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54화 (54/149)

#54

“무슨 일인진 몰라도 잘 풀렸음 좋겠네.”

“저녁 때까진 돌아오기로 했다. 압실론도 돌아올 테니 그때까지 방에서 좀 쉬고 있도록 해.”

“뭐야, 같이 놀아 주는 거 아니었어?”

“아쉽게도 좀 바쁘군. 마티어스를 붙여 줄 테니 같이 훈련이라도 해.”

“됐어. 방에서 낮잠이나 잘래.”

심통이 난 듯 자리에서 일어나 휘적휘적 방을 향해 걷는 나를 마티어스가 뒤따랐다. 물론 내 방이라 함은 지하 궁전의 방이 아니라 예전에 내가 쓰던 방이었다. 나는 나를 졸졸 따라오는 마티어스를 곁눈질하다 부러 크게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졸려.”

“그렇게 먹고 바로 잠이 와?”

마티어스가 기막히다는 듯 물었다. 이 녀석이 뭘 모르네. 나는 검지를 까딱이며 혀를 찼다.

“그렇게 먹었으니까 잠이 오는 거란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로 슬라이딩했다. 내가 없어도 꾸준히 관리되고 있었는지 잘 마른 이불에서는 뽀송뽀송한 햇볕 냄새가 났다.

“넌 보면 맨날 누워 있더라.”

“그럼 뭘 해야 하는데?”

“앉아 있거나, 걷거나, 뛰거나, 단련하거나…….”

“누울 수 있는데 왜 굳이 그래야 하지……?”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있는 나를 마티어스가 더없이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래, 그냥 그렇게 살아라. 내가 지켜 줄 테니까.”

“웃기네. 브레이슬릿 떼고 붙으면 너 내 발끝에도 못 미쳐…….”

“너 그거 없을 때에도 나 못 이겼어.”

“아니거든…….”

“아니긴.”

“네가 뭘, 알아…….”

잠결에 내 목소리가 늘어지자 마티어스가 말을 더 붙이는 대신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쳐 주었다. 방 안이 훅 어두워졌다. 뺨 위로 마티어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

“네가 만약 또 탈출한다면, 아예 멀리 도망쳐서 평생 내 눈에 띄지 말았으면 좋겠다.”

“…….”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땐 정말 끝장을 보고 싶을 것 같거든.”

“…….”

설핏 오던 잠을 깨울 만큼 섬뜩한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눈을 뜨고 마티어스에게 따져 묻는 대신 잠든 것처럼 고른 숨소리를 유지하는 데 신경을 집중했다. 마티어스는 잠이 든 나를 한동안 바라보다 방을 나섰다.

나는 실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티어스는 없었지만, 사용인 둘과 기사 둘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내가 탈출하려는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섬뜩한 눈빛에 등골이 서늘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소름이 인 팔뚝을 쓰다듬으며 입을 삐죽였다.

로그아웃해서 평생 볼 일 없을 테니 상관없네요.

나는 식당에서 보았던 이안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정말 오늘 탈출하게 되는 걸까. 던전이 열려 넷 다 우왕좌왕하고 있는 지금이 탈출하기에 최적의 때긴 했다.

어쩌면 하늘이 나를 돕고 있는 게 아닐까. 나는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오후의 태양을 응시했다. 0과 1로 만들어져 있는 가짜 태양이든, 가짜 신이든 아무래도 좋았다. 나를 내보내 주기만 한다면.

나는 손에 깍지를 끼고 진지하게 기도했다. 다음 날의 태양이 뜨기 전, 이 거지 같은 곳을 나가게 해 달라고.

* * *

이안의 탈출 계획이 뭘까 생각하다가 설핏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나는 내 손등을 매만지는 누군가의 손길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뭐, 뭐야?”

“쉿.”

익숙한 목소리, 익숙한 실루엣. 나는 조심스레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아, 압실론?”

“맞아.”

압실론은 귀찮다는 듯 대충 대답하고 브레이슬릿을 매만지는 데 집중했다. 평소와 다른 태도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들여다보았다. 평소보다 멍한 눈, 손목을 더듬는 감정 없는 손길. 나는 의심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너 정말 압실론 맞아?”

“……그, 렇다니까.”

말을 더듬는 걸 보니 압실론이 맞긴 한 것 같은데.

하지만, 정말 이상하잖아.

진짜 압실론이라면, 왜 브레이슬릿을 풀어 주는 건데?

투웅-. 이곳에 온 이후 나를 꾸준히 나약하게 만들었던 브레이슬릿이 너무나도 허무하게 풀려 매트리스 위로 추락했다.

<어둠의 힘이 깃든 브레이슬릿(제작자: 압실론 디트크리프)이 해제되었습니다.>

<체력과 마나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스킬 사용 제한이 해제되었습니다.>

<체력과 마나가 위험한 상태입니다. 충분한 물약과 휴식으로 체력과 마나를 보충해 주세요!>

나는 믿기지 않아 텅 빈 내 손목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압실론이 내 손목을 쥐고 일어났다. 나는 의아하게 압실론을 바라보았다.

“왜, 왜 그래?”

“나, 나가자.”

