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면역력 키우려고 일부러 치료 안 한 거야.”
웃기고 있네.
믿을 걸 믿으라고 해라. 내가 전혀 신뢰하지 않는 눈빛으로 바라보자 마티어스는 겸연쩍은 듯 내 시선을 피해 버렸다. 마티어스는 한참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네 생일에 너 나오는 거, 난 반대했어.”
“뭐? 왜?”
“왜냐는 질문이 나와?”
저번에 마티어스가 설득해서 나갔다가 그렇게 되었으니 이번엔 가차 없이 반대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입을 삐죽이다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반성 많이 했다, 뭐…….”
“더 해.”
“일 년에 한 번뿐인 생일인데…….”
“우리가 밑으로 내려와서 축하해 줄게.”
“……불꽃놀이도 보고 싶어.”
“압실론 보고 만들라 할게.”
“…….”
정말 한 마디를 지지 않았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마티어스의 머리통을 갈기고 평생 여기 갇혀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문명인이었던 나는 조금 더 현명한 선택을 해 보기로 했다.
“너는, 여기가 얼마나 외로운지 몰라서 그래.”
나는 일부러 굽혀 세운 무릎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말투로 말했다.
“난 너희들이 아니면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해.”
“그게 무슨 소리야.”
“루드비히가 명령을 내렸으니까. 아무도 나와 대화하지 말라고.”
팔꿈치 사이로 슬쩍 마티어스를 바라보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너희가 오기 전에는 여기 갇혀 아무와도 말 못 하고, 아무것도 못 하는 천치가 되는 게, 네가 진짜로 원하는 거야?”
“아니, 난…….”
“그렇게 거지같이 살다가 생일날 하루 밖에 나가고 싶다는 게 아예 못 들어줄 소원이야?”
“…….”
제발 통해라.
온 세상의 신을 다 끌어다 빌고 있을 때였다. 마티어스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안 돼.”
“……!”
반쯤 넘어온 줄 알았는데. 나는 고전 명작 영화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눈으로 마티어스를 바라보았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순 없었다.
“그럼 나 잘 때까지 재워 줘.”
“뭐?”
“외롭단 말이야.”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이불을 팡팡 쳤다. 마티어스가 께름칙한 걸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8시인데?”
“여기 있으면 그런 거 몰라. 졸릴 때 자고 배고플 때 먹는 거지.”
“시계는 있을 거…… 없군.”
“그렇다니까.”
사실 시계는 있었지만, 며칠 전에 난동 부리면서 부숴 먹은 뒤 아직 새것이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는 듯 서 있던 마티어스가 쭈뼛거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 잘 때까지 가면 안 돼.”
“……그래.”
그걸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는 듯 나는 마티어스의 팔을 끌어 이불 속에 집어넣었다. 마티어스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돼.”
“그냥, 외로워서.”
외로움 타령을 하는 내가 제법 불쌍해 보였는지 마티어스가 뻣뻣하게나마 내게 몸을 붙이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슬쩍 실눈을 떠 보자 벌써 내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깔을 하고 있었다.
어쩐지 예감이 좋았다.
“팔베개해 줘.”
“뭐?”
“팔베개, 몰라?”
예전에 넷을 꼬시겠답시고 열심히 보던 공략 동영상들을 써먹을 때였다. 마티어스가 떨떠름하게 나를 보고 있는 틈을 타 나는 아예 아까 끌어당긴 팔을 베개 위에 올리고 거기 누워 버렸다. 상당히 뻣뻣한 자세에 당장 팔을 치워 버리고 싶었지만 나는 대의를 위해 참고 넘어가는 대인배의 자세를 보여 주기로 했다.
“좋다.”
나는 정말 애정에 목말랐던 것처럼 그의 품에 파고들어 크게 숨을 들이쉬기까지 했다. 마티어스는 거의 30초째 숨을 쉬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마티어스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
“왜 숨을 안 쉬어.”
“……쉬고 있어.”
참았다가 뱉는 숨에 머리카락이 뒤로 날리는 게 느껴졌다. 우리는 어둠 속에 잠시간 침묵하며 누워 있었다. 사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어제의 진동과 루드비히가 오지 않은 건 관련이 있는지, 가슴팍의 자상은 어떻게 된 건지, 압실론이 이곳에 있긴 한 건지.
하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내 직감은 제법 잘 맞는 편이었다. 어차피 생일날 이 거지 같은 지하를 탈출하게 되면 알 수 있는 일들이었다.
“아프진 않아?”
나는 괜스레 마티어스의 상처 난 가슴 위쪽을 살살 쓸며 말했다. 마티어스가 어둠 속에서도 셔츠를 더 꽉 여몄다. 굳이 불을 켜고 보지 않아도 그의 귀 끝이 붉어져 있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전혀.”
하여간 허세는. 예전의 나라면 상처 난 부분을 괜히 한 번 쿡 찔러 봤다가 분란을 일으켰겠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호…….
어둠 속에서 작게 따스한 입김을 부는 소리가 났다. 물론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뭐, 뭐 하냐?”
마티어스가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몸을 빼려고 했다. 슬쩍 닿은 그의 팔뚝에 소름이 일어 있었다. 나는 마티어스가 팔을 빼지 못하게 머리에 체중을 실었다.
“그냥 호 불어 준 거야.”
