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56화 (56/149)

#56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지역을 발견했습니다.]

[경험치와 아이템 획득률이 20% 증가합니다. 남은 시간 59:58…….]

나는 띠링, 하는 음성과 함께 떠오르는 시스템 창을 대충 넘기며 연신 손부채질을 했다. 나와 달리 이안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와 함께 발맞춰 걷는 데 열중했다.

“전에 당신도 본 적 있을 텐데요.”

“응?”

“백작이 내게 준 약이요.”

약? 무슨 약? 백작 이미 저세상 간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인가 싶은데 불현듯 기억 하나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네 타액을 섞은 뒤 황제의 잔에 이걸 타라.’

‘……독약인가요?’

‘힘들게 구한 묘약이다. 최면 상태가 되어 일정 기간 동안 네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지. 미약으로 구분되니, 독에 내성이 있는 황제에게도 먹힐 거다.’

‘……들킬 겁니다.’

“아! 내가 백작 쫓아가서 엿보던 날!”

“이제 기억나신 모양이군요.”

“어어. 기억나. 그런데 그걸…… 압실론한테 먹인 거야?”

그래서 백치가 된 건가?

나는 뒤에서 맹한 표정으로 걷고 있는 압실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아닐 겁니다. 백치는 마법 자체를 쓰지 못해요. 그것보다는…… 최면에 걸린 상태에 가깝죠.”

“와, 너 간도 크다.”

“간절했으니까요.”

온갖 약물을 다룰 줄 아는 황궁 마법사에게 약을 먹여 놓고도 이안은 평온한 모습을 유지했다. 나는 새삼 그의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차라리 나한테 먹이면 되는 거 아니야?”

“저는 저를 걸고는 도박을 하지 않습니다.”

“…….”

어……. 압실론은 걸어도 되고?

나한테 먹였다가 백치가 될 수도 있으니 안 먹였다는 소리였다.

“뭐, 아무튼…… 잘했어. 고마워.”

어쨌든 황궁 지하에 처박혀 살던 내가 황궁을 탈출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이안의 도움이 컸다.

“인사보다는 대가로 받겠습니다.”

“……탈출하고 나면 꼭 알려 줄 테니 걱정 마.”

“그 약속 꼭 지키길 바라겠습니다.”

안 지키면 현실 세계까지 쫓아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괜스레 등골이 서늘해져 땀에 젖은 팔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약은 어떻게 먹인 거야?”

정글의 중심부까지 가는 데 꽤 시간이 걸렸기에 나는 이안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이안은 생각보다 상냥히 내 말에 답해 주었다.

“다르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응?”

“그가 황궁에 심어 놓은 이들이 제법 많았거든요.”

‘붉은 달이 뜬 밤’이 정보 길드였던 건가. 거기 수장이라고 했으니 사람을 운용하는 건 손쉬웠을 터였다.

“지하에 메시지를 전달한 것도…….”

“내 부합니다.”

압실론과 함께 앞서 걷고 있던 다르반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아, 그래요.”

“흥.”

퉁명스러운 태도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정보 길드면 좀 어? 상냥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야? 이래서야 알려 주려다가도 짜증 나서 안 알려 주겠다. 내가 작게 씨근덕거리자 이안이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말했다.

“당신 때문에 내기에서 져서 그래요.”

“내기? 무슨 내기?”

“이름을 맞추는 내기요.”

이름을 가지고 내기를 했다고? 나는 이안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너 내가 못 맞췄으면 어쩔 뻔했어.”

별걸 다 묻는다는 듯 이안이 여상히 답했다.

“저는 당신에 대해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에겐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요.”

이안의 말에 괜스레 등골이 서늘해졌다. 하긴 얘 루드비히 밑에서 오래 일했댔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어쩌면 압실론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긴 어떻습니까.”

중심부에 다다를 무렵, 이안이 내게 다시금 물어 왔다. 나는 다시 한번 로그아웃을 시도해 보았다.

[몰입감을 위해 전쟁 중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도시에서의 로그아웃이 불가합니다.]

어떻게 여기까지 전쟁 중이야.

나는 꽥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참아 내었다. 내 표정이 어두워진 걸 눈치챈 이안이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다른 곳으로 가 보죠.”

* * *

우리는 희끄무레하게 동이 터 올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도 로그아웃할 수 없었다. 아니, 여긴 비무장지대 같은 것도 없나? 밤새 걷고도 소득이 없자 나는 잔뜩 열이 받아 돌을 팍 찼다.

“아, 씨. 누구야!”

굵직한 남자의 고함이 근처에서 터져 나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수풀 너머로 남자가 씩씩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가 옹기종기 앉아 있는 수풀을 그가 젖히기 직전이었다. 우리의 위로 그림자가 지나 싶더니 그것이 순식간에 남자와 칼을 맞대었다. 챙-!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칼을 마주한 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세나르도 제국의 문양이 새겨진 갑주를 차고 있었다. 다른 한쪽은 그리체 제국 문양 자수가 새겨진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네 얼굴 보기도 지겹구나.”

“난 널 본 적도 없는데 무슨 소리야.”

