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나 간다. 좀 이따 보자.”
“으, 응…….”
마티어스의 발소리가 점차 멀어졌다. 압실론은 주머니에 다시 물건들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덕분에 플라스크의 동그란 부분에 뺨이 눌려 찌부가 되었다. 나는 고개를 푸르르 떨며 성을 냈지만, 물건들은 여전히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조, 조금만 참아…….”
압실론이 내게 속삭이며 걷기 시작했다. 놀이 기구를 탄 것처럼 세상이 움직이는 데다 묘한 화학 약품과 단내와 역한 냄새가 뒤섞여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주머니를 꽉 쥔 채 겨우겨우 구역질을 참아 내고 있는데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압실론이 막 문을 지나쳐 후원을 걷고 있었다. 인적 드문 후원에 다다른 압실론이 주머니를 넓히더니 내가 있는 위치를 가늠하고 조심스레 손을 집어넣었다.
“여, 여기 타.”
압실론이 손가락을 모은 뒤 내게 내밀었다. 나는 녀석의 검지를 붙든 채 나머지 손가락을 계단 삼아 타고 올라갔다. 내가 손바닥 위로 올라온 걸 확인한 압실론이 나를 엄지로 살짝 누른 채 손바닥을 제 눈높이에 맞게 올렸다.
“뭐, 뭐야.”
녀석은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곤 한참을 바라보았다. 사실 바라보았다는 말보다는 관찰했다는 말이 더 알맞았다. 홍채의 근육이 이완되었다 수축하길 반복하며 나를 훑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유리 샬레 위의 개구리가 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만하라니까……!”
내가 싫어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압실론은 나를 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쯤 되면 나도 오기가 생겼다. 나는 바짝 날을 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붉은 기가 살짝 도는 녀석의 속눈썹 한 올 한 올과 눈썹의 결을 훑은 나는 연어의 주홍빛 속살 같은 색을 띠고 있는 뺨에 시선을 두었다.
아까보다 좀 붉어진 것 같은데.
생각하고 있는데 그 뺨이 점차 내게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압실론은 상기된 제 뺨에 내 머리를 비볐다. 특이한 행동에 어리둥절하게 녀석을 바라보는데 압실론이 더없이 사랑스러운 것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중얼거렸다.
“귀여워…….”
저, 저 징그러운 새끼.
그 모습은 같은 크기의 누군가를 설레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녀석의 속눈썹 한 올 한 올이 어느 방향으로 뻗어 있는지 샅샅이 볼 수 있었던 나로서는 징그러워 보일 뿐이었다.
“빨리 원래대로 돌려줘……!”
내가 내려가려고 버둥거리자 압실론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한쪽 무릎을 꿇고는 나를 땅 위에 내려놓았다. 후원에 잡초처럼 피어 있는 버들강아지가 내 키를 훌쩍 넘어 있었다. 나는 겁에 질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종종 둘러보았던 후원인데도 몸이 작아진 채 보자 기괴하고 두렵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들리는 풀벌레 소리조차 무서웠다.
압실론은 그 후로도 한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주문을 외웠다. 빛무리가 몸을 감싸며 주변의 사물들이 본래의 크기를 되찾았다.
“와, 진짜 답답해 죽는 줄 알았네.”
콱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압실론은 아직까진 탈출의 열쇠를 쥐고 있었다. 쓸모가 다하는 날 바로 머리통을 후려쳐야겠다 계획을 짜고 있는데 압실론이 나를 데리고 후원 뒤에 난 후문으로 향했다. 정문보다는 덜 삼엄한 편이었지만, 그곳 역시 기사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
이대로 괜찮은 건가 눈치를 보고 있는데 압실론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압실론과 나를 알아본 기사들이 경계의 눈빛을 띤 채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이가 제법 있어 보이는 경비병 하나가 문을 막아서며 말했다.
“마법사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오, 오늘 이현 생일이라, 바깥 구경을 시켜 주기로 했어.”
“그러십니까. 하지만 이현 님이 황궁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폐하와 장군님 중 한 분이 더 동행하셔야 합니다.”
언제 그런 거지 같은 규칙도 생긴 모양이었다. 압실론이 멍하니 기사를 바라보다 고개를 까딱였다.
“그래?”
“예,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필요는, 없지.”
“……예?”
순식간이었다. 압실론이 제 앞에 엉거주춤 서 있던 기사의 이마를 쿡 찍은 것은. 기사는 심지가 빠진 볏짚 인형처럼 허물어졌다. 대화를 지켜보던 기사들이 당황해 웅성거렸다. 압실론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대충 손을 휘저었다.
빛무리가 그들을 감쌌다. 당황을 감추지 못했던 그들의 눈동자가 이지를 잃고 흐려졌다. 압실론이 후문에 주먹 쥔 손을 내밀더니 서서히 폈다. 그와 동시에 육중한 철문이 긁는 듯한 소음을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몇 초 되지 않아 문은 두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만한 크기로 벌어졌다. 압실론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가자.”