수많은 물음표가 머릿속에 차올랐다. 생일 선물로 브레이슬릿을 풀어 주기로 한 건가? 아니면 탈출을 도와주기로 한 건가? 아니면, 그냥 박제로 만드는 선택을 한 걸지도…….

박제된 내 모습을 상상하던 나는 잔뜩 겁에 질려 압실론의 손을 뿌리쳤다. 압실론이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마치 로봇의 것처럼 건조하고 차가워 나는 더 겁을 집어먹었다.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압실론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 이거 받아.”

“이게 뭔데?”

“…….”

압실론은 대답 대신 내가 쪽지를 볼 수 있도록 불을 밝혀 주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작은 종이쪽지였다.

[따라가세요.]

쪽지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지하에 있을 때 사용인에게 받았던 사탕에 쓰여 있던 것과 같은 필체였다. 나는 당황해 쪽지를 쥔 채 압실론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압실론을 꼬신 거지? 설마 산 채로 내보내 준다고는 안 했잖아, 하고 박제 만드는 엔딩은 아니겠지.

나는 의심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뭔가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가, 가자.”

“어…….”

압실론이 성큼성큼 나를 앞서 나갔다. 나는 주변을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고 일어나 앞서가는 압실론을 뒤따랐다.

* * *

복도를 걷는 내내 압실론은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옆에서 따라 걸으며 압실론의 고요한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뺨과 이마 쪽에 상처가 나 있었다. 목이 긴 옷과 로브를 입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지만, 무언가에 길게 긁힌 듯한 상처도 언뜻 보였다. 던전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제대로 치료도 하지 못하고 다급히 황궁으로 온 듯했다. 나는 녀석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말을 걸어 보았다.

“압실론.”

“으, 응?”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었어.”

몸 상태나 되돌아보고 그런 소릴 해라…….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압실론의 상태를 살폈다. 확실히 평소와는 상태가 좀 달라 보였다. 약이라도 먹인 걸까. 더 물으려고 운을 띄우는데 압실론이 갑자기 내 옷을 쥐고 무어라 읊조렸다.

“……!”

깜짝 놀라 소리를 내려는데 주변 풍경이 빠른 속도로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말을 멈추고 그것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뭐, 뭐야?!”

복도의 카펫도, 나를 쥐고 있는 압실론의 손도, 주변의 사물들도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갑자기 장르가 잭과 콩나무로 바뀐 건 아닐 테니 내가 작아졌다고 보는 게 맞았다. 항의할 새도 없이 압실론이 나를 자신의 로브 주머니 속에 처박았다.

“읍……!”

주머니 속에서는 화학 약품과 오래된 코르크 마개의 냄새가 났다. 실제로 내 키만 한 플라스크들이 서너 개 굴러다니고 있기도 했다. 그 외에도 먹고 난 과자 봉지나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이빨도 보였다. 낑낑거리고 있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언제 왔냐?”

“아, 아까.”

“아까 추가로 몬스터들 나왔다고 하던데, 그건 다 처리하고 온 거야?”

“어.”

마티어스였다. 플라스크 사이에서 자리를 잡으려 꼬물거리고 있던 나는 몸짓을 멈추었다.

“참, 이현은 봤어?”

“아직.”

압실론은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했다. 압실론의 사회성 없는 대답에 대화가 금방 끊길 것 같으면서도 마티어스는 생각보다 끈질기게 말을 걸어왔다.

“그래? 가 있는 내내 보고 싶다고 찡찡거리더니.”

“이제 고, 곧 보니까.”

“그래, 보기 전에 좀 씻긴 해야겠다. 너, 냄새 나.”

“그럴게.”

하여간 개코였다.

“근데 주머니에 그 불룩한 건 뭐냐?”

“…….”

“너 수납 거기 아니잖아.”

빨리 꺼져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영 듣고 싶지 않은 말이 나와 버렸다. 하여간 동물적 직감 하나는 뛰어난 녀석이었다. 압실론도 말문이 막히는지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잔뜩 긴장해 로브를 쥔 채 마른 입술을 축였다. 뭐라고 대답할까. 괜한 변명을 주워섬겼다가는 오히려 오해를 사기 십상이었다. 마티어스는 넷 중에 가장 감이 좋은 녀석이었으니까.

압실론은 뭐라 말하는 대신 내가 있는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

깜짝 놀라 구석으로 들어가 몸을 피하는데 압실론의 손이 플라스크들로 향했다. 달그락거리며 플라스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플라스크가 주머니에서 빠지며 약간의 틈이 생겼다. 덕분에 얼빠진 낯의 마티어스를 감상할 수 있었다.

“……플라스크?”

“……랑, 과자랑, 과자 봉투랑…….”

압실론은 계속해서 내가 있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마티어스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황당한 표정이던 마티어스가 누군가의 이빨이 나왔을 땐 기겁하며 손을 털어 냈다.

“이 미친 새끼, 이건 또 뭐야?”

“구, 구울의 어금니. 실험에 쓰려고…….”

“아, 됐어. 더 안 보여 줘도 돼. 너 진짜 취향 더럽다.”

마티어스가 질색하며 그것들을 압실론에게 돌려주었다. 둘의 손을 벗어난 작은 과자 봉투가 하늘거리며 복도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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