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받아 주십시오.”
“……이게 뭔데?”
“보기엔 좀 허름해 보여도, 제 전 재산입니다.”
척 보기에도 썩 상태가 좋지 않은 주머니였다. 뜯어진 실밥 사이로 동화의 끄트머리가 삐죽이 나와 있었다. 그는 큰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숨을 죽이고 말했다.
“저는 맡은 임무가 있어 이곳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그래?”
알아, 라고 말할 순 없었기에 나는 조금 놀란 척을 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키센이라는 아랫마을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레베카라는 아가씨인데, 결혼 약속을 해 놓고 갑작스레 이곳으로 차출되는 바람에 이 소식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어? 남자의 말에 무언가 기시감이 들었다.
“그것참 안타까운 일이네.”
“다른 남자와 결혼해 행복한 삶을 살라고 전해 주세요. 저 같은 건 잊어버리고…… 꼭 행복해지라고.”
바이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레베카의 행복한 삶 – 레벨 30 이상]
[바이런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키센 마을의 레베카를 찾아가 바이런의 말을 전하자.]
[보상 – 바이런의 낡은 돈주머니]
[수락] [거절]
나는 향수에 젖어 오랜만에 떠오른 퀘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그래, 종종 이런 미니 퀘스트를 받곤 했었는데.
“그래, 알았어.”
“전해 주시는 겁니까?”
바이런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응, 레베카에게 전해 줄게.”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막 ‘수락’을 누르려는 순간, 퍽! 수박이 으깨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뺨 위로 붉은 액체가 튀었다. 나는 한동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내게 감사를 표하던 바이런이 발밑에 죽어 있었다.
“이게 무슨……!”
당황한 이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혹시나 다른 이들이 왔나 싶어 뒤를 돌아본 나는, 압실론의 검지에서 흩어지고 있는 빛무리를 보았다. 압실론이 바이런을 죽인 것이다. 최면이 풀린 건가? 하지만 여전히 압실론의 눈은 동태 눈깔이었다.
“안 돼. 이현, 가면 안 돼…….”
압실론이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정답을 맞추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퀘스트구나.
퀘스트로 NPC와 플레이어가 연결되는 순간 루프의 고리가 끊기는 거였어.
서사가 생긴 이들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퍼즐이 빠른 속도로 짜 맞춰졌다. 너무나도 간단한 진실에 지금껏 고생해 온 게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러니까 밖에 못 나가게 만들었구나. 눈 가리고 아웅 한 셈이었으니 얼마나 불안했겠어.
나는 조소하며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시체가 사라져 있었다. 어디선가 리젠되었다는 증거였다. 그때, 누군가 빠른 속도로 언덕을 넘어 우리에게 다가왔다. 다르반이었다. 밥을 가져온 건가 싶었는데 그러기엔 쓴 사탕을 입 안에서 굴리고 있는 것처럼 표정이 안 좋았다.
“위치가 발각됐어.”
“뭐?”
“젠장, 추격해 오고 있다고! 나까지 현상 수배에 올랐단 말이야!”
다르반이 잘못 걸렸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이안의 표정이 대번에 심각해졌다. 이제야 방법을 찾았는데. 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흩어지자.”
“예?”
“여기서부터는 각자 행동하자고. 네가 압실론을 데리고 가. 같이 있어 봤자 내가 의뢰받는 걸 계속 방해할 테니까.”
“그건 그렇지만…….”
“당신은 여기서 빠져나가서 도망쳐.”
나는 다르반을 향해 말했다. 다르반이 분하다는 듯 나를 노려보다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그가 사라지는 걸 본 나는 이안을 향해 다가갔다.
“지금까지 정말 고마웠어.”
그의 귓가에 대고 나는 그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던 이름을 속삭였다.
“네 이름은 라이시안 헬리오스 루튼 카디날 벨라트리체야.”
나는 혹시 몰라 종이에 써 두었던 이름을 함께 건네주었다. 또 인간과 접촉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자신의 본명을 듣자마자 검은색이었던 이안의 머리칼이 길게 늘어지며 투명하리만치 밝은 백색으로 변했다. 검은 도화지에 하얀 물감을 떨어트린 것처럼 색이 변해 가는 과정을 나는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으득, 뼈가 어긋나고 맞춰지는 소리가 나며 골격이 점차 커져 갔다.
수 초가 지나고 이안은 나를 닮았었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으로 변했다. 동양적인 이목구비를 가진 장신의 남자. 이안이 허리까지 오는 자신의 백색 머리칼을 매만지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감상은 나중에 하고, 이제 가.”
시간이 없었다. 나를 위해 고생해 준 그를 보내 주어야 할 때였다. 그러나 이안은 가만히 나를 바라볼 뿐, 도망치지 않았다. 나는 숲속에서 만난 사슴이 내 주위를 맴도는 듯한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뭐 해?”