“어, 으응.”
나는 이렇게 다소 허무하게 탈출에 성공했다. 물론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지만. 압실론의 손을 잡고 후문을 빠져나가자마자 쿵, 소리와 함께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압실론.”
“으응.”
“너 던전에서 뭐 잘못 먹었어?”
“아, 아니…….”
“네, 맞아요.”
압실론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뒤돌아보았다. 이안과 가면을 쓴 남자가 나무 뒤에 서 있었다. 대체 언제 온 건지. 제법 긴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눈치조차 못 채고 있었다.
“뭐야, 언제 온 거야.”
“원래 여기 있었어요.”
“…….”
아, 그렇구나.
“어떻게 된 거야. 설명 좀…….”
말을 맺기도 전 주변이 낮처럼 환해졌다. 우리는 깜짝 놀라 위를 올려다보았다. 저 멀리에서 마티어스가 봉화를 피워 올린 것이다. 밤에도 태양처럼 빛나는 붉은 머리칼이 봉화의 아지랑이에 이지러져 보였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흉흉한 기백이 여기까지 전달되어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
사자의 포효와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하나의 점에서 시작된 봉화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순식간에 내가 있는 곳을 넘어 저 멀리까지 봉화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번에 잡히면, 정말 죽을 거야.
병사들이 집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르래가 돌아가며 성문이 빠른 속도로 열리고 있었다. 망연히 이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 손목을 이안이 낚아채듯 쥐었다.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가죠.”
이안이 압실론 쪽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카타타 마을로 이동해.”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원래 압실론에게 반말을 했던가? 내게도 존대를 하는데? 그러나 압실론은 이안의 태도를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으, 응.”
투명한 흰 빛이 우리를 감싸 안았다. 성문이 열리고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병사 하나가 우리를 발견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표적이 여기 있다!”
목청을 높인 병사가 나를 잡으려 우악스레 손을 뻗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병사가 내 머리채를 쥐기 직전 나는 흰 빛에 둘러싸여 어딘가로 이동했다.
* * *
“여긴……?”
선선한 바람이 불던 황궁과는 달리 한낮의 여름처럼 더운 기운이 훅 불어왔다. 나는 그새 배어들기 시작한 땀에 앞섶을 팔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캄캄한 어둠 속 풀벌레 소리와 땅이 진동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뭐야. 지진인가?”
“화산 지대라서 그래요.”
“화산 지대? 여긴 왜 온 건데……?”
“어쩌면 이곳이 당신이 이 세계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니까.”
대답은 가면을 쓴 자에게서 들려왔다. 이 세계를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는 말에 나는 흠칫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번에…… 뵀던 분 맞죠?”
“……맞습니다.”
남자는 나에게 감정이 썩 좋지 않은 듯했다. 이 사람 이름이 뭐였더라.
“이름이…… 다르반 페리…….”
“그것도 맞으니까 그만 말하죠.”
다르반이 내 말을 끊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날을 세운 태도에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뭐야, 뭐가 문젠데. 나 역시 기분이 상해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데 이안이 우리 사이를 중재하고 나섰다.
“이 사람이 내기에서 져서 기분이 안 좋아요, 지금. 그래도 실력은 확실하니 안심해도 됩니다.”
“으응, 알았어.”
“일단 나갈 길을 찾아보죠. 여기선 나갈 수 있어요?”
“잠깐만.”
나는 시스템 창을 열어 로그아웃이 가능한지 확인해 보았다.
[몰입감을 위해 전쟁 중에는 전쟁이 일어나는 도시에서의 로그아웃이 불가합니다.]
“젠장, 안 돼. 여기도 전쟁 지역이야.”
“그렇군요. 그럼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 보죠.”
이안은 실망하지 않고 숲 안쪽을 가리켰다. 숲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으며, 습기와 열기로 가득했다. 찜통 속의 만두가 된 기분이었다.
“금붕어도 산책시킬 수 있겠는데…….”
어느새 턱 밑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훑고 있는데 압실론이 각자의 발 위에 빛의 구를 하나씩 놓아주었다. 어두웠던 주변이 금세 환하게 밝아졌다. 나는 이안의 옆에서 발맞춰 걸으며 물었다.
“쟤 왜 갑자기 네 노예가 됐냐? 꼭 약 한 것 같아.”
“맞아요.”
“엥?”
“약, 먹였어요.”
“무슨 약?”
흥미가 돋아 이안 쪽으로 시선을 기울이다 나무뿌리에 걸려 발을 헛디뎠다. 넘어지기 직전인 나를 이안이 잡아 주었다.
“조심하세요.”
“어, 응…….”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이안은 아예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걸었다. 화산 지대라 안 그래도 더웠는데 정글 안으로 들어오자 습기가 더 심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