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미쳤는데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요-44화 (44/149)

#44

“……괜찮아.”

“너 근데 이마에서 피 나는데.”

“시끄러워.”

곧 죽어도 허세는. 그래도 허세를 부리는 걸 보아하니 아직까지는 살 만한 모양이었다.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쉬는 마티어스를 내려다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걸을 수 있겠어?”

“당연하지……. 1분만 쉬면 돼.”

심각하구만. 나는 흘깃 위를 바라보았다.

“젠장.”

엿 됐다. 나는 입술이 창백해지도록 깨물었다. 기사들이 몸에 밧줄을 맨 채 빠른 속도로 절벽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다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하필이면 체력 포션은 없고 마력 포션만 몇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허공을 떠돌던 손에 포션 하나가 잡혔다.

“하, 이거 진짜 아끼던 건데.”

투박한 유리병 안에 담겨 있는 마력 포션과 달리 이 포션은 은은한 보라색 병에 금박 세공까지 섬세하게 입혀져 있었다. 포션을 딴 나는 그대로 그것을 내 입 안으로 기울였다. 달달한 맛이 나는 포션이 입 안의 갈증을 조금이나마 없애 주었다.

<‘최고급 마나 포션’이 1개 소비되었습니다.>

<마력이 10초에 걸쳐 50% 차오릅니다.>

이 외에도 나는 되는 대로 남은 마력 포션을 들이키며 마티어스의 몸 이곳저곳을 더듬었다. 마티어스가 지친 와중에도 몸을 뒤틀며 반항했다.

“뭐, 뭐 하는 짓이야. 죽고 싶어?”

“아니, 살고 싶어서 이러는 거거든. 다행히 뭐 꽂힌 건 없어 보이네.”

병사들이 절벽을 거의 다 내려온 상태였다. 이제 1분에서 2분이면 마주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마티어스의 멱살을 거머쥐고 내게 잡아끌었다. 녀석의 동공이 겁먹은 짐승처럼 변해 있었다. 적군들에게 휩싸여도 호기로운 녀석이 내 행동에 겁을 먹는다는 게 조금 우스웠다.

“너, 약속해.”

“뭐, 뭘?”

“나 꼭 데려가겠다고.”

“무슨…….”

제일 몸이 잰 병사 하나가 절벽을 모두 내려왔다. 나는 망설임 없이 녀석의 심장에 손을 얹고 주문을 외웠다.

“생명 전이.”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써 보는 주문이었다. 평소엔 팔 부근에서만 반짝거리던 마력의 기운이 해일처럼 온몸을 휩쓸었다. 녀석의 몸의 상처가 시간을 되돌리는 것처럼 나아 가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일반적인 회복 마법은 마티어스의 몸을 치료하기에 부족하고, 고위 회복 마법은 아직 익히지 못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내 목숨을 거는 일밖에 없었다.

<체력이 4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물약과 휴식으로 체력을 보충하세요!>

<체력이 3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물약과 휴식으로 체력을 보충하세요!>

<체력이 2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물약과 휴식으로 체력을 보충하세요!>

<체력이 10% 이하로 떨어졌습니다. 기절과 사망 확률이 올라갑니다. 물약과 휴식으로 체력을 보충하세요!>

<‘생명 전이’ 스킬 시전으로 인해 30분간 ‘기절’ 상태로 진입합니다. 상태 이상 ‘기절’까지 앞으로 3초…….>

내 생명의 위험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 시끄럽게 울려 댔다. ‘생명 전이’, 이 스킬은 시전자의 체력과 마력을 50%씩 소모해 상대의 체력과 마력을 30%씩 충전해 주는 스킬이었다. 50%를 주는데 50%가 아니라 30%를 충전해 주는 게 좀 억울하긴 하지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주문이라 선택지가 없었다. 나는 흐려지는 정신 속에서도 마티어스의 소매를 쥐고 말했다.

“나 버리고 가면, 너 가만 안 둬…….”

“뭐야, 이거 뭔데. 너 죽는 거 아니지? 야, 눈 좀 떠 봐! 제기랄!”

마티어스는 당황해 나를 흔들었다. 흔드는 거만으로도 체력이 쭉쭉 닳는 게 느껴졌다. 나는 힘 없는 손가락으로 마티어스를 툭 밀었다. 목소리를 내는 것만으로도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안, 죽어, 미친놈아. 나 데리고 도망이나, 쳐…….”

결심한 듯 마티어스가 나를 안고 뛰기 시작했다. 온 시야가 암흑으로 가득 차며 고통에서 서서히 멀어졌다.

* * *

“……나.”

어?

“……어나.”

편안히 잠들어 있는 내 귓가에서 누군가가 시끄럽게 울어 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뭐라는 거야, 생각했다.

“……일어나라고!”

철썩!

뺨에 불이 튀는 듯한 고통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아, 아, 아, 아파…….”

눈을 뜨자마자 손을 든 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마티어스가 보였다. 이번에 눈을 안 떴으면 얼마나 더 세게 맞았을까. 그 생각밖에 안 들 정도로 위협적인 손바닥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동굴.”

동굴이라는 걸 알려 주려는 듯 동굴 천장의 종유석에 맺혀 있던 물이 내 이마 위로 똑 떨어졌다. 나는 인상을 살포시 찡그리고 화살이 박히지 않은 손을 들어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을 훔쳤다.

나는 마티어스의 망토를 깔고 누워 있었다. 불을 피우지 않은 동굴은 어두웠지만, 동시에 아늑했다. 동물이 살았던 곳인지 묘한 누린내가 나기도 했다. 서서히 사태를 파악하고 있는데 마티어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무슨 생각으로 여기 혼자 온 거야.”

