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남자는 시장 골목을 느릿하게 걷고 있었어요. 햇살이 남자의 머리 위로 내리쬐어 갈색 머리카락이 언뜻 금빛으로 빛났어요. 남자의 걸음은 느릿했어요. 마치 그 남자의 주위에만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상하게 저는 그게 슬펐어요.
그는 생선 가게에 들어가 손질한 대구와 잡어 두어 마리를 샀어요. 그리고 빵집에서는 큼직한 식빵과 꿀을 바른 달콤한 디저트 몇 개를 샀어요. 남자는 메고 있는 가방에 모든 것을 집어넣고 다시 걷기 시작했어요. 꽤 많이 넣었는데도 가방이 전혀 부풀지 않았던 걸 보면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는 가방인 것 같았어요.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기에 저는 이 모든 걸 낱낱이 저의 사건 수첩에 기록했지요.
남자는 5분 정도 걸어 숲길 앞에 다다랐어요. 망설임 없이 숲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의 뒷모습에 저는 마을 초입에 선 채 발을 동동 굴러야 했지요.
숲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데.
어떻게 할까.
그사이 남자는 성큼성큼 걸어 저 멀리로 사라지고 있었어요. 다급해진 저는 남자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어요. 남자는 그 후로도 10여 분 정도를 더 걸어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어요. 오두막의 외관은 죽은 담쟁이덩굴들이 마구 얽혀 있어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허름하고 으스스했어요. 오두막 뒤쪽에는 허름한 공터가 하나 있었는데, 어떤 힘에 의해 파괴된 흔적으로 가득했어요. 혹시 몬스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오싹 소름이 일었어요.
어떻게 이런 곳에 사는 걸까요. 신이라서 무서움을 느끼지 않는 걸까요?
저는 통나무집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통나무와 통나무 사이 썩어서 벌어진 틈을 하나 발견했어요. 그 구멍의 위치와 크기는 제 눈을 대기에 딱 알맞아 보였어요.
“…….”
남의 집을 엿보는 게 숙녀로서 좋은 행동은 아니지만, 아홉 살은 아직 숙녀가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요?
저는 3초 정도 망설이다 구멍에 눈을 가져다 대었어요. 집에 들어온 남자는 로브를 벗고 식료품들을 정리하기 시작했어요. 정리를 마친 남자가 스툴에 걸터앉아 감자 껍질을 까기 시작했어요. 능숙한 솜씨에 하루 이틀 한 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게 되었죠.
남자의 행동은 재미있었어요. 왜 재미있을까 생각해 보니, 행동들이 부산스러워서 그랬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부산스러운 행동을 거의 하지 않거든요. 항상 목적지를 정해 놓은 것처럼 행동하죠. 어린아이들조차요.
그런데 이 남자는 감자를 썰었다가, 물건을 정리했다가, 물이 끓는 걸 확인했다가, 하여간 엄청나게 부산스럽게 굴었어요. 그러니 지루할 수가 없지요. 숨을 죽이고 킥킥거리고 있는데 물이 끓어 넘치는 걸 본 남자가 벌떡 일어났어요. 불을 줄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잘 안 됐어요. 마음이 급한지 남자가 냄비 손잡이를 덥석 쥐었어요.
“아, 뜨거-!”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냄비를 놓쳤어요. 냄비에서 쏟아진 물은 대부분 바닥을 적셨지만, 남자의 정강이로도 일부 쏟아졌어요. 저는 너무 놀라 입을 틀어막았어요. 그렇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비명이 쏟아질 것 같았어요.
남자는 멍하니 서서 바닥에 쏟아진 물을 바라보았어요. 그런다고 해서 물이 다시 냄비에 담길 리도 없는데 말이에요. 스툴에 주저앉은 남자가 바지를 걷고 정강이의 상태를 살폈어요. 물이 닿은 부분이 붉게 부어올라 있었어요. 다행히 상처는 그리 크지 않은 것 같았어요.
남자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제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어요. 깜짝 놀란 저는 얼어붙어서 눈을 끔뻑였어요. 남자는 저를 보는 대신 위의 찬장에서 부스럭대며 무언가를 꺼냈어요. 연고와 붕대인 것 같았어요. 찬물에 정강이를 식힌 남자가 연고를 쭉 짜서 바르기 시작했어요.
“읏, 아파…….”
연고를 치덕치덕 바른 남자가 붕대를 감기 시작했어요. 어린애가 보기에도 어설픈 솜씨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어요. 남자는 몇 번 시도하다가 잘 안 됐는지 적당히 붕대로 매듭을 묶고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 매듭은 남자가 절뚝이며 두세 걸음을 걷자마자 바로 풀어졌어요. 그때였어요. 남자가 붕대를 밟는 바람에 중심을 잃고 휘청였던 건.
애써 뭔가를 잡고 버텨 보려고 손을 뻗었지만 하필이면 고정되지 않은 감자 바구니를 잡는 바람에 남자는 그대로 앞으로 넘어졌어요. 감자와 바구니가 공중에서 아주 잠깐 춤을 췄어요. 저는 차마 그 모습을 계속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어요. 우당탕 소리가 나고 눈을 뜨자 남자가 꼴사납게 엎어진 모습이 보였어요. 남자는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그대로 엎드려 있었어요.
냄비는 엎어져 있지, 바닥은 물바다지, 애써 깎아 놓은 감자는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지. 제가 봐도 끔찍한 장면이었어요.