짧은 대화를 나눈 둘은 대화 대신 검을 맞대는 것에 집중했다. 수 초 안에 수십 합이 오갔다. 승부는 금방 났다. 그리체 제국 병사에 비해 세나르도 제국의 병사의 체격이 훨씬 컸고, 실력도 좋았다. 그는 손쉽게 그리체 제국 병사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 반쯤 파고든 검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그리체 제국 병사가 이내 피를 토해 냈다.

“쿨럭…….”

남자가 그리체 제국 병사의 가슴에 찔러 넣었던 검을 비틀어 빼냈다. 그리체 병사가 바람 빠진 풍선 인형처럼 단박에 허물어졌다. 젖은 흙바닥 위로 끈적하고 검붉은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검을 쥔 채 앞으로 고꾸라져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남자가 고꾸라진 곳에서부터 둥그렇게 고여 있던 피 웅덩이가 점차 넓게 퍼져 갔다. 세나르도 병사가 감흥 없는 시선으로 그 장면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전쟁터에서 많이 봤던 죽음인데 생각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졌다. 15세 제한이 풀려 모자이크 대신 피가 그대로 보이는 바람에 더 그랬다.

세나르도 병사가 피곤에 젖어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그가 사라지기 직전, 이안이 압실론을 향해 말했다.

“저 사람, 처리해.”

압실론은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손가락을 튕겼다. 우뚝 서서 걸어가던 남자의 몸이 실 끊긴 꼭두각시처럼 허물어졌다. 나는 창백한 낯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뭐, 뭐 하는 거야!”

“실험해 봐야죠.”

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답했다. 나는 낯선 시선으로 이안을 바라보았다. 나야 게임이라지만 얘네한테는 진짜 삶일 텐데, 단숨에 목숨을 거두는 행위가 묘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내 표정을 봤는지 이안이 차갑게 식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두려우십니까?”

“아, 아니……?”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지만, 이안은 이미 모든 걸 눈치챈 듯했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는 절박한 겁니다.”

그리고…… 당신도 그럴 거라 생각하고요.

이어지는 이안의 말에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그래, 맞아. 네가 지금 찬물 더운물 가릴 때냐?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신세면서 어디서 게임 캐릭터 한둘 죽였다고 두렵네 마네 하고 있어. 여기 있는 애들을 다 죽여서라도 빠져나가야 하는 주제에.

생각을 마친 나는 거세게 양 뺨을 내리쳤다. 짜악! 살과 살이 마주치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이안은 물론 압실론과 다르반마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화끈화끈하게 달아오른 뺨의 온도를 느끼며 결연한 태도로 말했다.

“네 말이 맞아. 고마워.”

이안은 이제야 정신을 차린 나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해 보자, 해 보자. 포기하지 말고!”

“네, 그래요.”

나는 혹시나 해서 다시 로그아웃을 시도해 보았다.

[몰입감을 위해 전쟁 중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도시에서의 로그아웃이 불가합니다.]

아직 안 되는군.

나는 일행에게 들리지 않을 법한 작은 목소리로 맵 켜 줘, 라고 말했다. 그와 동시에 반투명한 맵이 시선의 중심부에 떠올랐다. 전쟁 중이라는 걸 알리는 붉은 점들이 맵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다. 나는 맵을 확대해 카타타 마을에 딱 맞게 맞추고 맵을 터치했다.

[카타타 마을 – 세나르도령]

[전쟁 중인 지역입니다.]

[세나르도 국민이 그리체에 가지는 적대감과 호승심이 20% 상승합니다.]

[그리체 국민이 세나르도에 가지는 적대감과 호승심이 20% 상승합니다.]

[전쟁 중인 도시에서는 자국민의 호승심과 적대감이 10% 증가합니다.]

[이 도시에는 민병대가 아직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아까 세나르도 쪽 병사가 이겨 세나르도령이 된 모양이었다. 맵을 자세히 살피던 나는 빠르게 우리가 있는 쪽으로 접근하는 붉은 점과 푸른 점을 발견했다. 루드비히와 체자레일지도 몰라 살짝 긴장했지만, 다행히 이름을 살펴보니 그건 아니었다. 붉은 점 위에는 제일러스라는 이름이 떠 있었고, 푸른 점 위에는 이튼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또 온다.”

이안의 말에 나는 맵에서 시선을 떼고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맵에서는 점에 불과했던 이들이 사람의 형체를 띠고 서로를 향해 격돌하고 있었다.

“이야아아-!”

이번에도 승리는 세나르도 쪽에 돌아갔다. 불행히도 배를 꿰뚫린 그리체 병사는 아주 오랜 시간 괴로워하다 죽음을 맞이했다. 조금 전 세나르도 병사를 죽이라 명령했던 이안조차 눈썹을 설핏 찌푸리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싸움은 계속되었다. 대부분 세나르도 병사가 이겼으나, 이따금 그리체 병사가 이길 때도 있었다. 그리체 병사가 이겼다고 해도 맵이 ‘그리체령’으로 바뀌는 것뿐, 다른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변화는 내게 나타났다.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폭력적인 상황에 오래 노출되다 보니 둔해진 걸까. 그저 게임 속 자연 발생한 몹끼리 싸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