“왜 벌써 이름을 알려 준 겁니까?”
“엥? 못 들었어? 애들이 오고 있다잖아.”
“제가 당신이었다면 마지막 순간까지 이름을 알려 주지 않고 이용했을 겁니다.”
“어떻게 그러냐. 나 때문에 고생했던 거 뻔히 아는데.”
이안이 신기한 것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는 나나 압실론이 함부로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간격을 벌리고 있었다. 이제는…… 뭐, 잡을 수도 없고.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나야 잡혀도 안 죽지만, 넌…… 죽을 수도 있으니까.”
그것도 꽤 잔인하게.
평소 그들의 잔인한 성정을 떠올리던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모르지, 나도 죽을지도. 그 전에 선행 하나라도 하고 싶었다. 그럼 하늘도 깊이 감명받아 나를 탈출할 수 있게 해 주지 않을까.
“제가 당신이었다면…….”
“응?”
“브레이슬릿을 풀자마자 자결했을 겁니다.”
“뭐?”
“그들의 집착은 상상 이상이에요. 조심하세요.”
나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 그래. 충고 고맙다.”
“피하세요.”
“어?”
그가 수풀 속으로 숨은 채 내게 손짓했다. 왜 그러나 싶어 앞을 바라보니 세나르도 병사와 그리체 병사가 언덕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비슷한 시간대에 리젠된 모양이었다. 우리는 재빨리 수풀 뒤로 몸을 숨겼다. 압실론이 쪼그려 앉아 멀뚱멀뚱 싸움을 구경하고 있었다.
“죽여 드릴까요?”
“어?”
이안이 저와 조금 떨어져 있는 압실론을 눈짓해 보이며 말했다.
“약이 거기까지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원하신다면 노력해 보겠습니다.”
애프터서비스 한번 확실하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냥 약발 다 될 때까지 어디 오지 산간에서 고생이나 실컷 하게 만들어 줘.”
“……사람이 너무 좋으십니다.”
“그런가.”
그들에게 가진 감정은 복잡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밉다가도, 종종 죄책감이 들곤 했다. 죽일 기세로 검을 찔러넣을 수 있을 것 같다가도, 와락 끌어안고 뒤통수를 헤집어 놓고 싶어졌다. 만약 내가 탈출하더라도 넷이서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도 그냥 해 본 말입니다. 아무래도 저만한 마법사를 해치우긴 힘들겠죠.”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캐릭터 한번 독특하네. 나는 실소하며 낯선 이안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던 이안이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비밀을 더 알려 드리지요.”
압실론을 멀리 떨어트려 놓고도 그가 목소리를 죽인 채 말했다. 나 역시 덩달아 긴장해 그의 이야기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당신은 이 비밀을 아는 최초의 인간이 될 겁니다.”
“뭐, 뭔데?”
“우리는 변하는 게 아닙니다. 자신에게 주술을 거는 거죠.”
“압실론이 나한테 걸어 준 마법처럼?”
“그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 마법은 시전자의 마나를 계속해서 잡아먹고, 유지 시간도 짧지요. 하지만 우리의 주술은 근본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그, 그렇구나. 굉장하네.”
“그 주술은…… 타인에게도 걸 수 있습니다.”
“……?”
“그러니 혹시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으면 저를 찾아오세요.”
제가 당신을 변화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찾을 수 없도록.
진지한 이안의 말에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네가 어디 있는 줄 알고.”
“제가 어디에 있든, 찾을 수 있다는 걸 압니다.”
나는 뜨끔한 표정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말대로였다. 정확한 이름을 알면 맵 기능을 이용해 그의 위치를 찾을 수 있었다. 이안이 알고 있다는 건, 나머지 넷도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걔네 정말 별걸 다 연구했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한다고요. 그러니 제가 드린 당부를 기억하세요.”
뭐, 죽으라는 거?
“음, 진지하게 생각해 볼게.”
“그래도, 웬만하면 당신이 성공하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나는 압실론을 데리고 떠나가는 이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결벽증에 걸린 것처럼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압실론과 한참 거리를 두고 있는 모습에 묘하게 웃음이 나왔다.
이안과 대화하는 사이 승부가 갈렸다. 이번에도 세나르도 병사가 승리했지만, 직전처럼 부상을 입은 채였다. 나는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배를 뚫린 바이런을 향해 다가갔다.
“뭐, 뭡니까.”
나를 적으로 생각했는지 그의 눈빛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나, 나에게 볼일이라도 있는 거요……?”
“치유.”
나는 그의 배에 손을 얹고 나직이 주문을 외웠다. 바이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낫고 있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지, 지원군이십니까?”
한 줄기 희망을 붙잡은 표정을 짓고 있는 바이런을 보며 나는 싱긋 웃어 보였다.
“아니, 그냥 지나가는 마법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