책망하는 듯한 어조였다. 나는 기가 차 아픈 와중에도 눈을 치켜뜨고 마티어스를 노려보았다.

“너 살리려고 왔다, 왜!”

“그러니까, 알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왜 도우러 왔냐고!”

“알아서 못 빠져나왔잖아.”

“할 수 있었어.”

“나 아니었으면 절벽에서 떨어졌을 게.”

“할 수 있었다고!”

사방이 꽉 막힌 동굴이다 보니 마티어스의 말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인상을 슬쩍 찌푸렸다.

“……크게 말하지 마. 머리 울려.”

연신 씩씩거리던 마티어스가 내 말 한마디에 단박에 풀이 죽어서는 나를 바라보았다.

“많이 아파?”

“어.”

나는 부어오른 뺨을 매만지며 까칠하게 답했다. 우물쭈물하던 마티어스가 이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말했다.

“……미안해.”

나는 믿기지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티어스를 보았다.

얘가 진짜 나한테 미안하다고 한 거야?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더 놀릴까 말까 고민하던 나는 상황 파악을 위해 놀리기를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숲은 빠져나온 거야?”

30분간 기절이었으니 아직 못 빠져나왔을 것 같긴 하다만.

“아니, 도중에 추격이 붙어서 일단 곰 동굴에 들어왔어.”

“곰 동굴?”

“그래.”

“곰은 어딨는데?”

“저기 동굴 중간에.”

마티어스가 앞을 가리키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나는 당황해 몸을 일으켰다. 이윽고 몰려오는 근육통과 고통에 그만두었지만.

“해치웠어. 걱정 마.”

“해치웠다고? 네가?”

나는 믿기지 않아 다시 되물었다. 몸 상태가 그렇게 좋진 않았을 텐데. 내 말이 마티어스의 자존심을 세워 주었는지 그의 낯이 약간 우쭐한 기색을 띠었다. 하여간 이런 점이 한심하면서도 귀엽다니까.

“일대일은 누구한테도 져 본 적 없다니까.”

잘 보이진 않지만 실루엣을 보아하니 그리즐리 베어 성체 같은데, 대단하긴 하다. 나는 코 밑을 슥슥 문지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곰 누린내 나.”

“참아. 위장하려면 어쩔 수 없어.”

“하아……. 맞다, 마티어스 너 체력 포션 같은 거 없냐?”

“……없는데.”

“있는 게 뭐야.”

“……술?”

“그건 왜 있냐?”

“저녁 식사 때 대접받았는데 꽤 맛있어서 나중에 루드비히 주려고 챙겼어.”

하여간 루드비히 진짜 사랑하네.

이러다 루드비히한테 고백하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내 손을 관통하고 있는 화살을 살폈다. 의외로 아예 움직이지 않으면 별로 아프지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파상풍이었다.

<상태 이상 ‘관통상’, 빠르게 화살을 제거하세요. ‘파상풍’ 위험이 시간당 15%씩 늘어납니다. 사용자의 체력이 초당 0.18%씩 떨어집니다. 화살을 제거하기 전까지 자연 치유가 불가합니다.>

시스템 창이 간헐적으로 이 경고를 띄우고 있었다. 체력은 이미 위험한 상태였다. 어떻게든 이 화살을 빠르게 제거해야 했다.

어떡하지.

나는 동굴 여기저기에 자라난 애꿎은 풀을 잡아 뜯으며 고민했다. 손안에서 짓이겨진 풀에서 씁쓰름한 냄새가 났다. 줄기에서 나온 흰 점액질이 손을 끈적하게 만들었다.

“어?”

독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풀의 상태 창을 살피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이람 풀: 지혈, 진통, 소염 성분이 있는 풀. 찧어서 붙이거나 말린 뒤 가루를 내어 상처 부위에 바름.]

잭팟이었다.

“왜 그래?”

“……난 역시 운이 좋은가 봐.”

“무슨 헛소리야? 열 나서 그런가?”

마티어스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나는 작은 목소리로 맵을 켜 달라 중얼거렸다. 네이번의 병사들이 산 전체에 퍼져 우리를 수색하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동굴 근처까지는 접근하지 않고 있었다.

“마티어스, 너 좀 나갔다 와야겠다.”

“……왜?”

“가서 덩굴이랑 지혈대로 쓸 나무껍질 좀 가져와.”

여기서 화살을 빼야겠어.

화살을 슬쩍 튕기며 말하는 내 모습에 마티어스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뭘 찌푸려, 찌푸리기는. 이거 네 머리통 박살 나는 거 살리려다 박힌 명예의 상처거든?

“새벽이면 경계도 느슨해질 텐데 그때 너 업고 우리 진영으로 가면 되잖아. 가서 치료받는 게 더 낫지 않아?”

“안 돼. 그때까지 체력이 못 버텨.”

내 말에 마티어스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울 것 같기도 하고, 화난 것 같기도 한 기묘한 표정에 괜스레 기분이 이상해진 나는 멀쩡한 손으로 마티어스의 팔뚝을 찰싹 쳤다.

“그러니까 얼른 가서 구해 와.”

“알았어. 조금만 기다려.”

“참, 불 피울 장작이랑 물도.”

“……그래. 다녀올게.”

평소엔 조금만 시켜 먹어도 잡아먹으려고 하더니 대신 화살 한 번 맞아 줬다고 고분고분하다. 하긴, 나 같아도 넙죽 엎드리겠다. 이 일로 날 좀 좋아해 주면 좋겠는데.

“뭐…… 고백해 주면 더 좋고.”

나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로 나에게 고백하는 마티어스를 상상하다 고통도 잊고 킥킥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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