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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네요. 케이크 하나 안 먹을래요?”
“응, 그건 안 먹어.”
어림없는 소리. 체자레는 눈꼬리를 늘어트리면서도 내게 더 먹으라 강요하지 않았다.
“그럼 이건 제가 먹을게요.”
“안 먹는다니…… 뭐?”
“맛있어 보여서요. 이현 깨어나는 거 기다리느라 저 점심도 저녁도 아직이거든요.”
체자레는 내 허락도 없이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체자레가 먹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맛있네요. 루드비히가 요즘 황궁 주방을 그렇게 쥐 잡듯이 잡는다더니, 이렇게 이현의 취향에 딱 맞춘 식사를 내놓는군요.”
“아무리 유혹해 봐라. 내가 먹나.”
볼멘소리에 체자레가 빙긋 웃었다. 나는 침대에서 턱을 괴고 누워 체자레의 식사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 봐도 참 예쁘게 먹는단 말이지.’
체자레는 미식가였다. 처음 보는 버섯은 입에 넣어 보고 본다는 놈이 미식가라고 하니 좀 이상하긴 한데, 아무튼 그랬다. 다만 미식의 기준이 독특했다. 일단 제일 좋아하는 건 처음 먹어 보는 음식이었고, 그다음은 조화가 독특한 음식이었다. 그런데 그 조화가 독특하다는 게 체자레의 기준이다 보니 메뉴들이 좀 특이했다.
“수르스트뢰밍 먹어 본 적 있어?”
나는 베개에 뺨을 기댄 채 체자레를 바라보다 불쑥 물었다. 체자레는 음식이 입 안에 있을 때에는 대답을 하지 않는 훌륭한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기에 대답이 조금 늦게 나왔다.
“있죠.”
“맛이 어땠어?”
“뭐, 나쁘진 않았어요.”
“그럼 나랑 그때 키스는 왜 안 했어.”
내가 놀리는 걸 알았는지 체자레가 마주 미소 지으며 말했다.
“두 번은 먹지 않기로 결심했거든요.”
“그래, 넌 원래 그런 놈이었지.”
체자레는 남녀 가리지 않고 즐기면서도 한번 잔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자지 않았다. 사랑한다고 외치며 매달리는 사람들을 웃으며 거절하는 모습을 보고 참 냉정하다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면 그 대상이 나라면 어떨까.
“……너랑 한번 자면, 나 놔줄래?”
불쑥 튀어나온 진심에 우리는 둘 다 놀랐다. 나는 체자레의 뒤에 사용인이 없는지를 우선 살폈다. 다행히 사람을 물렸는지 방 안엔 우리 둘뿐이었다.
“아뇨, 내가 원하는 건 이현과의 성애적인 관계가 아니라서요.”
“그럼 네가 원하는 건 뭔데?”
“굳이 말하자면…… 당신의 존재 자체?”
“그게 그거 아니야?”
“달라요. 아, 그래도 자고 싶긴 해요.”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분명히 뿜어 버렸을 듯한 대답이었다.
“뭐, 뭐?”
“우리가 이현을 건드리지 않는 건 그런 욕망이 없어서가 아니라고요. 적어도 난, 이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동이 일거든요.”
넌 그런 말을 그렇게 산뜻한 낯짝으로 하니…….
나는 질린 듯한 시선으로 체자레를 흘겨보았다.
“그저 이 세계에 뭐가 제일 중요한지 알고 있을 뿐이죠.”
체자레가 내 콧잔등을 톡 치며 말했다. 나는 코를 문지르며 체자레의 시선을 피했다. 체자레와 함께 있는 게 어쩐지 조금 불편해졌다.
“아아, 이럴까 봐 말하지 않으려고 한 건데.”
체자레가 괜한 짓을 했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걱정 말아요. 이현이 원하지 않는 이상 건드릴 생각 없으니까.”
“그 말, 꼭 지켜 주길 바란다.”
“잘 때 입 맞추는 정도는 괜찮아요?”
“괜찮겠냐?”
나는 베개를 끌어안은 채 불안하게 체자레를 올려다보았다. 체자레가 그런 나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 자식, 아까 나 자고 있을 때 무슨 짓 했을지도 몰라.
한번 자 주면 내보내 주겠냐고 패기롭게 물었던 것치고는 사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체자레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띤 채 내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뭐, 뭐 해. 왜 가까이 오는데.”
“오늘따라 이현, 예쁘네요.”
“자, 장난치지 마. 저리 안 가?”
“좀 말라서 그런가. 얼굴 윤곽이 더 선명해졌어요.”
체자레가 내 광대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금방이라도 입을 맞춰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거리였다. 나는 당황해 눈을 질끈 감고 그를 밀어 냈다.
“저, 저리 가라니까!”
그러나 손이 닿아야 할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당황스러워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체자레는 이미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있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네요.”
“어?”
“이만 가 봐야겠어요.”
고슴도치처럼 날을 세우고 잔뜩 경계하던 나는 떠난다는 그의 말에 조금 허탈해졌다.
정말 내 밥 빼앗아 먹고 대화나 하다가 돌아간다고?
나는 의아해져서 그를 경계했던 것도 잊고 물었다.
“너 루드비히가 시켜서 온 거 아니었어?”
