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웃긴 건 산책하면서 내 기분이 실제로 좀 나아졌다는 거였다. 나는 거대한 유리온실을 세 바퀴를 돌고 나서야 온실 가운데에 위치한 티 테이블로 향했다. 루드비히는 그곳에서 먼저 차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이쪽으로 안 왔으면 어쩌려고. 뻔뻔스레 자리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는 루드비히에게 기가 차 하면서도 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를 홀짝이며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니 루드비히가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할 말이라도?”
“할 말은 많은데, 다 하면 지하 궁전 아니고 지하 감옥에 갈 것 같네.”
“그럼 할 수 있는 말만 하는 게 좋겠군.”
재수 없는 새끼…….
나는 말없이 눈빛으로 욕을 하며 루드비히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유유히 빈 찻잔에 찻물을 따를 뿐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나가게 해 달라는 건 빼고 말해 보지.”
“……그럼 할 말이 없는데.”
“그럼 말하지 말도록.”
나는 우아한 태도로 차를 마시는 루드비히의 찻잔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겨우 내리눌렀다.
표정 관리 하자. 표정 관리.
“나 진짜 많이 반성했어.”
“뭘 잘못한 건지는 아나?”
“그럼. 너희를 믿지 못하고 가고일을 피해 도망간 죄?”
내 뻔뻔스러운 대답에 기가 찬다는 듯 루드비히가 나를 보다 하, 짧게 조소했다.
“정말이야. 나 그때 브레이슬릿 차고 있어서 체력이 없었잖아. 진짜 생명의 위협을 느꼈었다고.”
“여긴 안전하니 다행이군.”
“글쎄, 내가 여기서 과연 오래 살까.”
내 말에 루드비히가 처음으로 조금 동요했다.
“난 몸도 딱히 건강하진 않지만…….”
“…….”
“정신은 더 약골이야.”
그 후 나는 투병 중인 사람처럼 거세게 기침을 했다. 물론 헛기침이었다.
센 척이 안 된다면, 약한 척이라도 해야지.
금방 죽을 것처럼 골골거려서라도 여기를 빠져나가야 했다. 나는 가볍게 쥔 주먹을 입가에 붙이며 창백한 낯으로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과연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 꼴을 너는 과연 견딜 수 있을까?
나는 가린 입 사이로 약간의 비웃음을 담은 채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루드비히가 입을 열었다.
“압실론은 꾸준히 널 인형으로 만드는 걸 고민해 왔지.”
여기서 걔 이야기가 왜 나와?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루드비히가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 압실론을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며칠 전 네가 사라지고 나니 완전히 이해하게 되더군.”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루드비히가 내 셔츠 자락을 쥐고 끌어당겼다.
“……!”
나는 속절없이 그에게 끌어당겨졌다. 머리카락 위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나는 잔뜩 긴장해 루드비히를 올려다보았다. 루드비히가 건조한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낯짝에 왈칵 두려움이 몰려들었다.
“죽으려면 죽어. 네 시체라도 끌어안고 우는 편이 내게는 더 나으니.”
“……나쁜 새끼.”
나는 그를 밀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기고 뭐고 잊어버릴 만큼 머리에 열이 올랐다. 씩씩거리는 나에 비해 루드비히의 태도는 평온해 너무 재수 없었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 놓고 왜 넌 그렇게 평온한 건데.
나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루드비히를 잡아끌었다. 내가 밀칠 줄은 알았어도 당길 줄은 몰랐는지 루드비히는 속수무책으로 내 쪽으로 끌려왔다. 코끝이 맞부딪히며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루드비히가 짧게 숨을 들이켜며 제 입술을 달싹였다.
“뭐 하는 거지?”
“눈치 없긴. 눈이나 감아.”
이어진 말에 그의 자색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오랜 고민 끝에 루드비히의 긴 속눈썹이 온순하게 아래로 내리깔렸다. 그 순종적인 태도에 헛웃음이 났다. 나는 그제야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어진 그의 어깨를 툭 밀쳤다.
“다음엔 시체에나 해 볼 테니 불쌍해서 키스라도 한번 해 줄까 했는데, 역겨워서 못 하겠네.”
비웃듯 말하는 내 말투에 루드비히의 눈동자에 묘한 감정이 들어찼다. 일일이 흥분하고, 날뛰고, 동요하는 게 나 하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리고 동요하게 만드는 게 나라는 사실이 저열한 희열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그의 동공에 담긴 민망함을 읽으려 루드비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의 눈에 비친 건 순식간에 테이블 위에 눕혀져 있는 내 모습이었다. 부지불식간에 입술이 덮쳐졌다. 나는 얼어붙은 채 내 입 안을 휘젓는 살덩이를 받아들여야 했다. 숨이 한계까지 차오르자, 나는 있는 힘껏 루드비히를 밀쳤다.
루드비히는 침으로 번들번들해진 입가를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말했다.
“이 미친 새끼가, 뭐 하는 짓이야!”
“다음에는 시체에나 해 볼 테니 미리 한번 해 봤는데.”
