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59화 (59/149)

#59

“뭐? 아랫마을? 여기서 가까워?”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 올렸다.

가깝긴, 개뿔.

괜히 전 재산을 털어 준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마법을 써서 쉬지 않고 날아왔는데도 20분이 넘게 걸렸다. 브레이슬릿을 벗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브레이슬릿을 채우던 압실론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까 열 받네. 그냥 죽이라고 할 걸 그랬나.

혼자 구시렁대고 있는데, 우물이 눈앞에 보였다.

“물이라도 한 모금 마실까.”

레베카를 만나 입을 털려면 그래도 좀 목을 축여 놓는 게 좋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나무로 만든 물통을 밑으로 내렸다. 보기만 해도 시원한 물이 물통 안에서 찰랑거렸다. 물을 마시려고 입을 가져다 댄 순간이었다.

“안 돼!”

촤아악!

누군가가 거세게 내 몸을 밀쳤다. 나는 땅바닥에 추잡하게 엎어졌다. 놓친 물동이의 물이 그대로 나를 덮쳤다. 어이가 없어 뒤를 돌아보니 여자가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 이게 뭐 하는 짓이죠?”

흠뻑 젖은 옷을 짜낼 생각도 못 한 채 나는 황당하다는 듯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잠시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허리에 손을 얹고 외려 당당하게 나왔다.

“내가 당신 목숨 살린 거예요. 감사하다고 말해요.”

“잘못 넘어졌으면 죽을 뻔했는데요?”

“적군이 그 우물에 독을 퍼트렸단 소문이 있거든요.”

“도, 독?”

“그래요. 마시면 30분 내로 몸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뿜으며 죽을 거예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동이 안의 물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신선하고 맛있는 물 - 체할 수 있으니 버들잎을 띄워 볼까?]

아니잖아!

나는 말릴 틈도 없이 물동이에 남은 물을 들이켰다. 여자가 화들짝 놀라 나를 말리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감질나서 오히려 더 갈증이 났다.

“죽을 수도 있다는 말 못 들었어요?”

“그냥 마셔도 돼요. 여기 독 같은 거 없으니까.”

“그, 그걸 어떻게 알아요?”

뭐라고 말하지? ‘상태 창을 봐서요.’라고 말하는 건 알아듣기 힘들 거고. 그래, 나는 모든 의심을 대부분 잠재울 수 있는 마법의 단어를 알고 있었다. 나는 재차 물을 퍼 올리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마법사라서요.”

여자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지. 나는 손을 휘저어 어둠 속에서도 환히 빛나는 나비를 만들어 보였다. 팔랑거리는 나비를 본 여자가 탄성을 질렀다.

“예뻐라……!”

마시고 싶은 만큼 물을 마신 나는 젖은 입가를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런데 외지인이 여긴 어쩐 일로 온 거예요?”

“내가 외지인인 건 어떻게 알아요?”

“우리 마을 사람이면 이 우물물을 마실 리가 없잖아요. 이미 소문이 짜하게 퍼졌는데. 그리고 이 좁은 마을에 마법사가 있는데 제가 그쪽을 모를 리가 없죠.”

아, 그런가.

“누굴 좀 찾으러 왔어요.”

여자가 대번에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양손을 들고 해칠 의도 따윈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걱정 마요. 해치러 온 건 아니니까.”

“정말이죠?”

“정말.”

전쟁 중이라 그런지 의심이 보통이 아니었다. 원래 시골 마을의 NPC들은 폐쇄적이고 의심도가 높게 설정되어 있는데 전쟁이 시작되며 그 정도가 더 높아진 듯했다.

“누굴 찾는데요?”

“레베카라고, 알아요?”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있나 보네.

“알아요. 근데 찾아서 뭐 하려고요?”

“전할 말이 있어서요.”

여자는 고민하는 듯 시선을 바닥에 놓고 턱을 문지르다 고개를 들었다.

“당신, 마법사면 치유도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다고 말하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못…….”

“할 수 있네.”

“네?”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나는 난처한 표정으로 뺨을 문질렀다. 독심술사도 아니고, 뭘 다 얼굴에 쓰여 있다는 건지.

“할아버지가 지금 아프세요. 치료해 주면 레베카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줄게요.”

“나 지금 바쁜데.”

“전 바쁠 게 없거든요.”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도전! 할아버지를 치료하라 – 레벨 30 이상]

[여자는 할아버지를 치료해 주면 레베카가 어디 있는지 알려 주겠다고 한다.]

[보상 – 레베카의 위치]

[수락] [거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가 보죠.”

* * *

여자가 데리고 간 곳은 집이라기보다는 허름한 움막에 가까웠다. 나는 천장에 쳐져 있는 거미줄과 썩어 가는 서까래를 보며 없던 병도 생기겠는걸, 생각했다.

“여기예요.”

