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Chapter 3. 우당탕탕 홀로서기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아셀이에요. 아홉 살이고요. 사실 제 풀 네임은 에이셀라 리엔드로스지만, 아빠나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저를 아셀이라고 불러요. 가끔 사고를 칠 땐 에이셀라 리엔드로스라는 이름을 전부 불리기도 하지만요.
취미는 사람 관찰, 특기는 추리예요. 사실 이 시골 마을에 엄청난 추리가 필요한 일은 없긴 하지만, 전 탐정이 되는 게 꿈이거든요. 매일매일 자그만 추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예를 들자면 나를 돌봐 주는 하일라의 엉덩이 부분에 밀가루가 묻어 있는데, 집사인 앤더슨의 무릎에도 같은 종류의 밀가루가 묻어 있는 것 정도? 이 시시한 정보들의 총합으로 둘이 간밤에 방앗간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물론 이런 추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진 않아요. 몇 번의 경험 끝에 이 추리를 사람들에게 알리면, 그 사람들은 사라진다는 걸 알게 되었거든요.
저번에만 해도 친구처럼 저를 돌봐 주던 에이미가 자꾸 구역질을 하는 거예요. 저번 주에는 그렇게 잘 먹던 버섯구이를 먹다가요! 그리고 내 머리를 빗다 잠들어 버리기도 하고, 밤에 동화책을 읽어 주다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도 했죠. 이러한 현상을 토대로 저는 에이미가 임신했다는 추리를 도출해 냈어요. 책에서 봤거든요. 임신을 하면 잠이 많아지고, 감정 조절을 못 해 예민해지며, 입덧을 한다는 걸요! 이 추리를 아빠에게 자랑스레 알리자마자 집안은 뒤집어졌어요.
아빠가 말하기를, 임신은 숭고한 것이지만 결혼하지 않은 여자에게는 끔찍한 일일 수도 있다나요. 결국 에이미는 우리 저택에 식료품을 배달해 주는 남자와 결혼해 버렸고, 제 곁을 떠나게 되었어요. 저는 가지 말라고 엉엉 울었지만, 에이미는 아가씨 덕분에 행복해질 수 있었다고 말하며 떠나 버렸어요. 나를 제일 사랑한다고 말했으면서! 저는 한동안 배신감에 치를 떨었어요.
새로 온 하일라는 에이미만큼 책을 잘 읽어 주지도 않고, 머리도 아프게 빗겼어요. 가끔 사라져서 찾아보면 앤더슨과 손님방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나오기도 하고요! 그래도 초콜릿이나 감초사탕을 몰래 주는 점 하나만은 좋아요.
물론 제가 하루 종일 탐정 일만 하는 건 아니에요. 이래 봬도 저는 아주 바쁜 축에 속한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 몸단장을 하고, 언어와 수학, 외국어와 역사, 지리를 공부해요. 사실 저는 학교를 가고 싶은데, 아빠는 아무리 몰락 귀족이라도 체면이 있지 시장통 같은 학교에서 아무렇게나 자란 아이들과 함께 공부를 시킬 수는 없대요. 나쁜 버릇이 들지도 모른다나요.
그래도 나는 친구들이랑 좀 놀고 싶은데.
아빠는 열세 살이 되어 아카데미에 갈 때까지 참으라고만 해요. 이렇게만 말하면 엄청 소중하고 귀한 딸 같지만, 사실 저에게 엄청나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아빠는 영주님의 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데, 저택과 영주 성이 너무 멀어서 2주에 한 번 집에 들어올까 말까 하거든요. 사실 집에 돌아온 날에도 저를 끌어안고 뽀뽀해 주는 대신 숙제 검사나 신체검사-손톱 밑이나 귀 뒤를 확인하는 그런 거요- 같은 것만 해서, 그냥 이럴 거면 안 오는 게 낫지 않나 싶기도 해요.
예전에 엄마가 가지고 싶어서 결혼은 왜 안 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는데, 저를 낳아 준 엄마를 너무 사랑해서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똑똑히 기억하는걸요. 아빠가 결혼하고 싶어서 어떤 아줌마를 소개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요. 그날, 제가 그 아줌마의 독한 향수 냄새를 견디다 못해 토해 버렸던 걸요. 토한 위치가 아줌마의 휘황찬란한 드레스 자락이어서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날 아빠는 오랜만에 술을 드셨죠.
하일라가 그러는데, 아빠가 결혼을 못 하는 이유는 몰락 귀족이면서 귀족인 척 자존심은 엄청나게 세우는데 돈은 쥐꼬리만큼 벌기 때문이래요. 배가 나오고 못생겼는데 돈도 없으면서 자존심만 부리는 그런 남자를 감당할 여자는 없다나요. 그러면서 저는 외탁을 해서 다행이라고 했어요. 저도 다행이라 생각해요.
아무튼 집안이 대체로 이렇다 보니 집에 정을 붙이는 건 사실 저에게는 좀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오전 공부를 마치면 바깥을 떠돌아요. 하일라도 이 사실을 알고 있지만, 대개 모른 척하죠. 아마 앤더슨과 놀고 싶기 때문일 거라 생각해요.
그래도 저는 아빠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기 때문에 아이들과 놀지는 않아요. 대신 누군가를 관찰하죠. 제 또래는 관찰하지 않아요. 그 애들은 정말 유치하거든요. 맨날 똑같은 말만 하고요.
