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47화 (47/149)

#47

퇴근 후 이안은 보통 수도의 저택이나 황궁에 머물렀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안은 정복을 갈아입은 채 퇴궁하여 망설임 없이 뒷골목으로 향했다.

허름한 술집 문을 열자 낡고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질러 댔다. 덩치가 크고 거친 남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술을 마시다가 이안이 안으로 들어서자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아무리 평민 복장을 갖추었다 한들 이안은 눈에 띄는 존재였다. 까마귀 깃털처럼 짙은 검은 머리카락에 섬세한 외모, 걸음걸이 하나에도 느껴지는 예법과 기품은 평민들이 함부로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셨군요.”

하얀 천으로 유리잔을 닦던 남자가 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이안에게 말했다. 남자는 제국에서가장 흔하게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호감형이긴 했으나 인상이 몹시 희미했다. 코앞에서 대화를 나누고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얼굴이 어떻게 생겼었는지 떠올리기 힘든 외모였다.

“마티니 한 잔.”

이안은 바에 팔꿈치를 댄 채 익숙하게 음료를 주문했다. 주문 받았습니다, 라고 장난스레 말한 남자는 익숙한 손길로 음료를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이안의 앞에 놓인 건 깔루아밀크였다.

“이게 더 취향에 맞으실 것 같아서.”

우중충한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작고 예쁜 컵에 조잡한 우산까지 씌워 주었다. 놀리는 것이 분명함에도 이안은 그 깔루아밀크를 빤히 내려다보다 단숨에 들이켰다. 호쾌한 이안의 태도에 남자가 의외라는 듯 웃었다.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

이안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남자가 손뼉을 쳤다. 그 과장스러운 태도에 이안이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걸 전달해 드리는 걸 깜빡했네.”

깜빡했다면서 남자는 기다려 왔다는 듯 바 밑에서 종이를 꺼내어 이안에게 건넸다. 종이에는 블론드 머리를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 섬세하게 그려져 있었다. 앞모습과 옆모습, 뒷모습과 키까지. 한 장 넘겨 보니 뒷장에는 그 소녀의 것으로 짐작되는 성격과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의 목록들이 있었다.

“미리 봐 두시라고. 이 친구로 곧 변해야 하니까 말이야.”

“내기 기한은 사흘이 남았을 텐데.”

“글쎄, 남았다고 해도 뭘 할 수 있나 싶어서 말이지.”

이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깔루아밀크를 한 잔 더 내주며 남자가 씩 웃었다.

“이거 그 아가씨가 생전에 좋아했던 거거든. 미리 입맛대로 길들여 놓는 게 좋지 않겠어? 뭐, 그래도 나쁘진 않을 거야. 부호로 유명한 후작 밑에서 죽은 손녀딸을 연기하다 보면 떨어지는 게 어디 한둘이겠어?”

이안의 표정이 점차 굳어지자 그것이 당혹스러움에서 비롯된 거라 판단한 듯 남자가 이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딱 세 달만 참으면 돼. 처음부터 위험한 일 같은 거 안 시킨다고 했잖아. 어차피 자유의 몸이 됐는데 늙기 전에 부지런히 벌어 둬야지. 안 그래?”

“넌 내가 이 내기에서 이길 거라는 생각을 아예 안 했나 보군.”

이안의 말에 남자가 느물거리는 미소를 지었다.

“뭐, 내 이름은 다섯 살 때부터 나만 아는 거였으니까. 그러니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승낙한 거고.”

“다르반 페리아네스라는 이름이 그렇게 귀한 이름인 줄은 몰랐는걸.”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던 남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었다. 남자의 얼굴에 의아함과 놀라움, 경악이 점차 번져 갔다.

“너, 너 그 이름을 어떻게…….”

“나도 놀랐어. 죽은 줄 알았던 후작가의 후계자가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다니 말이야.”

여유 만만하던 다르반의 표정에서 여유가 점차 사라져 갔다. 의자에 앉아 있던 다르반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전부 나가. 당장!”

그리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바 안에 있던 손님들은 전부 자리를 비웠다. 계산하고 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사실 전부 ‘붉은 달이 뜬 밤’이라는 정보 길드의 조직원들이었으니까.

술집은 순식간에 텅 비었다. 간판을 내리고 온 다르반은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거친 숨을 들이쉬며 이안을 노려보았다.

“너, 그거 어떻게 안 거야.”

“남이 궁금해하는 정보를 거저 알려 주는 건 천치라고 거기 앉은 누가 그랬을 텐데.”

몇 년 전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다르반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이안의 말대로였다.

다르반 페리아네스, 페리아네스 후작가의 버려진 후계자.

후작가의 첫째 아들과 하녀의 풋사랑의 결실이었던 다르반은 후작의 분노에 의해 태어나기도 전 후작가에서 내쳐졌다. 그 뒤로 후작에 반발한 소후작이 작위도 포기하고 하녀를 따라 나가며 한 편의 로맨스가 만들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현실은 가혹했다. 한 번도 가난이라는 걸 겪어 본 적 없는 후작의 첫째 아들은 어느 날부터인가 풋사랑보다 양질의 생활을 탐하게 되었고, 다르반이 한 살이 되기도 전 약간의 돈주머니를 두고 그대로 후작가로 돌아갔다. 그리고 4년 후 후작이 정해 준 여자와 결혼했다.

