상하네. 평민들은 잘 발현하지 않는 것 같던데…….”
“뭐가요?”
“아무것도 아냐.”
추리에 난항을 맞이한 탐정처럼 남자는 끙끙거리며 생각에 잠겼어요. 말해 줘야 하나. 저는 한참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어요.
“그게, 몰락 귀족이긴 해요.”
“역시!”
제 대답에 남자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어요. 팔뚝만 한 물고기를 낚아도 이만큼 기뻐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아버지는 학자시고?”
“아뇨, 비서세요. 작은할아버지가 학자셨어요.”
“그래, 뭘 탐구해 온 애들 후손 중에 가끔 너 같은 애가 나오더라.”
“저 같은 애가 누군데요?”
“쓸데없이 영리한 애들.”
“아…….”
제가 시무룩해지자 남자가 멋쩍어하며 덧붙였다.
“칭찬이야.”
“네.”
“……너.”
“네?”
“나랑 있었던 일 아무한테도 말 안 할 자신 있어?”
저는 지금 저에게 동아줄이 하나 내려왔다는 걸 깨달았어요. 저는 남자의 소매를 잡고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네!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절대로요.”
“진짜지?”
“네!”
망설임 끝에 남자가 단검을 다시 검집 안에 집어넣었어요. 밑을 내려다보니 검의 뾰족한 부분에 걸려 옷이 살짝 찢어져 있었어요. 그래도 배를 안 찢긴 게 어딘가 싶었어요.
“너를 온전히 믿을 순 없으니 너, 나랑 맹세를 하나 해야겠다.”
“맹, 세요?”
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어요. 남자가 저를 보며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어요.
* * *
가까스로 저녁을 먹기 전에 돌아온 저는 제 손을 훑어보았어요. 엄지에 아주 작은 상처가 나 있었어요. 몇 시간 전만 해도 이 손가락 전체가 빨간 핏방울에 뒤덮였었죠. 맹세를 하기 위해서요.
아저씨는 양피지를 꺼내 무어라고 적더니 먼저 엄지를 깨물어 피를 내고 도장을 찍었어요. 이 일에 대해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죽느냐, 도장 찍느냐의 문제였기에 저는 얌전히 도장을 찍었어요. 검지로 엄지의 상처를 훑어 찌릿한 감각을 느끼고 있는데 하일라가 음식이 든 트레이를 들고 방에 들어왔어요.
“아가씨, 웬일로 오늘은 안에서 식사를 하세요?”
항상 식당에서 규정을 다 지켜가며 식사를 하더니 갑자기 왜 이러냐는 듯한 물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