내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루드비히의 뻔뻔스러운 태도에 기가 막혔다. 나는 거칠게 입술을 닦아 내며 그의 허벅지를 발로 찼다. 루드비히가 순순히 맞아 주지 않아 헛발질이 되고 말았지만.
“꺼져.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루드비히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넌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뭘.”
“네가 죽지 못한다는 거.”
그의 말대로였다. 이 브레이슬릿을 끼고 있는 이상 나는 죽음을 택할 수도 없었다. 나는 찻잔을 들어 루드비히 쪽으로 내던졌다. 루드비히는 그것을 아주 살짝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피해 냈다. 목제 찻잔은 나무 어딘가에 부딪혔다가 이내 풀숲으로 데구루루 굴러갔다. 나는 씩씩거리며 루드비히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나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화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무로 된 다기들도, 모서리가 둥글게 깎인 테이블도 벌써 지긋지긋했다. 나는 불시에 테이블 위에 놓인 다기들을 떠밀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다기들은 날카로운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조용히 추락했다. 나는 쪼그리고 앉아 내 품 안에 머리를 묻었다. 고통스러웠다. 이 시간이, 이 장소가, 나의 삶이.
* * *
다음 날, 나는 퉁퉁 부은 눈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나와 처음으로 마주친 사용인은 놀란 눈으로 내 눈가를 응시하다 시선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얼음으로 감싼 수건이 눈꺼풀 위를 덮었다. 시원한 감각이 뜨끈한 눈두덩을 식혀 주었다. 얼음이 미지근한 물이 될 때까지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얼음주머니를 치우고 옆을 돌아보자 사용인들이 식사를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 없어. 치워.”
사용인들은 당황하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보기 싫다는 듯 이불을 덮어썼다. 이윽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음식을 치우는 모양이었다.
나는 점심도, 저녁도 물렸다. 식욕이 전혀 돌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상도 물리자 점심엔 손님이 찾아왔다.
“생각 없…….”
“디저트만이라도 드는 건 어때요? 이현이 좋아할 것 같은데.”
누군가를 꾀는 듯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눈을 뜨지 않고도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가.”
“냉정하네요.”
싸늘한 축객령에도 불청객은 한동안 내 방을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이불속에 콕 박혀 있다 결국 깜빡 잠이 들었다.
나는 자꾸만 옛날 꿈을 꾸었다. 중고등학생 때의 꿈도 있었고, 스무 살에 했던 <소년들> 꿈도 많이 꾸었다. 꿈이 행복할수록 일어난 뒤의 기분은 더 더러웠다.
여러 기억을 뭉쳐 놓은 듯한 꿈을 꿨던 나는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새파란 사파이어를 닮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나는 깜짝 놀라 학교에서 졸다 일어난 것처럼 반사적으로 무릎을 올렸다. 불시에 내 무릎에 허벅지를 얻어맞은 체자레가 우는 소릴 했다.
“아파요, 이현.”
“자업자득이야.”
나는 쉰 목소리로 말하며 체자레의 어깨를 꾹꾹 밀어 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나기 전 체자레와 나의 가까웠던 거리를 떠올리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너 나한테 무슨 짓 한 건 아니지?”
“그럴 리가요.”
나쁜 의도는 하나도 없었다는 듯 체자레가 양손을 들고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전 정말 순진한 사람이랍니다.”
“그러기엔 네 전적이 워낙 화려했어야지.”
나는 픽 코웃음을 쳤다. 체자레가 곤란한 듯 쓴웃음을 지으며 목덜미를 긁적였다.
체자레는 기본적으로 쾌락주의자였다. 세상의 모든 걸 다 경험하는 게 아마도 체자레의 목표일 것이다. 체자레는 딱히 남자도 여자도 가리지 않았다. 체자레의 텐트에 놀러 가면 수위로 인해 모자이크만 보이는 경우도 흔했다. 게다가 그는 술도 하고 약도 했다. 독에도 내성이 있어 처음 보는 버섯도 조금씩 떼어 먹은 뒤 상태를 기록했다.
텐트로 숨어든 암살자를 고문 끝에 죽인 날, 자신의 돈주머니를 구걸하러 온 소녀의 손에 쥐여 주기도 했다. 왜 그랬냐 묻자 묘한 미소와 함께 돈 줘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봐도 15세 이용가 캐릭터라기엔 좀 복잡하고 과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래도 특유의 여유로운 태도와 은은하게 돌아 있는 성격에 체자레를 좋아하는 시청자들도 많았다.
“진짜 사랑하는 건 아껴 준다고요.”
체자레가 내 콧잔등을 검지로 톡 건드리며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체자레는 지금까지 내게 격렬한 사랑 고백을 하거나 욕망을 내보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현한테 고백한 이후로는 따로 누구랑 잔 적도 없고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냥, 내가 그러고 싶었어요.”
“그런다고 내가 너랑 자진 않아.”
“이런 말을 제 침대에 있을 이현에게 돌려주는 재미가 언젠가 있을지도 모르죠.”
“헛소리.”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여기 들어온 뒤 처음으로 진짜 웃겨서 웃는 웃음이었다. 어이없음에서 비롯된 웃음이긴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