“제기랄…….”
생소한 말이었지만, 왜인지 욕이라는 걸 단번에 알 수 있었어요. 남자는 이런저런 욕설을 내뱉으며 엉거주춤 일어나 앉았어요. 뒷모습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다시 붕대를 감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역시 이번에도 잘 안 됐나 봐요. 열심히 꼬물대던 남자는 붕대를 거칠게 풀어서 벽에 던져 버렸어요. 붕대는 공중에서 풀어져 얼마 가지 못하고 추락했어요.
남자는 그러고도 한참을 앉아 있었어요. 옹송그린 모습이 어쩐지 보기에 안쓰러웠어요. 주위가 어두워지는 바람에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남자는 몸을 떨고 있는 것 같았어요. 추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어요.
남자는 울고 있었어요.
희미한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 갔어요. 남자는 마치 다섯 살짜리 아이처럼 울었어요. 어른이 그렇게 온몸으로 우는 건 처음 봤어요. 남자는 30분이 넘도록 울었어요. 그사이 오두막은 완전히 어두워졌어요. 어둠이 눈에 익었음에도 남자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어요.
한참을 목 놓아 울던 남자가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벽을 더듬거리며 서랍에 다가간 남자가 무언가를 부스럭거리면서 꺼냈어요. 핏, 핏 소리가 나더니 이내 화르르, 성냥에 불이 붙었어요. 성냥의 불씨는 곧 밀랍으로 만든 하얀 초로 옮겨 갔어요.
굴곡을 따라 남자의 얼굴에 음영이 짙게 드리웠어요. 제 시선이 멈춘 건 남자의 눈동자였어요. 발개진 눈가와 젖어 있는 눈동자가 꿈을 잃은 소년처럼 우울해 보였어요. 공허한 암흑이 저를 사로잡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어요. 못 볼 걸 본 것처럼 심장이 마구 뛰었어요. 저는 뒷걸음질 치다 나무에 손끝이 닿았을 때부터 마구잡이로 달리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숲을 빠져나와 집에 왔는지 모르겠어요. 저녁 시간을 한참 지나 비척비척 집에 돌아온 나를 하일라가 놀란 표정으로 안아 들었어요. 하일라가 걱정했다며 한참 잔소리를 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저녁으로는 좋아하는 양송이스튜가 나왔지만,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침대로 향했어요. 그런 제가 뭔가 이상했는지 하일라가 침대맡에 앉아 동화책을 세 권이나 읽어 줬어요. 평소에는 앤더슨이랑 시시덕거리느라 한두 권 읽어 주다 가 버리는데 말이에요. 물론 내용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죠. 그러다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아요.
다시 깨어나니 환한 보름달이 하늘 꼭대기에 떠 있었어요. 오늘의 보름달은 꼭 누군가의 상냥한 눈동자 같았어요. 저는 달을 보며 그 사람을 생각했어요. 그 사람도 지금 이 달을 보고 있을까요? 조금은 덜 외롭다고 느꼈을까요?
“아, 맞다. 이름을 안 물어봤네…….”
……아무래도 내일 다시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죠?
* * *
다음 날, 아침부터 저는 꾀병을 부렸어요. 머리가 아프다고요. 어제저녁에 이어 아침까지 깨작이는 저를 보고 하일라는 충격에 빠진 듯했어요. 의사를 부르니 마니 하는 하일라에게 그 정돈 아니라고 하며 안심시키느라 애를 먹었어요. 하일라가 가정교사를 돌려보내는 모습을 보고 저는 짐을 챙기기 시작했어요. 코끼리 인형과 부엌에서 하일라가 구워 놓은 쿠키도 두어 개 챙겨 가방을 싼 뒤 저는 몰래 저택을 떠났어요. 혹시 걱정할지도 모르니 도서관에 다녀온다는 쪽지는 남겨 놓았죠.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좋았어요. 강물의 윤슬이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을 보니 저절로 기분이 좋아졌어요. 가방을 메고 씩씩하게 걸음을 옮기는 저를 본 식료품점 아저씨가 오렌지를 한 알 던져 주었어요. 저는 꾸벅 인사를 하고 오렌지를 꼭 쥔 채 숲 안으로 들어섰어요.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그렇게 어렵지 않더라고요. 오늘 날씨가 좋아 숲이 예뻐 보이는 것도 한몫했어요.
나무를 타고 쪼르르 달리는 다람쥐들에 정신이 팔리기도 하고, 가지와 잎새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구경하기도 하며 걷다가 저는 어제 본 통나무집에 도착했어요.
낮에 본 통나무집은 생각보다 더 허름하고 낡아 있었어요. 통나무와 통나무의 이음새는 썩어 숭숭 구멍이 나 있었고, 지붕도 헐려 있어 비가 오면 그대로 그 안에도 빗물이 들이칠 것만 같았어요. 용케 이런 곳에 사는구나 싶었죠.
어제 보았던 틈새로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된 가재도구만 있을 뿐 남자는 없었어요. 허탕인가 싶어 입을 쭉 내밀고 있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어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가까이 가 보니 남자가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어요.
무술이라고는 하나도 못 할 것 같은 유약한 인상인 데 비해, 남자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은 꼭 기사 같았어요. 어제 붕대를 못 감아 찔찔 짜던 모습과는 사뭇 다르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