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46화 (46/149)

#46

그 꿈 뒤로 어떻게 되었더라.

손을 치료하고 기절하듯 잠든 사이 마티어스가 나를 업고 새벽녘에 진영으로 향했다. 이미 사람을 풀어 숲을 수색하고 있던 우리 쪽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하고 바로 이송했다. 그리고 압실론에 의해 말끔하게 치료된 나는 깨어나자마자 루드비히에게 엄청나게 혼났다.

상관 명령 불복종으로 중형까지 받을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내가 달려간 이유를 알고 있는 데다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2주간 출정 금지, 3개월 감봉 정도로 끝났다.

마티어스는 저 때문에 내가 이런 일을 겪자 다소 곤란한 눈치였지만, 나로서는 읍참이현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고마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마티어스는 그 이후로 내게 제법 잘해 주었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 울컥하다가도 상대가 나면 참는 경우가 많아 놀리는 맛이 좀 사라지기도 했다.

이처럼 관계 변화가 확실하다 보니 시청자들이 나와 마티어스 사이에 있었던 일을 궁금해해서 게임을 끄고 한 번 일대기를 읊어 주기도 했다. 17:1의 싸움 끝에 부상당한 마티어스를 구해 낸 나의 이야기에 다들 감동해 달풍선을 쏟아 냈다.

그 이후로 마티어스는 나를 의식하게 된 건지 계속해서 뚝딱거리다가 무심코 내 도발에 넘어가 고백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은 마티어스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벌겋게 물드는 걸 수천 명의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다. 그날 내 주머니가 짭짤해졌음은 물론이다.

과거를 회상하다 보니 어느새 몸의 떨림이 멎어 있었다. 나는 팔뚝을 쓸어내리며 깊게 호흡했다.

“일어났군.”

건조한 불꽃 같은 음성이 불시에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놀라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업무를 보다 왔는지 정복 차림의 루드비히가 문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루드비히가 서서히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 움츠러들었다가 이내 지고 싶지 않아 빳빳이 목을 펴고 루드비히를 바라보았다.

“좋은 꿈이라도 꾼 건가?”

“……뭐?”

“좀처럼 일어나지 않더군. 사흘을 내리 잤어.”

긴 꿈을 꿨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의 시간 역시 제법 길게 흘러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의 머리칼이나 옷차림이 평소에 비해 흐트러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급히 뛰어온 모양이었다. 그런 기색은 전혀 드러내지 않았지만.

“여긴 어디야?”

“황궁 지하.”

“꽤 넓던데.”

“그렇게 느꼈다니 다행이군.”

아까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느꼈지만, 황궁 이곳저곳을 복사해 놓은 듯한 장소였다. 집무실의 개수를 줄이고 도서관과 침실을 넓힌 정도의 수정이 있긴 했지만, 벽지며 태피스트리, 랑브리들이 1층과 거의 흡사했다. 여기가 황궁 지하가 아니면 그게 오히려 소름 끼칠 것 같았다. 뭐, 확실히 다른 것도 있었다. 1층에는 있고, 지하에는 없던 것.

“그런데 날카로운 게 하나도 없더라.”

칼도, 포크도 없고 하다못해 책상 모서리 하나도 둥글게 깎여 있었다. 나는 비웃듯 루드비히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 가둬 두면 내가 언젠가 죽으려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나 봐.”

“……혹시 모를 사고에는 대비해야 하니까.”

루드비히의 말에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렇게 걱정되면 그냥 가사 상태로 만들어 평생 재워 두지, 뭐 이런 걸 다 만들었어.”

“……네가 그런 걸 선호하는 줄은 몰랐군. 참고하지.”

비꼬는 말에 더 비꼬는 말로 답하는 루드비히의 태도에 화가 끓었다. 나는 단숨에 거리를 좁혀 그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루드비히는 내 접근을 알면서도 순순히 멱살을 잡혀 주었다.

“네가 싫어.”

“……예상했어.”

“너희를 혐오해. 전부 죽여 버리고 싶어.”

“할 수 있다면 해.”

나는 루드비히의 목을 움켜쥐었다. 루드비히에게서는 어떤 반항도 없었다. 나는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브레이슬릿을 찬 나는 사람을 죽일 만큼의 힘을 내지 못했다.

“정말 나를 사랑하긴 해? 이게 사랑이 맞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해. 어떻게 사람을 가둬.

“……모르겠다.”

루드비히의 말에 맥이 탁 풀렸다. 목이 졸린 루드비히의 성대에서는 긁는 듯한 쇳소리가 났다.

“몇 년 전까지는 분명 사랑이었던 것 같은데, 언젠가부턴 다른 걸로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어.”

“그래, 차라리 사랑이라고 치장하진 않아서 다행이네.”

나는 루드비히를 거세게 밀쳤다. 두어 걸음 뒷걸음질 쳤던 루드비히가 이내 그런 일 따윈 없었다는 것처럼 다시 중심을 잡았다. 나는 루드비히를 보지도 않고 씹어뱉듯 말했다.