그래도 나름 환자가 있는 곳은 신경을 썼는지 노인이 누워 있는 침대 주변은 깨끗했다. 오랫동안 누군가의 돌봄을 받았는지 침대맡 스툴이 놓여 있는 부분이 패어 있었다.

나는 노인에게 다가가 그의 상태를 살폈다. 그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원인은 종아리의 상처였다. 녹슨 칼날에 깊이 베인 것 같았다. 제때 치료받지 못했는지 상처가 곪아 썩어 가고 있었다. 나는 노인의 상태 창을 보았다.

[이름: 일레이 (Lv. 42)

나이: 73

직업: 없음

호감도: ???

체력: 21% (상태 이상 ‘파상풍’, ‘항생제’를 먹기 전까지 체력이 초당 0.015%씩 떨어집니다. 자연 치유 불가.)

마력: 80%

.

.

.

상태: 죽어 가고 있습니다.

마음 엿보기: ???]

“어쩌다가 이렇게 됐죠?”

“처음 전쟁이 일어났을 때, 약탈범들에게 습격당하는 걸 방어하려다가 이렇게 되었어요.”

나는 노인의 상태를 파악하며 내 마나를 확인했다. 여기까지 날아오느라 남은 마나가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노인 하나 치료하기엔 충분해 보였다.

나는 노인의 상처 부위를 매만지며 시동어를 읊었다.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 걸 여자가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진짜 온갖 데에 민폐 끼치고 있구나. 나는 새삼 이 문제를 일으킨 놈들에게 실망스러워졌다. 분명 그때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들에게 감동받았던 기억들이 파사삭 깨지는 것 같았다. 하긴, 나 하나 가두려고 온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었을 때부터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폭군 확정이었다.

단순 상처가 아니고 파상풍이었기에 치유는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나는 마나를 한계까지 쏟아부은 뒤 다시 노인의 상태 창을 확인했다.

[이름: 일레이 (Lv. 42)

나이: 73

직업: 없음

호감도: ???

체력: 20%

마력: 80%

.

.

.

상태: 취침 중입니다.

마음 엿보기: ???]

“됐다.”

“다 된 거예요?”

“네.”

“어쩜, 그렇게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는데 이젠 말끔하네.”

여자가 신기하다는 듯 노인의 종아리를 어루만졌다.

“이제 레베카한테 안내해 줘요.”

“아, 네에……. 그래야죠.”

내 말에 여자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뭐지? 설마 모르는 건가? 다행히 인내심이 끊어지기 전에 여자가 입을 열었다.

“안내할 것도 없어요. 내가 레베카거든요.”

“엥?”

“내가 레베카라고요. 이 마을에 레베카는 나밖에 없어요.”

[‘도전! 할아버지를 치료하라’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레베카의 위치’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베카의 위치 – ‘키센’ 마을 ‘일레이’의 집]

나는 어이가 없어 여자의 상태 창을 눌러 보았다.

[이름: 레베카 (Lv. 26)

나이: 21

직업: 재봉사

호감도: ???

체력: 90%

마력: 95%

.

.

.

상태: 멋쩍어하고 있습니다.

마음 엿보기: ???]

아, 등신…….

나는 머리를 감싸 쥔 채 쪼그려 앉았다. 노인 상태 창은 두 번이나 확인했으면서 왜 앞에 있는 여자 상태 창 확인할 생각은 안 했는지.

“속이려고 속인 건 아니에요. 이런 작은 마을에선 평생 가도 마법사를 볼 수가 없거든요. 다급해서 그랬어요.”

레베카가 우물쭈물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확인하지 않은 내 잘못도 있으니까. 나는 뒷덜미를 긁적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나한테 볼일이라는 게 뭐예요?”

원래라면 밖에 나가서 말했겠지만, 한시가 바쁜 나는 바로 이 자리에서 바이런의 전언을 읊었다.

“바이런이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바이런이라는 말에 레베카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전언을 전하러 왔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모양이었다. 리넨으로 된 앞치마가 레베카의 손아귀 힘에 와락 구겨졌다.

“아, 그렇군요. 무슨 일이라도…….”

무슨 일은 있죠. 걘 꼭두각시처럼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거기에 있게 될 테니까. 하지만 굳이 전하지 않아도 될 말도 있는 법이었다.

“다른 남자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라고 하더군요.”

“…….”

“다 잊어버리고, 꼭 행복해지라고.”

“어떻게…….”

레베카는 큰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레베카의 표정을 외면한 채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레베카의 행복한 삶’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바이런의 낡은 돈주머니’를 획득하였습니다.]

“맵 켜 줘.”

<‘맵’ 기능이 켜졌습니다. 10분간 ‘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은 캐시: 21,300원>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맵을 들여다보았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뭐지? 이게 아닌가?

생각하던 나는 바이런이 죽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젠장.”

입맛이 썼다. 내가 도착할 때까지 그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레베카를 두고 달려 나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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