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폭군.”
“재밌네. 더 해 봐.”
“……백성들이 불쌍해.”
“네가 그렇게 만들었지.”
“책임 전가하지 마. 좋아하는 사람 붙잡아 놓겠다고 온 세상을 전쟁터로 만들어 놓는 황제가 어딨어?”
“여기 있네.”
“장군에, 황궁 마법사에, 타국 황제까지 답이 없지. 이 세계는 망했어.”
“그만 툴툴거리고 이거나 먹지.”
루드비히가 오트밀죽을 듬뿍 퍼 내밀었다. 나는 오만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말고 다른 거 만들어 오라고 해. 애기 토 같아서 못 먹겠으니까.”
내 말에 루드비히가 설렁줄을 당겨 사용인을 불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용인이 다른 음식을 가져오라는 루드비히의 명령에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어색한 침묵이 우리 둘 사이를 맴돌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루드비히였다.
“압실론이 생일 선물로 뭘 갖고 싶냐고 묻더군.”
“웬 생일 선물?”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몰랐나? 일주일 뒤가 네 생일이다.”
나는 멍하니 손가락으로 날짜를 세 보았다. 정말이었다. 여기 온 뒤로 날짜를 헤아리지 않아 잊고 있었다.
“정말이네…….”
“그래서, 갖고 싶은 선물이라도 있나?”
“내보내 줘.”
“그렇게 말할 거라고 했지.”
독심술사라도 된 것처럼 구는 루드비히의 행동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필요 없어.”
“전해 주지.”
싸늘한 태도가 마음에 안 들어 한마디 하려던 찰나 사용인이 묽게 끓인 야채수프를 들고 다가왔다. 감자와 양파를 곱게 갈아 푹 익힌 수프의 향이 훌륭했다. 루드비히가 자연스레 수프를 받아 들고 사용인을 물렸다. 또 먹여 줄 생각인 듯했다.
“내, 내가 먹을 수 있어.”
“알아.”
‘그래서 뭐?’라는 말투에 나는 대번에 입을 삐죽였다. 이제는 음식도 내 마음대로 못 먹는구나. 적당히 식힌 수프가 입가로 다가왔다. 나는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다 받아먹었다.
푹 끓인 수프는 입 안에서 사르르 녹아 씹을 것도 없었지만 나는 딱딱한 음식이라도 되는 양 아주 오래도록 씹었다. 다음 숟가락을 들고 나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그대로 굳었다. 손등 위로 맑은 눈물이 툭 떨어졌다. 나는 잔뜩 메인 목으로 겨우 음식을 넘기고 뭉개지는 발음으로 말했다.
“왜 너는 전부 네 마음대로 하려고 해……?”
“……뭐?”
나는 루드비히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눈물이 잔뜩 괴어 있어 루드비히의 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이제 밥도 혼자 못 먹어?”
“네가 밥을 안 먹으니 그런 거 아닌가.”
“내가 먹겠다고 했잖아! 이젠 먹겠다고 했잖아.”
나는 루드비히가 쥐고 있던 그릇을 빼앗아 들어 수프를 씹지도 않고 물처럼 삼켰다. 워낙 묽게 끓인 수프였기에 얹히지는 않았다. 나무 그릇을 내팽개친 나는 루드비히의 허벅지에 이마를 대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렸다.
“여긴 너무 외로워. 무서워. 여기 있다간 미쳐 버릴 것 같아. 나 다신 탈출할 생각 안 할게. 응? 나 좀 내보내 줘.”
“…….”
“딱 하루, 내 생일만이라도 좋아. 이대로 있다간 정말 질식해서 죽을 것 같아. 응? 제발…….”
간절한 부탁에도 루드비히는 말이 없었다. 나는 그의 품에 안겨 더욱 서럽게 울었다. 목 주위를 서성이던 루드비히의 손이 내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말해 보도록, 하지.”
루드비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물에 콧물을 달고 있는 내 모습은 추해 보일지언정 진실성은 있어 보였다. 루드비히가 묘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며 손끝으로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저, 정말이야?”
“그래.”
“고마워.”
나는 루드비히를 와락 끌어안았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것처럼 그의 몸이 뒤로 무너져 내렸다. 졸지에 덮쳐진 듯한 자세로 나와 한 침대에 누운 루드비히가 내 밑에서 눈을 깜빡였다. 나는 눈물을 대롱대롱 매단 채 해맑게 웃었다.
“고마워, 진짜. 너밖에 없다.”
내 말에 루드비히가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 확답은 해 줄 수 없다.”
내가 대번에 시무룩해지자 루드비히는 드물게도 당황한 티를 감추지 못했다.
“최선을 다해 볼 테니 기다리고 있어.”
“……응.”
나는 몸을 일으키는 루드비히의 옷깃을 슬쩍 말아 쥐었다. 루드비히가 의아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내일도 와.”
그렇게 말하는 내가 퍽 외로워 보였는지 그는 아랫입술을 슬쩍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 * *
루드비히가 간 뒤에 나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대충 훑어 내었다. 사실 눈물 즙을 짜내다 좀 부족해서 침도 섞었다. 루드비히가 내 눈물에 약해서 다행이었다.
“피곤하다.”
