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그러나 몹의 죽음이라도 눈앞에서 계속 펼쳐지다 보니 피로감이 들었다. 나는 눈두덩을 매만지며 슬쩍 시선을 돌려 일행들을 살폈다. 이안, 압실론, 다르반. 그들은 이 장면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죽어도 다른 존재로 대체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혹은 불멸의 삶이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압실론과 이안은 무심히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황궁에서 지내며 이미 많은 것들을 알고 있어서겠지. 그렇다면 다르반은……. 초반엔 충격받은 듯 창백한 낯을 하고 있었던 다르반은 이젠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수첩에 계속해서 쓰고 있었다. 나는 궁금했으나 차마 물을 수는 없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간이 흐른 뒤 우리는 그들을 가지고 실험을 하기 시작했다. 둘을 한 번에 죽인 적도 있었고, 싸우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각자의 장소에서 리스폰되는 걸 막아 보기도 했다.
그러나 별 소득이 없었다. 우리는 장소를 이동해 보기도 했다. 자연 지대라 인간의 영향력이 약하고, 국경 지대였던 곳이라 혹여 로그아웃할 수 있는 틈이 있는 곳으로. 다르반의 정보력은 과연 대단했으나, 우린 해가 저물어 갈 때까지 이렇다 할 소득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젠장.”
세상의 끝과 가깝다는 이슈아 절벽에 다다랐을 때였다. 저물어 가는 해를 절망스럽게 바라보던 나는 이안의 나직한 욕설에 뒤를 돌아보았다. 절벽과 조금 떨어진 마을의 성벽에서 봉화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여긴 세나르도 제국의 가장 끄트머리로, 그리체 제국에서 제일 멀다고 볼 수도 있는 곳이었다. 여기까지 봉화가 피어올랐다는 건, 이 세계가 전부 나의 실종을 알아차렸다는 말과 같았다.
“외형 바꿔 줘.”
이안이 압실론을 바라보며 나를 가리켰다. 나는 여전히 로브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지만, 나 역시 여기까지 봉화가 피어오른 이상 외형을 바꾸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전히 멍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압실론을 바라보며 신신당부했다.
“남성체로. 키는 좀 크고 몸은 좋게.”
이안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내겐 중요한 문제였기에 무시했다. 섬세한 조정 끝에 나는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180 중반의 남성으로 변했다. 손도 발도 커져 옷이 좀 끼긴 했지만, 기분은 좋았다. 이젠 브레이슬릿도 풀려 내가 직접 마법을 쓸 수도 있었지만, 외형 변화 같은 종류의 마법은 나보단 압실론이 섬세하게 잘하는 편이었다. 외형을 만족스레 꾸민 나는 혹시나 싶어 압실론의 상태 창을 살펴보았다.
[이름: 압실론 디트크리프 (Lv. 222)
나이: 23
직업: 마법사의 탑 주인
호감도: ???
체력: 55% (현재 미약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해독까지 6일 5시간 23분 46초)
마력: 34%
클래스: 9클래스 익스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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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 과도한 육체 활동 및 무분별한 마법 사용으로 인해 지쳐 있습니다.
마음 엿보기: ???]
다행히 백작이 가진 약은 지속 시간이 긴 편이었다. 아직 6일이나 남았다니. 나는 이 세상에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를 백작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파블로.
그런데, 백작은 어떻게 죽었을까?
“나, 배고픈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다르반이 배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점심 이후로 쭉 굶고도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먹고 오세요. 난 여기 있을 테니까.”
“그럼 저도 여기 있겠습니다.”
이안이 그렇게 나오자 압실론도 별말 없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르반은 자신과 함께 마을로 가겠다는 이가 하나도 없자 뒷머리를 벅벅 긁다가 먹을 걸 구해 오겠다며 떠났다.
“배고프면 다녀오지, 왜.”
“밥 한두 끼 먹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게다가 이런 상황에서 밥이 먹힐 것 같지도 않고.
피거품을 뿜어내며 죽어 가고 있는 그리체 제국 사람을 바라보았다. 세나르도 병사가 숨을 헐떡이며 눈꺼풀 위로 흘러내리는 피를 닦아 내고 있었다. 그의 상태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출혈로 인해 한 시간 안에 죽을 것 같았다.
“그런데 백작은 어떻게 됐어?”
“죽었습니다.”
그렇구나.
“제가, 죽였어요.”
이안이 크게 숨을 들이쉰 숨을 내뱉듯 말했다. 홀가분해 보이는 그 모습에 나는 진심으로 잘됐다고 생각했다.
“다시 태어날 일은 없어서 다행이네.”
“동감합니다.”
고위 NPC들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눈앞에서 죽어 가고 있는 병사들과는 다르다. 그렇다면 고위 NPC와 아닌 NPC의 기준은 누가 나누는 거지? 순간 눈앞에서 생각 하나가 스쳤다.
“압실론한테 가지고 있는 권한 나 좀 빌려줘 봐.”
“생각난 거라도 있습니까?”
“응, 확실하진 않지만.”
“……내게 하듯 그에게도 복종해.”