다르반은 그때의 어머니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삯바느질을 하며 근근이 살았던 어머니는 수다쟁이 옆집 아주머니가 전해 준 소문을 듣고 그렇구나, 하고 답하고는 다시 묵묵히 바느질을 했다. 다르반은 그 후로부터 저녁 이후론 절대 1층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베개로 틀어막아도 억누른 어머니의 신음과 울음은 다르반의 귓가에 생생히 전해져 왔다.

얼마 가지 않아 과거를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후작이 그들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어머니는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는지 암살자와 함께 동귀어진했다. 어머니는 죽어 가며 사랑한다느니 아낀다느니 하는 말 대신 ‘다르반 페리아네스’라는 이름을 잊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다르반은 자신의 이름을 철저히 숨긴 채 살아왔다. 정보 길드의 말단 심부름꾼부터 시작해 무수한 고비가 있었으나, 살아남아 마침내 길드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조용히 후작가에 관련된 정보들을 모아 왔던 다르반은 힘이 생기자마자 복수를 시작했다.

제일 처음은 후작의 손주였다. 그다음은 둘째 아들이었고, 그다음은 첫째 아들이었다. 살해라는 의심을 아예 하지 못하게 이 과정은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가장 맛있는 건 나중에 먹어야 하듯 후작은 제일 마지막이었다. 후계자를 모두 잃고도 꿋꿋해 보였던 후작은 저번 달 둘째 아들의 딸이 이름 모를 열병으로 죽자 결국 무너져 내렸다. 가장 아끼던 손주이자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있었던 소녀의 죽음이어서인지 후작은 그 후 저택에 칩거해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다르반은 그곳에 이안을 보낼 생각이었다.

손녀딸을 무서울 정도로 닮은 하녀. 정보를 빼다 걸린다 한들 과연 자신의 손으로 손녀딸과 닮은 하녀의 목을 칠 수 있을까. 그는 저택과 자신의 이룩한 모든 것이 자신의 손아귀 밖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볼 것이다. 그 후에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었다. 그때 후작의 표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다르반은 희열에 찼다.

계속되는 권유에도 이안이 거절하는 통에 일이 지지부진해지던 중 그가 내기를 걸어왔다. 자신의 이름을 건 내기를. 다르반은 자신 있었다. 그래서 황족과 장군, 제국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는 요구임에도 받아들였다. 그만큼 이안이 필요했고, 질 거란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안은 도대체 어떤 방법을 썼는진 모르겠지만 이름을 알아 왔다. 다르반으로서는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안은 여전히 건조한 표정으로 다르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약속을, 지키셔야겠습니다.”

* * *

또 온다던 루드비히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다녀가긴 했다. 잠결에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서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넷 중 하나겠지. 음침하게 자는 모습이나 보다 가는 듯했다.

어쨌든 나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 조명이 완전히 꺼질 무렵, 문이 열렸다. 들어오고 나서도 그 객은 한참이나 나를 보았다. 마치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시선으로 나를 샅샅이 핥았다. 나는 불시에 그에게 쿠션을 던졌다.

“그만 봐. 닳아.”

일어나 앉은 나는 스탠드 조명을 켰다. 얼떨결에 쿠션을 잡아챈 루드비히가 평소보다 멍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깨어 있었나.”

“그렇게 쳐다보는데 눈치 못 채는 게 바보지.”

민망한 듯 루드비히가 내게서 시선을 떼어 냈다. 나는 기운이 한풀 꺾인 듯한 말투로 칭얼거렸다.

“……밖에 나가고 싶어.”

“…….”

내 말에 루드비히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침묵했다.

“여긴 너무 답답하단 말이야.”

“방에만 틀어박혀 있었으니 답답하겠지.”

다른 장소는 둘러볼 생각도 안 하고 침실에만 콕 박혀 있었으니 답답하지 않고 배기겠냐는 비꼼이 섞인 말투였다. 나는 입을 삐죽이며 다시 쿠션 하나를 던졌다. 그것을 손가락 두 개로 받아 낸 루드비히가 가지런히 정리된 슬리퍼를 집어 들어 내 발밑에 내려놓았다.

“신어.”

“……어디 가는데.”

“가 보면 알겠지.”

어서 오지 않고 뭐 하냐는 듯 루드비히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나는 못 이기는 척 슬리퍼를 꿰신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드비히가 날 데려간 곳은 유리온실이었다. 돔 형태로 된 거대한 창을 올려다보자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온실 안에 빼곡히 들어찬 식물들이 기분 좋은 향을 뿜어냈다. 어떻게 지하에 이런 곳이 있을 수가 있지.

“이거 진짜야?”

“그래. 만드느라 압실론이 애썼지.”

압실론 이 새끼, 이 지하 궁전에 진심이었구나. 나는 눈치 보느라 나를 찾아오지 않고 있는 압실론을 생각하며 밥맛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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