“꺼져. 역겨우니까.”

“……쉬어. 또 오지.”

나는 분통한 마음에 내 겉옷을 빠르게 뭉쳐 떠나가는 루드비히의 뒤통수에 던졌다. 그러나 그 옷은 루드비히의 머리카락 한 올도 건드리지 못하고 추락했다. 방 안에 초라하게 널브러진 겉옷을 내려다보며 나는 오랜 시간 침묵했다.

“…….”

수 분이 지나고 나는 루드비히가 사라진 복도로 시선을 올렸다.

이 정도로 화내면 될까.

아무 방법이 없는 상태의 나라면 이 정도는 화냈을 것 같았다. 조금 어색한 감은 있었지만, 다행히 의심은 사지 않은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드러누운 나는 쿠션을 끌어안은 채 천장의 기하학적인 무늬를 응시했다.

루드비히를 마주쳤을 때부터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에게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1. 잘못했다고 빌어 본다.

2. 여기서 꺼내 달라고 운다.

3. 화낸다.

1번은 이미 약 먹기 전에 시도했다가 실패했었고, 2번 역시 루드비히에겐 씨알도 안 먹힐 반응이었다. 결국 3번이 제일 적절했다. 다행히 방을 돌아보다 보니 정말로 열이 받아 진심 섞인 연기를 할 수 있었다. 적절히 루드비히를 자극하지 않을 만큼 화를 내고 그를 내보냈다.

다음 미션은 그 남자의 이름을 의심을 사지 않고 이안에게 알려 주는 거였다. 이 지하에서 어떻게 이안에게 그 이름을 전달할 수 있을까. 이안을 이곳으로 부르는 건 최후의 수단이었다. 괜한 의심을 사 오히려 접촉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긴 시간 고민했지만,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사이 인공조명이 조금 어두워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시간대에 따라 조도도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 디테일함에 헛웃음이 났다.

“꼴같잖네.”

몇 시간 지나지 않았지만, 이곳의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질리게 만들었다.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것들이 내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아, 그러면 되겠구나.”

조명이 어두워질 무렵이 되어서야 나는 그럭저럭 괜찮은 생각 하나를 떠올려 냈다. 사실 이안이 넷의 관심을 따돌리고 나를 구해 낼 거라는 확신은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모든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비록 썩은 동아줄일지라도.

* * *

이틀이 지났다. 소수의 사용인들은 시간에 맞추어 식사를 내오고 목욕물을 준비하고 잠자리를 봐 주었다. 몇 번 말을 걸어 보았지만 그들은 곤란한 미소만 띨 뿐,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 위에서 명령이 내려온 모양이었다. 그 후로 나도 따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식사에 사용되는 모든 식기는 나무였다. 둥글게 깎아 부드럽게 사포질한 나무 식기에 나무 스푼과 나무 포크가 주어졌다. 나이프는 없었다. 잘 찍히지도 않는 뭉툭한 나무 포크가 기가 차 조금 오래 바라봤다고 다음 날부터는 아예 나무 스푼만이 나왔다. 대신 스푼으로 떠먹을 수 있을 만큼 음식들이 잘게 썰려 나왔다.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내 일거수일투족이 그들에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체할 것 같은 기분에 아침을 걸렀지만, 점심때 즈음에는 오히려 그걸 이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식사를 마친 뒤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는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냅킨을 쥔 채 소리를 냈다.

“참.”

식기를 가져가는 사용인이 내 말에 멈칫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축제 날 나 구해 준 사람이 있거든. 그 사람한테 보답을 좀 하고 싶은데.”

“…….”

“가면을 써서 얼굴은 모르는데, 이름은 다르반…… 다르반 페리아네스.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아.”

“…….”

“너희가 나 숨 쉬는 거 하나하나 보고하는 거 알아. 그러니까 이것도 루드비히한테 가서 보고해.”

“…….”

신랄한 어조에도 사용인은 별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알아들었다는 표시였다. 나는 그들이 자리를 떠날 때까지 침대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심장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이불을 뒤집어쓰지 않았다면 이 표정을 꼼짝없이 들켰을 터였다.

* * *

“……다르반 페리아네스라.”

“예. 은혜를 입으셨다고 합니다.”

“다른 특징은?”

“가면을 썼다고 했습니다.”

“어떤 도움을 받았다고 했지?”

“그것까지는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래. 물러가라.”

축객령에 시종이 예를 표한 뒤 뒤로 물러났다. 루드비히가 피곤한 듯 손바닥으로 마른 뺨을 비볐다.

“찾아봐.”

루드비히가 옆에서 사무를 보던 이안에게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예.”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으니 그 사람에 대한 정보도 샅샅이 알아 와.”

“그러겠습니다.”

“머리가 아프군.”

“약을 드릴까요?”

“아니, 괜찮다.”

이현이 또 무슨 수작질 중일까 고민하던 루드비히는 옆에 있는 이안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창밖의 노을이 집무실을 붉게 물들였다. 루드비히는 저무는 해를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퇴근 시간이군. 일단 퇴근하도록.”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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