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무슨 일은. 아무 일도 없어. 그냥 네 몸이 너무 쓰레기 같아 보여서 그런 거지.”
내 말에 마티어스가 구구절절 변명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순간적으로 허를 찔린 듯한 표정을 지은 마티어스를. 진짜 무슨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저번엔 수도 한복판에 가고일이 나타나더니, 이번엔 황궁에 리자드맨들이라도 쳐들어온 걸까. 그렇다면 마티어스가 이렇게 다친 것도 이해가 됐다.
압실론도 다친 걸까. 아니면 어딘가로 파견 나가 있을 수도 있었다. 관련 일들을 처리하느라 루드비히가 여기까지 내려오지 못한 거고.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다면 로그아웃이 좀 더 손쉬울 테니까.
“알았어.”
“뭐가?”
“너랑 같이 체력 단련하겠다고.”
알았다는 내 말에 뜨끔한 표정을 지었던 마티어스가 다음 말을 듣더니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위쪽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 그래. 잘 생각했어. 지금부터 할까?”
“아니, 내일부터. 지금은 피곤해.”
딱 잘라 거절한 나는 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일어나려는 마티어스를 다시 잡아끌고 말했다.
“뭐 해, 나 재워 줘야지.”
“어? 어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띨띨해 보이는지. 나는 속으로 혀를 쯧쯧 차며 그의 토닥임을 받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
“다섯, 여섯…….”
“…….”
“일곱……. 여덟……. 아호옵…….”
“열, 이 새끼야. 열!”
나는 10을 외치는 것과 동시에 매트 위에 풀썩 누워 욕을 했다. 등을 포함한 온몸이 땀으로 가득 젖어 있었다. 수업을 시작하고 마티어스에게 미인계를 발휘해 보고자 했던 나의 욕망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얜 진짜 미친놈이었다.
“너 진짜 체력 없다.”
마티어스가 지쳐 쓰러진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반응에 울컥한 나는 마티어스에게 쏘아붙이듯 말했다.
“숨쉬기밖에 안 한 사람이 갑자기 두 시간씩 운동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그러게 누가 평소에 숨만 쉬고 살래?”
“야, 너나 아카데미 다시 다녀. 숫자도 못 세는 게 어디서 지적질이야!”
“뭔 소리야. 내가 왜 숫자를 못 세?”
“다섯만 넘어가면 버벅거리잖아! 솔직히 말해 봐, 너 열 못 세지?”
“왜 못 세겠냐. 다 너 체력 기르라고 그러는 거야.”
한심해하는 마티어스의 표정에 나는 그의 등짝을 발로 차 버리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그러나 꼼짝할 힘조차 없었던 나는 목에 걸치고 있던 수건을 돌돌 말아 그의 안면을 강타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아, 뭐 하는데!”
마티어스가 성질을 부리며 제 얼굴을 뒤덮은 수건을 거칠게 떼어 냈다.
“정신 좀 들라고 사랑의 수건 전달식 해 준 건데, 왜.”
“넌 스승에 대한 예우를 좀 가질 필요가 있겠다.”
“스승도 스승다워야 스승이지. 엎어 놓고 무식하게 굴리기만 하는 게 스승이냐?”
“나랑 검 한 번 대 보고 싶어서 환장하는 애들이 황궁 안팎으로 널렸어. 넌 감사한 줄 알아.”
“그럼 대련을 시켜 주든가. 죽어라 굴리기만 하면서!”
“야, 지금 너랑 나랑 대련하면…… 너 죽어.”
“…….”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아, 너 그거 차고 있으니 죽진 않겠네. 한번 해 볼래?”
“아, 아니. 안 할래…….”
주눅이 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티어스가 다시 수업을 재개했다. 10분이 지나지 않아 로그아웃하기 전에 어떻게든 얘를 한 대는 패고 가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 * *
마티어스는 정말로 저녁이 되면 하루에 한 번씩 내려와 체력 단련을 시켰다. 정말 지옥 같았지만, 확실히 체력 단련에는 효과가 있었다. 며칠 전까지는 조금만 빠르게 걸어도 숨이 찼는데, 이제는 잠깐씩 느리게 달릴 수도 있었다. 밥맛도 좋아지고 밤에 잠도 잘 오는 점도 그래, 뭐 나쁘진 않았다.
살 만해지자마자 나는 들숨에 플러팅, 날숨에 동정심을 유발했다. 운동을 끝내고 재워 달라고 조르는 게 전자였고, 수업 강도에 치를 떨면서도 네가 있어 외롭지 않다고, 네가 오는 시간만이 내 낙이라며 우수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게 후자였다.
수업이 끝난 뒤, 쭈뼛거리며 내 눈치를 보는 마티어스의 모습에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생일 선물로 뭘 갖고 싶냐는 물음에 촉촉이 젖은 눈으로 가만히 바라본 뒤부터 마티어스는 이 모양으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마티어스.”
“……어?”
“우리 내기하자.”
“갑자기 내기는 무슨 내기.”
내기라는 말에 마티어스의 낯에 긴장감이 어렸다. 내가 내기에 뭘 걸지 아는 녀석의 얼굴이었다. 나는 뭉툭한 나무 단검을 들고 이리저리 휘두르며 자신만만한 태도로 말했다.