지하로 내려온 뒤에 침대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사람을 상대하는 날이면 금방 지치고 말았다. 뺨을 쓸어 보던 나는 괜스레 얼굴에서 침 냄새가 나는 것 같아 사용인을 불러 세숫물을 가지고 오라 말했다. 하여간 이놈의 리얼리티.
세수를 마친 나는 대충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내고 침대 옆 협탁에 산더미처럼 쌓아 둔 책을 펼쳤다. 이 세계의 여행지에 대해 기술해 놓은 책이었는데, 혹시나 사람이 갈 수 없어 전쟁 지역이 아닌 곳이 있을까 싶어 뒤적이고 있던 중이었다. 하지만 전쟁 지역이 아닌 곳은 대부분 위험 지대인지라 그 장소 역시 로그아웃이 불가능했다. 이 빌어먹을 세상아. 나는 <소년들> 개발자에게 한바탕 욕을 쏟아붓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참을성 있게 책장을 넘겼다.
[‘슈나이더’ 지역에는 지옥을 연상시키는 온천이 있다. 온천이라고는 하지만 100도에 가까운 온도라, 사람은 몸을 담그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다. 휴화산 근처에 있는 이 온천은…….]
관심도 없는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으려니 꾸벅꾸벅 잠이 몰려왔다. 흐린 눈을 하고 대충대충 넘기고 있는데 갑자기 방 전체가 우르르 흔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방금의 진동을 알려 주듯 옅게 흔들리는 물잔이 보였다. 나는 방 앞에 서 있는 사용인과 눈을 마주했다.
“바, 방금 흔들리지 않았어요?”
반말을 해도 상관없지만, 사용인의 나이가 너무 지긋해 보이다 보니 유교 보이인 나로서는 자연스레 존대가 나왔다. 사용인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래, 여기가 무너져서 죽든 말든 위에서 내린 명령이 더 중요하다 이거지.
그렇다고 그게 사용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용량 문제로 인해 중요 인물들 몇몇-상대 국가의 황제나 장군, 대신들과 기타 이벤트 인물들도 중요 인물들에 해당됐다-을 제외하고는 사고 회로가 단순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사람이 10까지 사고할 수 있다고 가정할 때, 공들은 8에서 11까지 사고할 수 있었고, 중요 인물들은 5에서 9정도, 이런 애들은 2나 3 정도까지만 사고할 수 있었다. 말을 알아듣고 상사의 명령을 수행하는 데 있어 로봇 강아지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생각하면 됐다. 아마 이런 이들은 갑작스러운 지진으로 여기가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말을 걸지 않을 터였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더 이상 지진도 없었고 여진도 일어나지 않아 나는 책을 두어 권 더 읽다가 까무룩 잠들었다.
* * *
다음 날, 오겠다고 하던 루드비히는 오지 않고 마티어스가 찾아왔다. 별로 원하지 않던 방문인지 오만상을 찡그린 채였다.
“루드비히는?”
“바쁘대.”
“그럴 리가 없는데.”
나는 수상하다는 듯 마티어스를 바라보았다.
나와 관련된 일이라면 만사 제치고 오는 게 루드비히인데.
“뭘 봐.”
“아, 아무것도 아니야.”
짧은 대화가 끝나고 우리 사이에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마티어스가 지하에 내려온 적은 처음이었다. 그때 그렇게 갇히기 싫다고 눈물 콧물 짰던 이후 첫 만남인 셈이었다. 마티어스 역시 그 어색함을 느꼈는지 헛기침을 하며 늘어놓은 책들을 정리했다.
“정리 좀 하고 살아.”
시어머니도 아니고, 오자마자 잔소리였다. 한마디 하려고 고개를 돌리던 나는 눈매를 좁혔다. 그의 셔츠 안쪽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슬그머니 마티어스를 향해 다가갔다. 마티어스가 중얼거리며 앞담화를 하다 내가 가까이 다가온 걸 알고 당황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뭐야, 왜 그…….”
나는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셔츠를 끌어 내렸다. 약하게 붙어 있었는지 셔츠 단추 하나가 떨어져 또르르 카펫 위를 굴렀다.
“미쳤냐?”
귀 끝을 시뻘겋게 물들인 마티어스가 뒤늦게 셔츠를 여몄지만, 나는 전부 목격하고 말았다. 쇄골 바로 아래 자리 잡은 깊은 자상을.
압실론이 있었을 텐데 왜 전부 치료해 주지 않은 거지? 가슴팍의 자상은 응급 처치를 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투둑 하고 터져 금방이라도 새빨간 속살을 보일 것만 같았다.
나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밖에 무슨 일이 있구나. 그쯤 되자 어색한 공기 같은 건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레 마티어스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마티어스.”
“왜.”
“너 혹시…… 반란했니?”
내 말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티어스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내가 반란을 왜 해.”
“아니, 루드비히 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고…….”
“조금 마음에 안 든다고 그런 귀찮은 거 안 해.”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를 귀찮은 거 취급하는 마티어스의 태도에 나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명예욕이라곤 없는 녀석 같으니.
“그럼 그 상처는 뭔데. 압실론을 적으로 돌리지 않고서야 그런 상처를 남겨 둘 리가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