“네, 네에…….”
복종이라는 말에 압실론의 귀 끝이 살짝 달아올랐다.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뭐야, 얘 왜 좋아해?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취향을 새로이 알게 된 게 그리 기쁘지 않았다.
“일어나 봐.”
압실론이 내 말에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봐.”
앉았다 일어났다 외에 차마 말할 수 없는 행동을 몇 번 시킨 나는 약효가 끝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가 내게 완전히 복종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있는 힘껏 압실론의 뺨을 갈겼다.
꼭대기에 맺힌 감이 농익어 바닥에 퍽,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후.”
지난 세월에 대한 울분을 조금이나마 터트리자 속이 시원했다. 꿈쩍 않고 서 있는 압실론의 뺨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이안이 흐린 눈을 하고 입을 열었다.
“비열하네요.”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 것뿐이지.”
나는 압실론을 앞에 세워 두고 오만하게 기대어 앉아 본격적인 질문을 시작했다.
“전쟁 지대를 취소하게 할 방법이 있어?”
“이, 있어.”
“뭔데?”
벌써 해답을 찾게 되는 건가 싶어 내심 기대를 하고 있는데, 압실론이 즉답했다.
“루드비히와 체자레가 저, 전쟁을 종료하면 돼.”
“…….”
정말 퍽이나 쉬운 일이었다. 나는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말했다.
“다른 방법은 없어?”
“없, 없는데…….”
“시스템 설정 건드린 건 너였잖아. 잘 생각해 봐.”
압실론은 잠시 턱을 괴고 고민했다.
“없어.”
“너 진짜 도움 안 된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얼굴을 문지르는 손이 떨리지 않도록 많은 공을 들여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봐 버린 것이다.
없다고 말하는 순간, 압실론의 눈동자 안쪽에 스쳐 지나간 이채를.
내가 그에게 집중하고 있지 않았거나, 브레이슬릿을 차고 있었다면 몰랐을 사실이었다. 눈동자 안쪽의 이채, 그것은 금제에 걸려 있는 이들 특유의 반응이었다.
방법은 없지 않았다. 분명 있었다. 압실론은 그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저 금제를 걸어 놓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압실론에게 금제를 걸 사람은 흔치 않으니, 스스로 걸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무방했다. 하여간 지독한 녀석이었다.
생각하자, 생각해.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지금은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죽어 간 이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루드비히의 실권 장악을 위해 스러져 간 이들, 이제는 누구도 떠올리지 않는 엑스트라들을. 그들 모두가 어디선가 다시 태어나진 않았을 거다. 그랬다면 그 전쟁은 끝나지 않았을 테니까.
생각해. 떠올려. 아주 작은 힌트라도. 분명히 그 안에 답이 있을 거야.
하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오래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실전을 택했다.
“이번엔 내가 나가 볼게.”
나는 지금까지 안전을 이유로 한 번도 그들의 앞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변장한 지금이라면 나서도 될 것 같았다.
“예.”
이안 역시 그렇게 생각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를 향해 다가갔다. 세나르도 병사는 내 등장에 화들짝 놀라 몸을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상처를 입어서인지 도망치지는 못했다.
“뭐, 뭡니까.”
확실히 체격이 큰 상대에게는 자연스레 존댓말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그가 도주하기 힘들 만큼의 부상을 입은 탓도 있었겠지만.
“나, 나에게 볼일이라도 있는 거요……?”
일단 나오긴 했지만, 이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취할지 결정하지 않았기에 나는 먼저 침묵했다. 단순히 죽이는 거로는 어떤 소득도 얻지 못했다.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다른 장소를 찾는 수밖에 없는 걸까.
나는 일단 그를 치료해 보기로 했다. 치유 마법은 내 분야가 아니었지만 마나가 넘쳐 나니 이 정도 상처는 치유할 수 있었다.
“치유? 치료? 회복? 아닌데, 치유였던 것 같은데. 치유!”
기본 시동어가 주어지긴 하지만, 개인이 따로 지정할 수도 있었다. 내가 정해 둔 치유 마법 시동어가 뭐였는지 고민하던 나는 이것저것 전부 외쳐 보았다. ‘치유’라는 시동어를 외치는 것과 동시에 손에서 나온 빛이 병사를 감싸 안았다. 병사가 의아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지, 지원군이십니까?”
남자의 시선에 희망의 빛이 차올랐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지나가는 마법사.”
남자의 낯에 잠시 실망의 빛이 스쳤다. 그의 회복 속도는 느렸지만, 끊임없이 마나를 떡칠하니 피는 서서히 멎어 들었다. 슬쩍 내 마나 통을 살펴보니 80% 정도로 아직 안정권이었다.
“아, 아무튼 정말 감사드립니다.”
“뭘.”
“제 이름은 바이런입니다. 지금은 가진 게 없지만 언젠가 꼭 보답해 드리겠습니다.”
투구를 쓴 남자가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시스템 창에서 남자의 호감도가 올라갔다는 걸 알려 주었다.
“그래, 기대할게.”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던 남자는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품속을 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