하도 밥을 안 먹으니 루드비히가 시켜서 온 거라고 생각했다. 본인이 오면 내가 싫어할 게 뻔히 보이고, 마티어스가 오면 아옹다옹하다가 다툴 확률이 너무 높고, 압실론에게는 맡기기가 불안했겠지. 다들 사람 죽이는 건 잘해도, 외교에는 별로 재능들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적임자로 체자레가 나를 설득하러 온 건 줄 알았다.
“저도 이젠 나름 제국의 황제인데요. 남이 시킨다고 해서 오진 않아요.”
체자레가 제법 새침한 태도로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나는 볼을 긁적이며 물었다.
“그럼 왜 온 건데?”
“그야 당연히 이현이 보고 싶으니까 왔죠.”
바로 플러팅을 던지는 게 어째 영 믿음직스럽진 않았지만, 어쩌겠나. 본인이 오리발을 내미는데.
“그리고, 여기서 안 먹는다고 진짜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문을 나서기 전, 체자레가 빙긋 웃으며 던진 폭탄에 나는 한동안 침대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었다.
정말이지 수상한 녀석.
그래, 죽는 건 아니지. 머리에 박혀 있는 칩이 게임 속에서 음식을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기계와 연동해 포도당을 합성해 생존할 수 있게 해 주니까. 몸 밖의 상태가 어떨지는 몰라도 어쨌든 기계엔 그런 기능이 있었다.
음식을 치우러 왔는지 사용인 하나가 문을 열고 다가왔다.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한 지 오래라 나는 사용인이 다가오든 말든 자세를 느슨하게 하고 소파에 누워 있었다. 식기를 달그락거리던 사용인이 나가지 않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그들은 지금까지 내게 말을 건 적이 없으니까.
말하는 걸 잊어버린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던 사용인이 가까이 다가와 내 귓가에 속삭였다.
“디저트를 아직 안 드셨군요. 조금 뒤에 오겠습니다.”
집중하지 않으면 알아듣지 못할 만큼 아주 미약한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사용인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이미 볼일을 마쳤다는 듯 뒤돌아 나가 버렸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디저트를 먹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말이 없던 사용인이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림을 듬뿍 바른 초코롤케이크를 크게 베어 물고 우물거리자 입 안에 무언가 걸렸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것을 뱉어 냈다.
희미한 청포도 향이 나는 연두색 사탕. 나는 그것을 불빛에 대고 비추어 보았다. 사탕을 두른 테두리에 희미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간단한 키워드만 적혀 있었지만, 나는 금방 그 뜻을 해석할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는 날, 계획은 실행된다.’
그 이름이 무사히 이안에게 전달된 것이다.
나는 고양감을 삼키기 위해 눈을 감고 한동안 심호흡을 했다. 사탕을 다시 입 안에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둥글고 달콤한 것을 입 안에 굴리고 있자니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 * *
“굶는다고 죽지 않는다는 걸 알 텐데.”
결국 사흘간의 단식 투쟁 끝에 루드비히가 먼저 찾아왔다. 나는 침대에 누워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말했다.
“안 죽는 거 알면서 왜 찾아왔는데.”
“…….”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루드비히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먹지 않는다고 죽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르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흘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나는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체력도 전에 없이 허약해져 시스템 창이 연신 경고를 띄웠지만 전부 무시했다.
“고개 들어. 나 봐.”
연신 명령조였다. 나는 인상을 팍 쓰고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명령하지 마. 여기 가둬 놨다고 다 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야.”
이안이 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선 입 안의 혀처럼 굴어도 모자랐으나, 루드비히에겐 그게 영 잘되지 않았다. 말하면서도 이렇게 모난 사람이었나 싶어 조금 우울해졌다. 나는 샐쭉해져 루드비히 쪽으로 슬쩍 시선을 옮겼다. 그가 오트밀죽을 들고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으엑. 하필이면 오트밀죽이야.
나를 괴롭히려고 작정한 게 분명했다. 그는 침대 앞에 걸터앉아 죽을 뜬 뒤 내게 내밀었다.
“입 벌려.”
“시, 읍……!”
싫다고 말할 새도 없이 죽이 입에 처넣어졌다. 흘린 게 반이었으나 짭짜름한 오트밀죽의 맛이 혀끝에 와 닿았다. 짜증이 나 뱉어 내려는데 루드비히가 선수를 쳤다.
“지금 안 먹으면 다음은 입으로 먹여 주지.”
“…….”
나는 얌전히 오트밀죽을 씹었다. 삼키자마자 다시 다음 수저가 들어왔다. 인상을 쓰며 거부하려던 나는 루드비히가 제 입으로 가져가려는 제스처를 취하는 순간 헐레벌떡 수저를 내 쪽으로 가져왔다. 나는 입가에 흐른 오트밀을 손등으로 닦아 내며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목말라.”
그 말에 루드비히는 충성스러운 하인처럼 손수 물을 따라 주었다. 먹여 줄 기세기에 나는 물컵을 빼앗듯이 가져와 단숨에 들이켰다. 한 컵을 비우고도 반 컵을 더 마시고 나서야 타는 듯했던 갈증이 사그라들었다.
“독재자.”
부루퉁하게 뱉은 말에 루드비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