생선 가게를 하는 리사 아주머니, 꽃 가게를 하는 데시안, 빵모자를 눌러쓰고 신문을 파는 페터. 다 좋은 분들이지만…… 관찰 대상으로 선정하기엔 좀 매력이 없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서 저는 자연스레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그 사람이 누구냐고요? 3개월 전 홀연히 나타나 마을 외곽에 자리를 잡은 남자예요. 우리나라 국민의 80%가 가지고 있다는 평범한 갈색 눈에 갈색 머리지만, 저는 이 사람이 어쩌면 이 제국에서 가장 특이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저는 한 번도 이 도시 밖으로 나가 본 적은 없지만요!)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던 건 한 달 전이었어요. 그 사람은 가끔 에이미가 운영하는 식료품 가게에 와서 일주일 치 음식을 사 가곤 하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과 대화한 후에 에이미가 조금 달라졌어요. 어떻게 달라졌냐면…… 딱 꼬집어 말하기는 힘든데, 어휘가 조금 더 풍성해졌다고 해야 하나요?
단적으로 설명하자면 에이미는 원래 100가지 문장을 말할 수 있었는데 저 남자와 만난 후에는 150가지의 문장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달까요.
에이미는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제가 궁금한 것들에 대해 답변을 잘해 주는 사람은 아니었거든요. 예를 들어 어째서 전쟁이 계속되고 있는지, 나라는 왜 지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요. 그러면 에이미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생각을 하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네요.” 하고 웃을 뿐이었어요. 다른 질문을 던졌을 때에도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라고 답할 뿐이었어요.
그거 알아요? 그때 에이미의 표정이 꼭 빵집 아저씨를 닮아 있다는 거.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라고 말할 때의 에이미는 빵집 아저씨가 ‘어서 오세요’와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할 때의 표정과 똑같아요. 뭐 얼굴이 다르니 완전히 똑같은 건 아닌데, 그…… 진짜가 아닌 것 같은 느낌 있잖아요?
모르겠다고요?
정-말, 제가 아홉 살이라는 걸 잠깐 잊고 계신 거 아니에요? 조금 조숙할 뿐이지 설명을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이 가면을 쓰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그 남자와 조금 대화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가면이 조금 벗겨지는 기분이 든다는 거예요.
그렇다고 그 사람이 딱히 뭘 하는 게 아닌데도요. 심지어 다른 사람들보다 무뚝뚝한 편이죠. 필요한 물건만 딱 사서 인사도 안 하고 돌아가 버리니까요. 그러니 제가 수상히 여길 만도 하지 않겠어요?
저는 그 후로도 꾸준히 그 사람을 관찰했어요. 그리고 오늘 결론이 났죠.
제 생각에는요.
그 사람은, 신이에요. 그것도 지혜의 신이요.
왜 있잖아요. 하늘에서 내려와 우매한 인간들에게 지혜를 선물한다는 신! 아티네? 이티네? 아, 아테네! 지금은 유희 중이라 모습을 숨기고 있는 거죠. 착한 인간들에게 지식을 전해 주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오늘 직접 물어볼 생각이에요. 오늘은 에이미의 식료품 가게에 남자가 오는 날이거든요. 저번 주에는 안 왔으니 아마 이번 주에는 올 거예요.
“……!”
……라고 말하자마자 남자가 왔어요! 저는 에이미의 뒤로 몸을 숨겼어요. 아이를 낳고 몸이 좀 통통해진 에이미의 등은 숨기에 안성맞춤이었어요. 제가 그동안 하도 이상한 짓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에이미는 그러려니 하고 손님을 맞이하더라고요. 저에겐 다행인 일이었죠.
“어서 오세요.”
남자는 토마토와 가지, 감자, 버섯, 과일들을 바구니 안에 담고 계산대로 왔어요. 저는 여전히 에이미의 뒤에 숨어 에이프런을 쥐고 있었죠.
“오늘은 날씨가 참 좋죠?”
“…….”
에이미의 말에도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어린 제가 봐도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에이미는 조금 멋쩍어하며 말했어요.
“20실버입니다.”
저는 몰래몰래 남자가 지갑을 벌려 돈을 꺼내는 모습을 바라보았어요. 정말 맨송맨송하게 생긴 평범한 외모였지만 신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그 남자에게선 빛이 나는 것 같았어요.
저는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어요. 남자가 돈을 쥔 채 고개를 들었어요. 그리고 세상에, 저와 눈이 마주쳤어요. 당황한 저는 다시 숨으려다 에이미의 치맛자락에 걸려 뒤로 우당탕 넘어졌어요.
“세상에, 아가씨. 괜찮아요?”
말 걸지 마, 에이미!
저는 울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감시하고 있는 사람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는 탐정이라니요. 수치심에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어요. 하지만 에이미는 그런 저를 전혀 배려해 주지 않았어요.
“어떡해. 다친 거 아니에요?”
“아, 아니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보니 남자는 사라져 있었어요. 카운터에는 정확히 20실버가 올라와 있었죠. 여닫히는 나무 문 사이로 물건을 들고 떠나가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어요. 저는 망설임 없이 남자를 따라 뛰쳐나갔어요. 뒤에서 에이미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났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