“대련해서 내가 널 한 번이라도 건드리면 생일날 밖으로 나가게 해 줘.”
“너 죽는다니까.”
“대신 넌 공격하면 안 돼. 공격은 나만 한다.”
“……넌 자존심도 없냐?”
마티어스가 기가 찬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 봤자 별로 쓸모없더라고.”
“어쨌든, 안 해.”
“자신이 없나 봐?”
“그럴 리가.”
자신만만하게 말하면서도 나는 속으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마티어스가 이 도발에 넘어와야 할 텐데.
내가 나오는 걸 반대하는 건 압실론과 마티어스라고 했다. 셋의 동의를 받으면 나는 나갈 수 있었다. 여기 없는 압실론보다는 마티어스를 도발해 동의를 얻는 편이 훨씬 쉬웠다.
먹히는 건 무엇일까. 미인계? 도발? 협박? 동정심?
생각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쥐고 있던 단검이 마티어스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
아주 느릿하게.
“뭐 해.”
마티어스는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는 아주 간단한 방식으로 내 공격을 회피했다. 마티어스를 향해 온 힘을 쏟아 냈던 나는 중심을 잃고 그대로 푹신한 카펫에서 한 바퀴 데굴, 굴렀다.
“……너 공격했잖아.”
나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하며 입을 삐죽였다. 브레이슬릿을 찬 데다 계속되는 수업에 지쳐 있었던 내 공격 속도는 한없이 느릴 수밖에 없었다. 마티어스가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마른세수를 했다.
“이렇게 집중 과외를 해 줬는데도 고작 이 정도라니.”
“야, 브레이슬릿 떼고 붙어. 그럼 내가 이긴다.”
“퍽이나.”
이게?
나는 잔뜩 성이 나 목검을 치켜세우고 횡으로 그었다.
이래 봬도 초딩 때 검도 학원 한 달 다녔거든. 빛 광 자 베기라고 아냐? 어?
그러나 모든 공격은 너무나도 손쉽게 허사로 돌아갔다. 벌써 숨을 헐떡이는 나와 달리 마티어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있었다. 한여름의 개처럼 헐떡이는 나를 보던 마티어스가 애잔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기하자, 그래.”
“저, 헉, 정말?”
“그래. 대신 제한 시간은 5분.”
“뭐? 치사하게!”
“10분 이상 하면 너 과호흡으로 쓰러질 것 같아.”
“아니거든?”
“지금부터 시작한다.”
비열한 놈. 나는 단검을 단단히 쥐고 마티어스를 향해 달려들었다. 한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더 공격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현명하네.”
내 생각을 읽은 듯 마티어스가 입매를 당겨 웃었다. 나는 거기에 답하지 않고 단검을 비스듬히 세워 그의 허벅지를 찔렀다. 상체를 공격해 봤자 빠르게 피하니 잘 피할 수 없는 다리를 노린 행동이었다.
“……!”
순식간에 시야에서 자취를 감춘 다리에 나는 당황해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티어스는 어느새 테이블에 올라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마구잡이로 마티어스를 향해 검을 휘둘렀지만 그는 정말이지 얌체같이 피해 냈다.
“너, 헉, 나 생각해 보면 어린애 수준 체력인데, 그렇게, 진심으로 하는 거, 맞아?”
“원래 전사란 실력이 현격하게 떨어지는 상대에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지.”
“진, 허억, 진짜 재수 없다.”
“말할 시간이 있으면 때리는 데 집중하도록.”
얄미운 마음에 검을 휘두르는데 마티어스는 정말이지 단 한 대도 맞아 주지 않았다. 시계가 째깍대며 자신의 흐름을 알려 주고 있었다.
“2분 남았다.”
“젠장!”
“흥분하지 마. 동작이 커지잖아.”
마티어스는 완전히 여유 만만해져서는 피하는 와중에 날 가르치기까지 했다. 잔뜩 약이 오른 나와 반대로 평온한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단검을 찌를 듯한 자세로 쥐자 마티어스가 픽 입꼬리를 올렸다.
“암살이라도 하시게? 그 자세로는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인다.”
“시, 끄러워. 허억, 네가 뭘 알아.”
“내가 지금까지 가르친 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사실만은 알겠다.”
나는 약이 오른 표정으로 마티어스를 향해 단검을 사선으로 그었다. 물론 그 자리에 마티어스는 없었다. 발을 헛디디는 것과 동시에 시야에 책상의 모서리가 가득 찼다.
“……!”
중력이 나를 밑으로 이끌었다. 모서리는 완만하게 깎여 있었으나 눈에 닿아도 상처를 입히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둥글게 깎은 책상 모서리가 동공에 닿기 직전이었다. 큼직한 손이 뒤에서 나를 낚아챘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의 셔츠를 쥔 채 뒤를 돌아 그의 이마에 단검을 콕 찔렀다. 녀석의 얼빠진 표정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닿았다.”
내 자신만만한 미소에 마티어스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너 의도했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네가 위험해지면 내가 구할 줄 알고 일부러 모서리에 눈 가져다 댄 거잖아.”
“아닌데? 너 공격하려다가 피치 못하게 그렇게 된 거잖아.”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입술을 깨물고 한동안 나를 노려보던 마티어스가 거칠게 책상을 내리쳤다.
“젠장!”
이로써 나는 아주 오랜만에 생일날, 지상으로 올라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