이 새끼야.
“너 아플까 봐.”
고맙지?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어, 어어. 그래. 고맙다……?”
무언가 껄끄러운 듯한 감사 인사였다. 하지만 나를 의식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나. 루드비히 같은 경우는 이러다 날 덮칠 수 있어 감히 시도하지 못할 미인계였지만, 덩치는 산만 해 가지고 의외의 유교 사상을 가진 마티어스에게는 해 볼 만한 시도였다.
우리는 그 후로도 사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대부분 과거의 추억에 대한 이야기였다. 확실히 과거 이야기는 우리 둘의 분위기를 말랑말랑하게 만드는 데 효과가 있었다.
“그날 기억나? 압실론이 어디서 고구마 캐 온 날.”
“……아니, 안 나는데.”
“거짓말. 그날 너 입가에 검댕 다 묻히고 그냥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투구 쓰고 전쟁터 나가는 바람에 너 그 검댕 묻은 채로 싸웠잖아. 그래서 애들 사이에서 너 별명이 한동안, 읍…….”
“기억나니까 그만 말해.”
큼직한 손바닥이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는 희미한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보며 푸들푸들 웃었다.
“뭘 웃냐.”
멋쩍어하면서도 저도 웃기는지 마티어스가 내 이마를 검지로 툭 치며 입매를 위로 당겼다.
“그냥, 우리 그때 참 재밌었구나 싶어서.”
“맞아. 처음엔 너 좀 이상한 놈이구나 싶었었는데.”
“나? 왜?”
“갑자기 뭐 하다가도 허공 바라보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랬잖아.”
“내가?”
“그래, 뭐 ‘후원 감사합니다.’ 같은 소리 하고, 갑자기 목욕하다가 이상한 춤 추기도 하고. 그래서 머리가 좀 어떻게 된 놈인 줄 알았지.”
방송 초기의 일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시청자가 많지 않았던 초기에는 달풍선을 쏴 주는 시청자 하나하나에게 인사를 했었다. 룰렛도 운영해서 갑자기 춤추기 같은 게 걸리면 심각한 상황이 아닌 이상 바로 춤을 추기도 했다. 시청자 수가 안정되고 나서는 룰렛도 지우고 매번 인사하지도 않았지만, 가끔 많이 터질 때에는 종종 말하긴 했었다.
“요즘은 안 하던데. 그땐 왜 그랬던 건데?”
“글쎄, 내가 그랬었나? 기억이 잘 안 나는데…….”
“그렇게 자주 했는데 기억이 안 난다고?”
“응, 기억 안 나.”
“어떻게 그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으응, 조용히 해. 나 졸려…….”
나는 졸린 척하며 그의 품에 몸을 기대었다. 마티어스는 의아한 기색이긴 했지만, 다행히 더 묻지 않고 넘어갔다.
얘도 기억하고 있을 정도면 다른 애들도 다 알고 있겠네.
끝까지 잡아떼야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눈을 감았다. 설핏 잠이 들려고 하는데 무언가 몸을 더듬는 듯한 손길이 느껴졌다. 화들짝 놀라 깨 보니 마티어스가 내 팔을 심각한 표정으로 주무르고 있었다.
뭐야, 너 순진한 애 아니었어?
갑자기 루드비히와 있었던 일들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아무리 미인계를 쓰고 싶어도 같이 침대에 눕는 건 피했어야 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들었다.
“야.”
심지어 이 자식은 날 몰래 주무르고 있으면서 날 부르기까지 했다. 계속 자는 척을 해야 하나 어쩌나 싶었는데 마티어스가 나를 흔들었다.
“일어나 봐.”
“…….”
“일어나 보라니까?”
“……왜에.”
차마 더 이상 자는 척을 하지 못한 나는 눈을 비비며 필사적으로 자다 일어난 척 연기했다. 도대체 이 자식이 무슨 짓을 할까 싶어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정조를 위협당할까 봐 잔뜩 긴장해 있는 내게 마티어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팔에 근육이 하나도 없어.”
“……어?”
“만져 봐. 예전엔 그래도 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젠 그냥 말랑말랑하기만 해.”
나는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며 내 팔을 만져 보았다. 마티어스의 말마따나 말랑말랑하긴 했다.
“그냥 평범한 정도인 것 같은데.”
“이게 평범한 거라고?”
“그, 그렇지 않나?”
마티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앉더니 협탁 위의 등을 켰다. 심각한 표정에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미간을 좁히며 내게 물어 왔다.
“너 요즘 계속 먹고 자기만 했지.”
“그렇게 많이 먹진 않았는데…….”
심지어 요 며칠은 물도 안 마시고 굶었다고. 어제오늘만 좀 먹었지.
“안 되겠다. 너 내일부터 나랑 운동하자.”
“에엥? 갑자기 웬 운동?”
애초에 난 마법사라고. 비록 이 거지 같은 브레이슬릿 때문에 마법을 못 쓸 뿐.
“예기치 못한 상황에 너 한 몸 지킬 정도는 되어야지. 지금 같아선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게 생겼어.”
그, 그렇게 심각한가? 나는 내 팔을 들어 요리조리 살펴보았다. 압실론의 마른 근육에 댈 건 아니어도 평범한 마법사 신체인 것 같은데.
“위에 무슨 일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